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청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인자유대회 분석
본 자료는 6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해당 자료는 6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6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청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인자유대회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1. 중기(1923~1926)
2. 후기(1926~932)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프랑스조계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청년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인자유대회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시정부는 1942년 3월 1일, 31절 23주년이 오자 2곳에서 대규모 紀念大會를 개최하였다.
그 하나는 中國 重慶에서 개최된 기념대회였다. 주목할 것은 이 대회가 국제적 주목을 받아 중국 정부와 국민당 대표뿐만 아니라 당시 중경에 있던 미국영국쏘련의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서양 각국의 주요 통신사와 신문사 기자들이 참석하여 취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31절 23주년 기념대회에서는 ① 한국의 獨立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③ 한국의 27번째 참전국으로의 인정과 기타 워싱톤 대한인자유대회지지, 중국의 항일전선 장병 위문 및 경의 표시 등이 결의 요구되었다. 이 요구는 전 세계에 일단 타전되었으며, 특히 중국과 인도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커다란 호응이 있어났다.
다른 하나는 임시정부의 지시 하에 1919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미국 워싱톤에서 개최된 ‘大韓人自由大會’였다. 이 대회는 임시정부 駐美外交委員部와 在美韓族聯合會와 韓美協會가 공동주최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韓美協會에 참가한 다수의 미국인들이 참석하여 이채를 띄었다.
이 대회에서는 ① 1919년의 독립선언의 재확인과 自由自主를 쟁취할 최후 순간까지의 투쟁 ② 중경에 현존한 大韓民國 임시정부의 봉대 ③ 1942년 1월 1일 미국 위싱톤에서의 26개국이 조인한 ‘聯合國宣言書’찬성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및 ‘연합국선언서’의 一員으로 활동할 자격부여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요청 ⑤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件의 미국 국회에의 요청 등 5개항을 결의하였다.
결의문 제 一
우리 대회 각 회원은 1942년 3월 1일인 오늘날, 1919년의 선언서를 다시금 승인하는 동시에 주미 외교위원부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및 하와이 호놀놀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자들과 한미협회와 대한 본국과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한 애국지사의 위임자로 또는 대표자로 모인 우리는 자유와 자주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것을 여기에서 선언하노라.
결의문 제 二
1942년 3월 1일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및 하와이 호놀놀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자들과 한미협회와 대한 본국과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한 애국지사의 위임자로 또는 대표자로 모인 우리는 중국 중경에 현존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원조 봉대하기로 여기에 선언하노라.
결의문 제 三
1942년 3월 1일 주미 외교위원부와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및 하와이 호놀놀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자들과 한미협회와 대한 본국과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한 애국지사의 위임자로 또는 대표자로 모인 우리는 1942년 1월 1일 미국 워싱톤DC에서 26개국이 조인한 연합국 선언을 찬성하기로 다시금 선언 승인하노라.
결의문 제 四
1942년 3월 1일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및 하와이 호놀놀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자들과 한미협회와 대한 본국과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한 애국지사의 위임자로 또는 대표자로 모인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건과 연합국선언서의 일원으로 활동할 자격부여건를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하도록 위임요구제의하노라.
결의문 제 五
1942년 3월 1일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및 하와이 호놀놀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회 대표자들과 한미협회와 대한 본국과 중국과 러시아에 산재한 애국지사의 위임자로 또는 대표자로 모인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건을 미국 국회에 청원하도록 여기서 위임요구제의하노라.
임시정부의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미국과 영국은 침묵했으나 민감하게 주목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자기들을 공격하기 이전까지는 언제나 親日的이었고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협조적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1942년부터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미국은 영국이 태평양에서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으므로 승리를 위해서는 中國이 일본과 더 적극적으로 잘 싸워 일본군을 중국대륙에 더 묶어두고, 쏘련이 참전하여 일본군의 주력 중 하나를 만주에 더 묶어두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결과 中國과 쏘련의 국제적 비중이 더욱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對일본 참전을 요구하므로,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작은 힘이라도 對日本戰에서 활용할 수 있는가의 측면에서 문제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Ⅸ. 결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단일정부로 통합되기 이전부터 외교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고 국제적인 승인과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임시정부는 통합으로 정통성을 확고히 한 후에는 연통제 등으로 독립운동의 통할을 꾀하고, 밖으로는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 등 국제기구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영국, 불란서, 독일 등 유럽국가와 미국, 소련, 중국 등 열강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보면, 일제에게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긴 이래 열강들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소멸되었고, 일제와 열강들간의 일방적인 관계로 지속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어려운 국제환경속에서 절망과 좌절을 겪으면서 꾸준하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열강들의 대한정책은 주로 자국 중심의 이해관계에 의해 처리되었다. 영국은 1913년 이후 일본의 팽창정책으로 인해 영일동맹 관계가 소원하여지고 명목만 남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문제를 중국과의 관계에 부수시켜 다루어 왔다. 영국 스스로 동아시아에서의 행동을 제약하여 왔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영국의 초기 정책은 영국민을 보호하는 차원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고정휴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정부 수립운동에 대한 재검토, 한국역사연구회, 2000
고정휴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에 대한 검토, 한국역사연구회, 2000
김희곤, 고정휴 외 3명 / 제대로 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식산업사, 2009
이현희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과 그 성과, 동선사학회, 2001
이현희 / 건국강령에 나타난 홍익인간정신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이념, 삼균학회, 1984
정병준 /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 한국역사연구회, 1997
  • 가격7,5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5.01.0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4633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