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2. 삼국통일의 과정
3. 당나라와의 전쟁
4. 의의 및 한계
2. 삼국통일의 과정
3. 당나라와의 전쟁
4. 의의 및 한계
본문내용
신라 삼국통일의 과정과 의의
1. 개요
2. 삼국통일의 과정
3. 당나라와의 전쟁
4. 의의 및 한계
1. 개요
ㆍ676년,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후, 당나라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한반도를 통합한 사건
ㆍ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와 왜(倭) 연합군을 격파한 뒤, 고구려와 돌궐 연합군을 격파하여 통일을 이룸
ㆍ가야의 멸망
- 532년, 가야 연맹의 중심국인 금관가야 정복
→ 경상남도 김해와 진해 지역 차지
- 562년, 대가야 정복 → 낙동강 일대 완전 장악
- 가야 연맹 왕족 및 귀족의 반발
→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들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
→ 가야인들의 반발 희석 및 사상적 통합
→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움
ㆍ7세기 초,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와 연달아 전쟁을 치름
- 백제와 신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음
ㆍ백제의 의자왕(義慈王) →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야성을 비
롯한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
ㆍ김춘추(金春秋) →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 고구려는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영토 반환 요구
-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협공
하기 위한 전략을 세움
→ 당 고종(재위 649~683)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 침공을 지시
2. 삼국통일의 과정
1) 백제의 멸망(660년)
ㆍ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시기
-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음
-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으며 충신인 성충(成忠)과 흥수(興水)는
처형됨
- 백성들은 거듭되는 전쟁과 가혹한 세금 수탈
에 의해 심한 생활고에 시달림
ㆍ황산벌 전투(660년)
- 백제 말기의 좌평이며 대신인 충상(忠常)과 계백 장군
→ 5천의 결사대로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으나 패배
→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
ㆍ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남
- 왕족 출신의 복신(福信), 승려 도침(道琛)
→ 주류성(周留城)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킴
- 흑치상지는 현재 충남 예산군에 속한 임존성(任存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당연합군에 대항함
- 복신, 도침, 흑치상지는 신라의 200여 성을 함락해
백제 옛 고토(古土)의 일부를 회복하기도 함
- 왜(倭)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과 웅진성 등을 공격함
- 나당연합군의 반격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
→ 주류성(周留城) 함락, 부흥운동 실패
→ 당나라는 백제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설치
2) 고구려의 멸망(668년)
ㆍ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공격
ㆍ연개소문 → 나당연합군을 끈질기게 막아냄
-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 쟁탈전
→ 고구려 국력의 급격한 쇠퇴
- 신라와 당나라가 위아래 양방에서 공격
- 고구려 멸망(668년, 보장왕 27년)
ㆍ검모잠(劍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
하여 약 4년 동안 부흥 운동 지속
- 부흥 운동 실패
-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설치
3. 당나라와의 전쟁
ㆍ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유
-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함
ㆍ당나라를 660년, 백제 영토에 5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66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더 나아가 668년,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한반도 지배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었다.
ㆍ674년,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에 대한 전면적 무력 침공에 나섬
ㆍ신라군은 671년 1월, 가림성의 당군 격파하였으며
671년 7월에는 평양 근교에서 아근행의 말갈군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에 있어 주도권을 쥐게 됨
ㆍ675년, 매소성에서 설인귀의 당나라 20만 대군 격파
- 매소성 전투(675년)
ㆍ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 섬멸
- 기벌포 전투(676년)
ㆍ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승리
- 신라의 삼국 통합 완성
- 대동강에서 원산만(元山灣)에 이르는 영토 확보
ㆍ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말갈 유민을 흑금서당
(黑衿誓幢)으로 편성
- 신라의 군제에 편입
- 민족적 융화를 이룸
4. 의의 및 한계
1) 의의
ㆍ최초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하나로 통합
ㆍ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반도에서 외세 축출 → 민족의 자주성을 보여줌
ㆍ한민족사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침
2) 한계
ㆍ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광활한 만주 일대 영토 상실
ㆍ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영토와 인구 통합 실패 → 불완전 통합
ㆍ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
-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926) 건국
-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 → 남북국 시대
→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보기 어려움
ㆍ외세(당나라)를 끌어들임
- 한민족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 존재
- 20세기 이후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음
1. 개요
2. 삼국통일의 과정
3. 당나라와의 전쟁
4. 의의 및 한계
1. 개요
ㆍ676년,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후, 당나라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한반도를 통합한 사건
ㆍ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와 왜(倭) 연합군을 격파한 뒤, 고구려와 돌궐 연합군을 격파하여 통일을 이룸
ㆍ가야의 멸망
- 532년, 가야 연맹의 중심국인 금관가야 정복
→ 경상남도 김해와 진해 지역 차지
- 562년, 대가야 정복 → 낙동강 일대 완전 장악
- 가야 연맹 왕족 및 귀족의 반발
→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들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
→ 가야인들의 반발 희석 및 사상적 통합
→ 구형왕의 손자인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움
ㆍ7세기 초,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와 연달아 전쟁을 치름
- 백제와 신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음
ㆍ백제의 의자왕(義慈王) →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야성을 비
롯한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
ㆍ김춘추(金春秋) →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 고구려는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영토 반환 요구
-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협공
하기 위한 전략을 세움
→ 당 고종(재위 649~683)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 침공을 지시
2. 삼국통일의 과정
1) 백제의 멸망(660년)
ㆍ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시기
-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음
- 조정에서는 간신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빴으며 충신인 성충(成忠)과 흥수(興水)는
처형됨
- 백성들은 거듭되는 전쟁과 가혹한 세금 수탈
에 의해 심한 생활고에 시달림
ㆍ황산벌 전투(660년)
- 백제 말기의 좌평이며 대신인 충상(忠常)과 계백 장군
→ 5천의 결사대로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였으나 패배
→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
ㆍ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남
- 왕족 출신의 복신(福信), 승려 도침(道琛)
→ 주류성(周留城)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킴
- 흑치상지는 현재 충남 예산군에 속한 임존성(任存城)에서
군사를 일으켜 나당연합군에 대항함
- 복신, 도침, 흑치상지는 신라의 200여 성을 함락해
백제 옛 고토(古土)의 일부를 회복하기도 함
- 왜(倭)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과 웅진성 등을 공격함
- 나당연합군의 반격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
→ 주류성(周留城) 함락, 부흥운동 실패
→ 당나라는 백제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설치
2) 고구려의 멸망(668년)
ㆍ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공격
ㆍ연개소문 → 나당연합군을 끈질기게 막아냄
-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 일가의 권력 쟁탈전
→ 고구려 국력의 급격한 쇠퇴
- 신라와 당나라가 위아래 양방에서 공격
- 고구려 멸망(668년, 보장왕 27년)
ㆍ검모잠(劍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
하여 약 4년 동안 부흥 운동 지속
- 부흥 운동 실패
-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설치
3. 당나라와의 전쟁
ㆍ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유
-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함
ㆍ당나라를 660년, 백제 영토에 5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66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하였다. 더 나아가 668년,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한반도 지배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었다.
ㆍ674년,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에 대한 전면적 무력 침공에 나섬
ㆍ신라군은 671년 1월, 가림성의 당군 격파하였으며
671년 7월에는 평양 근교에서 아근행의 말갈군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에 있어 주도권을 쥐게 됨
ㆍ675년, 매소성에서 설인귀의 당나라 20만 대군 격파
- 매소성 전투(675년)
ㆍ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 섬멸
- 기벌포 전투(676년)
ㆍ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 승리
- 신라의 삼국 통합 완성
- 대동강에서 원산만(元山灣)에 이르는 영토 확보
ㆍ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 말갈 유민을 흑금서당
(黑衿誓幢)으로 편성
- 신라의 군제에 편입
- 민족적 융화를 이룸
4. 의의 및 한계
1) 의의
ㆍ최초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하나로 통합
ㆍ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반도에서 외세 축출 → 민족의 자주성을 보여줌
ㆍ한민족사 전개 과정에 영향을 미침
2) 한계
ㆍ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광활한 만주 일대 영토 상실
ㆍ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영토와 인구 통합 실패 → 불완전 통합
ㆍ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
-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926) 건국
-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 → 남북국 시대
→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로 보기 어려움
ㆍ외세(당나라)를 끌어들임
- 한민족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 존재
- 20세기 이후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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