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
2. 본론 : 왜란과 호란이 한중일 상호인식의 흐름에 미친 영향
1) 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2) 왜란 후 호란 전까지
3) 호란 이후
3. 결론 : 격동의 동아시아사
4. 참고문헌
2. 본론 : 왜란과 호란이 한중일 상호인식의 흐름에 미친 영향
1) 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2) 왜란 후 호란 전까지
3) 호란 이후
3. 결론 : 격동의 동아시아사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인식도 나타났다. 즉, 오랑캐의 운세가 100년을 가지 못한다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청은 중원을 차지한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천명을 받았기 때문이고 천명을 받은 청을 섬기는 것 또한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또한, 명은 조선을 가혹하게 대했지만, 청이 오히려 조선에 관대했다며 태도를 비교하는 인식도 나타났다. 이에 조선 지식인들은 청의 학자들과 교류를 벌이고 서적들을 구매하며 수준 높은 학문을 봤고, 청을 중국 문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대명의리론은 힘을 잃어갔고, 병자호란 이후 복수, 타도의 대상이었던 청은 배우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18세기 이후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랑캐이자 원수인 일본에 대해 미래지향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의 기술, 제도의 강점에 주목하여 일본이 부국강병에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특히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의 높은 고학 수준을 근거로 일본이 더 침략해올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다.
3. 결론 : 격동의 동아시아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친 두 개의 난들은 19세기까지 조선 사람들의 대일인식을 고정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45년 해방 이후, 우리의 임진왜란 연구는 \'우리가 이긴 전쟁\'이자 \'끊이지 않은 저항\'을 강조하며 \'대첩\'들을 열거하고 이순신을 부각하고, 의병장들의 항전 활동을 주로 조명했다. 이 부분은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이긴 했으나, 승패 문제, 성웅사관에 몰입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시각은 다소 협소해지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앞서 원나라에서의 일본 정벌 실패, 일본에서 일으킨 두 개의 난과 이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일본이 오랑캐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함락되지 않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을 알아야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또한 당시 명나라를 형의 나라로서 섬기고 있던 조선이 중원에서의 패자가 영원하지 않다는 뼈아픈 교훈을 전쟁을 통해 알아야 했으며, 이를 위해 일본과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중·일 세 국가의 힘의 균형이 어긋나며 급격한 정세가 있을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격동의 동아시아사는 현재까지도 서로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이웃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웃 나라에 갖는 견제와 불편함의 기분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4. 참고문헌
- 제공된 자료 :
한명기, ’조선시대 한중일 관계와 상호인식의 추이‘, 명지대학교,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57권 57호 2020, pp.91-144
한명기, ’난동, 정벌, 원조를 넘어 : 임진왜란을 부르는 동아시아 공통의 용어를 위하여‘,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5권, 2008, pp. 495-505
한명기, ’이여송과 모문룡’,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권, 2010, pp.356-383
’선조‘, 인물한국사, 외교통상부, 2010,
또한, 18세기 이후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랑캐이자 원수인 일본에 대해 미래지향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의 기술, 제도의 강점에 주목하여 일본이 부국강병에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특히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의 높은 고학 수준을 근거로 일본이 더 침략해올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적극적으로 일본과 교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다.
3. 결론 : 격동의 동아시아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친 두 개의 난들은 19세기까지 조선 사람들의 대일인식을 고정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45년 해방 이후, 우리의 임진왜란 연구는 \'우리가 이긴 전쟁\'이자 \'끊이지 않은 저항\'을 강조하며 \'대첩\'들을 열거하고 이순신을 부각하고, 의병장들의 항전 활동을 주로 조명했다. 이 부분은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이긴 했으나, 승패 문제, 성웅사관에 몰입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시각은 다소 협소해지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앞서 원나라에서의 일본 정벌 실패, 일본에서 일으킨 두 개의 난과 이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기까지 일본이 오랑캐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함락되지 않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을 알아야만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또한 당시 명나라를 형의 나라로서 섬기고 있던 조선이 중원에서의 패자가 영원하지 않다는 뼈아픈 교훈을 전쟁을 통해 알아야 했으며, 이를 위해 일본과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등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중·일 세 국가의 힘의 균형이 어긋나며 급격한 정세가 있을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격동의 동아시아사는 현재까지도 서로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이웃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웃 나라에 갖는 견제와 불편함의 기분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4. 참고문헌
- 제공된 자료 :
한명기, ’조선시대 한중일 관계와 상호인식의 추이‘, 명지대학교,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57권 57호 2020, pp.91-144
한명기, ’난동, 정벌, 원조를 넘어 : 임진왜란을 부르는 동아시아 공통의 용어를 위하여‘,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5권, 2008, pp. 495-505
한명기, ’이여송과 모문룡’,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권, 2010, pp.356-383
’선조‘, 인물한국사, 외교통상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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