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단편영화 기획서와 시놉시스 제출
- 목 차 -
1. 기획서
2. 시놉시스
<< 함께 제공되는 참고자료 한글파일 >>
1. 기획서 1.hwp
2. 시놉시스 1.hwp
3. 기획서 2.hwp
4. 시놉시스 2.hwp
5. 기획서 3.hwp
6. 시놉시스 3.hwp
- 목 차 -
1. 기획서
2. 시놉시스
<< 함께 제공되는 참고자료 한글파일 >>
1. 기획서 1.hwp
2. 시놉시스 1.hwp
3. 기획서 2.hwp
4. 시놉시스 2.hwp
5. 기획서 3.hwp
6. 시놉시스 3.hwp
본문내용
1. 기획서 - 인간상실
현대 사회에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SF와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비행할 수 있는 자동차, 날 수 있는 스케이트 보드…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 이론상으로는 이미 구현했지만, 기술이 이론을 따라가지 못해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 수학의 이론은 이미 수백 년을 앞서 있지만, 기술이 이론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이야기.
물론 근거 없는, 뜬소문들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그리고 언젠가, 기술이 수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게 된다면? 대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인간상실’은,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방향을 생각해 본 결과이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지만, 사실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있지만, 청년 실업의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고, 저출산과 고령화는 많은 나라에서 심각하다며 아우성이다. 그리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록, 일자리는 점점 더 사라질 것이다. 본인이 작성한 시놉시스에서는 ‘기업의 배려로 일을 하지 않아도 평범한 수준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편리한 상황을 설정하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따로 있다. 왜냐하면, 본인이 작성한 시놉시스에서는, 이렇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인생에 회의감을 느껴 무력해지고 결국 ‘신(新)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유혈 사태를 발생시키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저 생활을 영위하는 것만이 무슨 소용일까? 배 곪지 않고 등 따시게 자는 것이 인간의 모든 욕구가 아니다. 당장 그 유명한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이 있는 존재이고, 욕구 피라미드의 최하위 단계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욕구를 충족시키면 자연스럽게 다음 욕구로 눈이 간다. 그렇게 하나하나 욕구를 충족시켜가며 피라미드의 최상층인 자아실현의 욕구에 이르게 된다.
‘인간상실’에서 모든 인간들은 배를 곪지 않고 항상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인생에 회의감을 느낄까? 그것은 최소한의 생활만 보장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의미를 느낄 수조차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그러나 ‘인간상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리 질문해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방황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제공되는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제공되는 음식을 먹으면 그만이다. 제공되는 즐길 거리를 즐기면 끝이다.
인간은 상실되고 있다. 그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려고 의도했다.
첫 번째, 앞서 언급했듯 작중에서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대다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삶의 목적을 잃어 인간을 상실했다.
- 중략 -
현대 사회에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SF와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비행할 수 있는 자동차, 날 수 있는 스케이트 보드…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 이론상으로는 이미 구현했지만, 기술이 이론을 따라가지 못해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 수학의 이론은 이미 수백 년을 앞서 있지만, 기술이 이론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이야기.
물론 근거 없는, 뜬소문들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다면? 그리고 언젠가, 기술이 수학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게 된다면? 대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인간상실’은, 이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방향을 생각해 본 결과이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지만, 사실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있지만, 청년 실업의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고, 저출산과 고령화는 많은 나라에서 심각하다며 아우성이다. 그리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록, 일자리는 점점 더 사라질 것이다. 본인이 작성한 시놉시스에서는 ‘기업의 배려로 일을 하지 않아도 평범한 수준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편리한 상황을 설정하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따로 있다. 왜냐하면, 본인이 작성한 시놉시스에서는, 이렇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인생에 회의감을 느껴 무력해지고 결국 ‘신(新)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유혈 사태를 발생시키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저 생활을 영위하는 것만이 무슨 소용일까? 배 곪지 않고 등 따시게 자는 것이 인간의 모든 욕구가 아니다. 당장 그 유명한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이 있는 존재이고, 욕구 피라미드의 최하위 단계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욕구를 충족시키면 자연스럽게 다음 욕구로 눈이 간다. 그렇게 하나하나 욕구를 충족시켜가며 피라미드의 최상층인 자아실현의 욕구에 이르게 된다.
‘인간상실’에서 모든 인간들은 배를 곪지 않고 항상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인생에 회의감을 느낄까? 그것은 최소한의 생활만 보장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의미를 느낄 수조차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그러나 ‘인간상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리 질문해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방황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제공되는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제공되는 음식을 먹으면 그만이다. 제공되는 즐길 거리를 즐기면 끝이다.
인간은 상실되고 있다. 그것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려고 의도했다.
첫 번째, 앞서 언급했듯 작중에서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대다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삶의 목적을 잃어 인간을 상실했다.
-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