목차
Ⅰ. 들어가며
Ⅱ.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1. 십자가는 핵심이며, 표준이다.
2, 십자가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다.
3, 십자가를 지라
Ⅲ. 마치며
Ⅱ.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1. 십자가는 핵심이며, 표준이다.
2, 십자가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다.
3, 십자가를 지라
Ⅲ. 마치며
본문내용
적을 베푸시고 번성시켜주심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나시고, 죄를 위해 죽으시고,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표준이다.
그래서, ‘섬김과 희생’의 종교가 ‘기독교’이다. 메카를 짓고, 창시자, 교주의 무덤을 크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고, 낮아짐에 자리에 가는 것이 기독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듯이 모든 종교는 캐논이라고 하는 정경을 가지고 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경 말씀을 가감한다는 데 있다. 시작은 성경인데, 마지막은 교주의 말이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그리고, 전세계 표준인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더 하거나 뺀다. 성경을 읽게 하지만, 성경을 읽을 직분과 자격은 주지만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단은 처음은 같지만, 끝이 다르다는 뜻 아닌가? 자신이 신봉하는 교주를 세우고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여 짜짓는다. 빼고 더하고 덧붙인다. 이단만 그렇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가? 내가 만약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만 안 듣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데도 준행하지 않는다면? 이단과 다르지 않다.
이단이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통이 정통답지 못해서다. 표준이 표준을 잃어버려서다. 진짜가 진짜를 잃어버려서이다. 십자가를 잃어버려서이다. 종교의 타락은 성경대로 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시대가 유독 더한 이유는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빼고 신앙생활 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못박았다.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우리가 가질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세상의 이념은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네가 죽어줘야겠다 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나시고, 죽으시고, 고난당하시고 다시 사심” 이 신비를 경험해야 진짜 복음이다. 기적이 중요한게 아니라, 치료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축복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의 나심과 같이 거듭나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이 다시 사심과 같이 다시 부활하여 천국을 경험하며 산다! 이게 복음이며, 이게 기독교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어떤 사람에게도 십자가가 있는 곳에 용서가 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회복이 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시작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도 십자가이다. 기독교의 표준은 바로 수세기, 수 많은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표준은 십자가이다.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바뀌고, 기업 순위가 바뀌고, 달라져도 유일한 표준은 십자가 이어야 한다. 병원선이 십자가를 달고가면 누구든지 환영하듯이 당신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들고 갈 때 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십자가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다.
‘은혜’는 댓가 없이 일방적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믿음을 수 없는 하나님의 희생’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이다. 예수님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다 이루었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모든 죽음의 공포와 죄의 권세가 부서지고 끝났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시기 전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1-2절)
죄가 없는 세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던 세상을 만드시고 안식하시던 그 날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성경은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그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 죄인이 아닌 의로운 자,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주심으로 용서받는 의인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한 사람이 되었으며,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선포,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와 축복을 이루심의 선포였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나는 날마다 새로워진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시대에는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로 ‘도피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민32:10-12)
구약 율법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인에는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 살인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원수 갚는다고해도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살인의 악순환은 막을 길이 없기에 억울한 살인자를 위한 성이 준비되었는데, 도피성이라불렸다. 도피성을 3군데 지정하였는데, 한나절에 갈 수 있는 거리 32킬로 미터였다. 마라톤은 42.195킬로이다. 따라서 도피성은 아무리 멀어도 빠른 걸음으로 한 나절로 갈 수 있었다. 그 가는 길은 넓게 확장 시켜서 14 미터였다. 도피성을 가는 길에는 미크라트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놓쳐서 뒤 따라오는 사람에게 붙들리지 않기 위한 배려가 있었다. 길목에 안전장치를 마련해서 도피성을 쉽게 발견하도록 돕고,
그래서, ‘섬김과 희생’의 종교가 ‘기독교’이다. 메카를 짓고, 창시자, 교주의 무덤을 크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고, 낮아짐에 자리에 가는 것이 기독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듯이 모든 종교는 캐논이라고 하는 정경을 가지고 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경 말씀을 가감한다는 데 있다. 시작은 성경인데, 마지막은 교주의 말이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그리고, 전세계 표준인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더 하거나 뺀다. 성경을 읽게 하지만, 성경을 읽을 직분과 자격은 주지만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단은 처음은 같지만, 끝이 다르다는 뜻 아닌가? 자신이 신봉하는 교주를 세우고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여 짜짓는다. 빼고 더하고 덧붙인다. 이단만 그렇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가? 내가 만약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만 안 듣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데도 준행하지 않는다면? 이단과 다르지 않다.
이단이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통이 정통답지 못해서다. 표준이 표준을 잃어버려서다. 진짜가 진짜를 잃어버려서이다. 십자가를 잃어버려서이다. 종교의 타락은 성경대로 살지 않을 때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시대가 유독 더한 이유는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빼고 신앙생활 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못박았다.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우리가 가질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세상의 이념은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네가 죽어줘야겠다 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나시고, 죽으시고, 고난당하시고 다시 사심” 이 신비를 경험해야 진짜 복음이다. 기적이 중요한게 아니라, 치료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축복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의 나심과 같이 거듭나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이 다시 사심과 같이 다시 부활하여 천국을 경험하며 산다! 이게 복음이며, 이게 기독교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어떤 사람에게도 십자가가 있는 곳에 용서가 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회복이 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시작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도 십자가이다. 기독교의 표준은 바로 수세기, 수 많은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표준은 십자가이다. 시대가 바뀌고 유행이 바뀌고, 기업 순위가 바뀌고, 달라져도 유일한 표준은 십자가 이어야 한다. 병원선이 십자가를 달고가면 누구든지 환영하듯이 당신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를 들고 갈 때 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십자가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다.
‘은혜’는 댓가 없이 일방적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믿음을 수 없는 하나님의 희생’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이다. 예수님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다 이루었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모든 죽음의 공포와 죄의 권세가 부서지고 끝났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시기 전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 2:1-2절)
죄가 없는 세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던 세상을 만드시고 안식하시던 그 날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고 성경은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그때,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 죄인이 아닌 의로운 자,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주심으로 용서받는 의인이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한 사람이 되었으며,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선포,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와 축복을 이루심의 선포였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십자가의 은혜로 나는 날마다 새로워진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시대에는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로 ‘도피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민32:10-12)
구약 율법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살인에는 목숨으로 갚아야 했다. 살인자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원수 갚는다고해도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살인의 악순환은 막을 길이 없기에 억울한 살인자를 위한 성이 준비되었는데, 도피성이라불렸다. 도피성을 3군데 지정하였는데, 한나절에 갈 수 있는 거리 32킬로 미터였다. 마라톤은 42.195킬로이다. 따라서 도피성은 아무리 멀어도 빠른 걸음으로 한 나절로 갈 수 있었다. 그 가는 길은 넓게 확장 시켜서 14 미터였다. 도피성을 가는 길에는 미크라트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놓쳐서 뒤 따라오는 사람에게 붙들리지 않기 위한 배려가 있었다. 길목에 안전장치를 마련해서 도피성을 쉽게 발견하도록 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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