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들어가며
II. 독일 민족주의 태동기-고대, 중세
III. 독일 민족주의 발전기-근대
IV. 현대 독일 속의 독일 민족주의 영향
V. 마치며
VI. 참고문헌
II. 독일 민족주의 태동기-고대, 중세
III. 독일 민족주의 발전기-근대
IV. 현대 독일 속의 독일 민족주의 영향
V. 마치며
VI. 참고문헌
본문내용
운 일이었다. 독일의 놀라운 통일에는 그 이전부터 꾸준히 발전했던 독일의 민족주의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므로 연방주의로 통일된 현대 독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민족주의의 발전사를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글은 19세기부터 그 시작을 찾는다. 하지만 왜 독일이 19세기부터 민족주의를 다루는 데 있어 혈통과 문화적 속성을 강조했는지, 왜 독일 민족주의 발전 방향이 그렇게 전개됐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19세기 이후 독일의 역사로는 부족하다. 이런 사실은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 19세기 이전 독일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하여 본 글에서는 독일의 민족주의 발전사를 태동기인 고대와 중세, 발전기인 근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그다음 이것을 바탕으로 이런 독일 민족주의 발전사가 현대 독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 볼 것이다.
II. 독일 민족주의 태동기-고대, 중세
고대 시기는 현대적인 개념의 독일 민족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시기였다. 오늘날 독일인의 민족인 게르만 민족은 부족 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라인강 너머 부족들을 통틀어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이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라는 서적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르마니아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를 보면 라인강 동쪽과 도나우강 북쪽의 독일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로마 영향권 밖의 독일 지역이다. 게르만족을 다룬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이 범위에 있는 부족들을 다룬 사실로 보아 당시 로마인은 해당 지역에 있는 부족들을 게르만족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르만족 스스로는 게르만 자체의 정체성보다는 부족적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4세기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등이 대표적이다.
이 존재했다는 점 그리고 그 왕국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체의 같은 민족의식 기원전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등 수많은 정치집단이 있었지만 ‘헬레네스’라는 동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같은 민족의식은 올림픽이라는 각 폴리스 간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게르만족들 사이에는 올림픽 같은 동일 민족의식을 나타내는 일체의 의식이나 인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런 부족 중심적 게르만 정체성은 중세시대 게르만 민족이 왕국, 공국 등 수많은 정치집단으로 난립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다른 게르만계 국가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앵글로 색슨족과 노르만족이 세운 영국,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 앵글로 색슨족이 세운 네덜란드 등이 독일을 제외한 대표적인 게르만계 국가이다.
와 구별되는 독일만의 특성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서로마 제국 몰락 뒤 게르만족의 나라 프랑크 왕국이 독일 지역을 장악했다. 프랑크 왕국은 독일 아헨 지역을 수도로 서유럽 상당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독일 일부 지역은 기독교 세계로 편입됐다. 일부 독일 지역의 기독교 개종 이후 피핀 왕 같은 프랑크 왕의 정복 활동에 맞추어 기독교는 독일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크 왕국의 정복 활동은 샤를마뉴 대제 시기에는 절정을 찍어 프랑크 왕국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 시기에는 롬바르드 전쟁에서 승리하여 교황을 지킴으로써 서로마 황제 관을 받기도 했다. 프랑크 왕국 통치기 독일 지역은 하나의 왕국의 통치를 받고 기독교라는 단일 종교를 믿었지만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도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는 로마의 은대지 제도 3세기 이후 고대 로마시대 당시 로마 황제가 로마 국경지대를 방비한 게르만족에게 내려준 토지이다. 이 제도는 ‘베네피키움’으로 불렸고 내려준 토지 이름은 ‘베네피키아’로 불렸다.
와 게르만족의 종사제도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제도이다. 두 제도 모두 게르만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도이다 보니 게르만족의 국가 프랑크 왕국에서 이 제도가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봉건제도에 따라 프랑크 왕국의 왕은 영주 혹은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지들을 하사하고 큰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주들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이는 독일 지역이 각 지역의 영주들 중심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크 왕국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843년 베르
II. 독일 민족주의 태동기-고대, 중세
고대 시기는 현대적인 개념의 독일 민족주의가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시기였다. 오늘날 독일인의 민족인 게르만 민족은 부족 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라인강 너머 부족들을 통틀어 게르만족이라고 불렀다. 이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라는 서적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르마니아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를 보면 라인강 동쪽과 도나우강 북쪽의 독일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로마 영향권 밖의 독일 지역이다. 게르만족을 다룬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이 범위에 있는 부족들을 다룬 사실로 보아 당시 로마인은 해당 지역에 있는 부족들을 게르만족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게르만족 스스로는 게르만 자체의 정체성보다는 부족적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4세기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수많은 게르만 왕국들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등이 대표적이다.
이 존재했다는 점 그리고 그 왕국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체의 같은 민족의식 기원전 그리스에는 아테네, 스파르타 등 수많은 정치집단이 있었지만 ‘헬레네스’라는 동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같은 민족의식은 올림픽이라는 각 폴리스 간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게르만족들 사이에는 올림픽 같은 동일 민족의식을 나타내는 일체의 의식이나 인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런 부족 중심적 게르만 정체성은 중세시대 게르만 민족이 왕국, 공국 등 수많은 정치집단으로 난립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다른 게르만계 국가 게르만족의 한 분파인 앵글로 색슨족과 노르만족이 세운 영국,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 앵글로 색슨족이 세운 네덜란드 등이 독일을 제외한 대표적인 게르만계 국가이다.
와 구별되는 독일만의 특성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서로마 제국 몰락 뒤 게르만족의 나라 프랑크 왕국이 독일 지역을 장악했다. 프랑크 왕국은 독일 아헨 지역을 수도로 서유럽 상당 부분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독일 일부 지역은 기독교 세계로 편입됐다. 일부 독일 지역의 기독교 개종 이후 피핀 왕 같은 프랑크 왕의 정복 활동에 맞추어 기독교는 독일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크 왕국의 정복 활동은 샤를마뉴 대제 시기에는 절정을 찍어 프랑크 왕국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 시기에는 롬바르드 전쟁에서 승리하여 교황을 지킴으로써 서로마 황제 관을 받기도 했다. 프랑크 왕국 통치기 독일 지역은 하나의 왕국의 통치를 받고 기독교라는 단일 종교를 믿었지만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도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봉건제도는 로마의 은대지 제도 3세기 이후 고대 로마시대 당시 로마 황제가 로마 국경지대를 방비한 게르만족에게 내려준 토지이다. 이 제도는 ‘베네피키움’으로 불렸고 내려준 토지 이름은 ‘베네피키아’로 불렸다.
와 게르만족의 종사제도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제도이다. 두 제도 모두 게르만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도이다 보니 게르만족의 국가 프랑크 왕국에서 이 제도가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봉건제도에 따라 프랑크 왕국의 왕은 영주 혹은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에게 영지들을 하사하고 큰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주들의 권력은 막강해졌다. 이는 독일 지역이 각 지역의 영주들 중심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크 왕국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843년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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