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및 윤리사상(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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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및 윤리사상(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쾌락주의
- 아리스티포스와 키레네 학파
- 쾌락주의의 문제점
- 에피쿠로스주의
- 철학과 죽음의 두려움
- 원자론적 유물론
- 운명과 인간의 자유 : 이탈
- 실제적인 행복
- 에피쿠로스주의의 문제점
- 스토아학파
- 존재하여야 하는 것은 반드시 존재하여야만 한다
-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
- 제논
- 이성적인 삶
- 에픽테토스
- 현대의 스토아주의자
- 스토아주의의 문제점

본문내용

들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리스티포스와 키레네 학파
헬레니즘 이전 시대에도 쾌락주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철학자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키레네 학파라고 불리는데, 그 중심 인물은 북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키레네출신의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355년경)였다. 키레네 학파의 철학은 오직 쾌락을 극대화하라는 것이었다. 고향인 키레네에서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였고 키레네주의의 기본 주장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그는 쾌락이 우리의 삶의 자연스러운 목표이며, 사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항상 쾌락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적인 심사숙고와 관조가 주는 쾌락은 사실은 창백하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의 육체가 얻을 수 있는 보다 생생하고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물론 이성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중요성은 우리의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수를 늘일 수 있다는 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쾌락주의는 트라시마코스의 윤리학을 직접 이어받은 것이다.
쾌락주의의 문제점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아리스티포스가 권하는 방탕한 삶을 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점을 바로 알게 된다. 또한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쾌락을 얻을 수 있는 기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쾌락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경을 써야 하며 고통을 주는 결과를 피하기 위하여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결국 이렇게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삶은 쾌락주의가 권하는 태평스럽고 즐거운 삶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키레네 학파의 철학은 자주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즉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쾌락을 얻을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는 역설에 빠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쾌락주의는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보다 중요하고 비중있는 삶의 철학으로 자리잡게 된다. 쾌락주의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즉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1)의 사상을 이어받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것이다.
에피쿠로스 주의
에피쿠로스는 소극적 쾌락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얻으면 만족하고 고통을 혐오한다. 이는 이성과는 무관하게 본성에 이끌려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쾌락이라는 말을 통해서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강조하는 바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부재라는 목표가 키레네 학파가 추구하였던 감각적 쾌락의 삶을 피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고 목표라고 말할 때 여기서 쾌락이 방탕한 쾌락이나 관능적인 쾌락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쾌락을 추구해도 좋은 유일한 경우는 오직 ‘그런 쾌락이 현존하면서도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으며 육체나 정신 또는 이들 둘 모두에게 어떤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 경우’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최대한의 쾌락은 모든 고통을 제거함으로써만 그 극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소극적 쾌락주의의 길에 따름으로써만 우리는 모든 행위의 목적 또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경험인 고통을 겪지 않고 육체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함을 추구하려면 자신의 삶을 간소하게 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매우 검소한 식사를 할 것을 권한다. ‘검소하고 값싼 식사에 길들여진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건강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배고픔의 고통을 제거하고 거낭을 유지할 정도의 검소한 식사에 만족하게 된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검소한 식사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검소한 식사에 만족하게 된다면 값비싼 식사를 하기 위한 돈이 없을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모두를 제거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추천한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를 결정함에 있어 에피쿠로스는 우선 우리의 욕구를 세 가지로 구별한다.
1.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것. (음식에 대한 욕구)
2. 자연적이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것. (성행위에 대한 욕구)
3. 근거 없는 비자연적인 것. (화려한 옷에 대한 욕구)
만일 자연적인 동시에 필수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충족되지 않더라도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모든 욕구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근거 없는 욕구들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육체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관행이나 사회적 습관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의 충족이라는 기준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번잡한 세상일에서 벗어나 조용한 개인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은둔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우리의 고통들 대부분이 좌절과 조급함 그리고 다툼으로부터 즉 사회의 구성원으로 공적인 사람을 살면서 겪게 되는 순전한 신경 과민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믿었다. 최선의 삶은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의 조용한 교제를 즐기고 오직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감정을 보다 자세히 분류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쾌락의 경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동적인 쾌락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적인 쾌락이 존재한다. 동적인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음식을 먹는 것은 동적으로 쾌락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배고픔의 고통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동적인 쾌락은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적인 쾌락은 육체가 고통이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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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1.01.08
  • 저작시기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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