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과학의 시작
2. 그리스의 과학
3. 로마에서 중세로
4. 인도와 아랍의 과학
5. 중국의 전통과학
6. 중세의 서양과학기술
7. 과학혁명
8. 과학혁명의 흐름-17세기
9. 과학과 이성-18세기
10. 과학기술과 놀라운 신세계
11. 20세기의 과학기술 혁명
12. 결어
2. 그리스의 과학
3. 로마에서 중세로
4. 인도와 아랍의 과학
5. 중국의 전통과학
6. 중세의 서양과학기술
7. 과학혁명
8. 과학혁명의 흐름-17세기
9. 과학과 이성-18세기
10. 과학기술과 놀라운 신세계
11. 20세기의 과학기술 혁명
12. 결어
본문내용
학문의 목적을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는 것에 두고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단계를 따라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사회에 이용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유학은 유신론적인 동중서를 벗어나 天이라는 인격적 존재 대신에 태극이라는 법칙을 상정했다. 중국에서도 실용을 위한 수학이 발달하여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원주율이 이미 발견되어 있었다. 또한 천문과 역법 또한 발전되어 있었다. 우주의 모양은 개천설과 혼천설. 개천설은 땅과 하늘이 평평한 상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고, 혼천설은 우주가 계란 처럼 생 겨서 그 껍질이 하늘이고 노른자가 땅이라는 이론이다.
로 나누어서 생각되어졌는데, 이러한 천문 지식은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되어졌다. 동물, 식물, 광물에 대한 연구를 중국에서는 본초라고 불러왔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명한 의사로 히포크라테스와 비슷한 때를 살았던 편작이 있으며, 후한 시대의 화타라는 명의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은 內徑으로 소문과 영추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자는 병리학이고 후자는 침구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설에 의해서 인간을 5장 6부로 나누어 본 것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6. 중세의 서양 과학 기술
로마의 멸망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스콜라철학의 태도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게르만 튜튼족의 침임으로 버터와 멍에, 가죽을 다루는 기술등이 유입되면서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을 이용하면서 편자와 박차, 안장을 개발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12세기의 르네쌍스라고 불리우는 아라비아 중심의 서양 문화가 점차로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는 현상이 이렁나게 된다. 아랍 과학이 대규모로 번역되면서 학문의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델라드와 크레모나의 자레드(Gerard of Cremona) 등이 유클리드의「기하원본」이라든지 톨레미의「알마게스트」,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갈렌, 이븐 시나 등의 저서를 소개하여 커다란 발전의 기초를 쌓게 된다. 13세기를 맞이하여 유럽의 각국에서는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비엔나, 하에델베르크와 같은 대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학문의 세속화가 이루어져서 과학 연구의 전문화와 연구의 자유, 비판의 자유등이 보장되게 된다. 중세 전기가 플라톤의 세기였다면 후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밑에서 학문이 진행되어진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와 그의 제자인 로버 베이컨(Roger Bacon)에 의해서 가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그 가설에서 도출된 결론은 다시 경험을 통해서 재검증받아야 한다는 가설 연역법(hypopthetic-ded-uctive method)이 제창되어진다. 특히 베이컨은 권위와 관습을 버리고 자연에 대한 지식은 “실험”을 통하여 얻을 것을 주장하면서, 자동차, 비행기, 잠수함 등의 기계들을 예견하였다. 중세 후기로 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퀴나스는 우주는 물질로 충만되어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캄(William of Ockha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촉 이론에 반대하면서 임피터스(impetus)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면도날의 원칙(razer principle)로 불리우는 원칙에 의해 자연은 복잡한 것 보다는 보다 간단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뷰리딩과 알버트 삭스니에게 계승되었고, 니콜 오렘(Nicole Orisme)은 세 가지 운동을 그라프로 그려 설명하였다. 계량학파로도 불리우는 머튼 대학의 학자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대한 배격이 이루어졌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발전으로 매우 제한된 것들이었다.
7. 과학 혁명
과학 혁명은 어떤 면에서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썼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이용 가능한 것으로보고 이에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며, 자연 법칙을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러한 움직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탈코스, 니콜 오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사상들의 계보를 따라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동설은 당시에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코 브라헤(Tycho Brahe)의 많은 관측 기록을 통해 케플러가 그리스 자연관의 “원형의 전설”을 무너뜨리고 타원 괘도와 면적 속도의 법칙을 발견한데 이어서 갈리레이(Galileo Galilei)에 이르러 지동설이 주장됨으로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갈릴레이가「두 가지 세계상에 관한 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지동설을 지지하여 종교 재판을 받은 일화는 매우 잘 알려진 일화이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우주의 구조에서 운동의 문제를 중심으로 삼는 역학 발달의 선구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던가 타탈리아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에게서 발견된 투사체의 문제와 힘의 편행사변형에 대한 발견들은 갈릴레이에 이르러 역학 발전의 기틀을 이루게 된다. 갈릴레이는 운동의 상대성과 관성. 관성이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물체는 정지해 있거나 등속도 직선운동을 한다는 것
, 낙하법칙 등을 발견하였다. 이는 자연 현상을 수학화하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했다는 점에 있어서 점차 과학화되어가는 세계상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고전 역학은 뉴튼(Isaac Newton)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뉴턴에 와서는 하늘의 운동과 땅의 운동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보통 「프린키피아」로 알려진 그의 저서를 통해서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등이 제시되면서 과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8. 과학 혁명의 흐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석기하학과 미분학을 포함하는 수학, 그리고 빛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는 광학이 발전하게 된다. 갈릴레이는 “자연이란 책은 수학이란 글로 쓰여 있다”라고했으며, 케플러도 신이 우주를 기하학적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인해 17세기에는 새로운 수학적 발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라르 데사르그에 의해 르네쌍
로 나누어서 생각되어졌는데, 이러한 천문 지식은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되어졌다. 동물, 식물, 광물에 대한 연구를 중국에서는 본초라고 불러왔다. 춘추 전국 시대의 유명한 의사로 히포크라테스와 비슷한 때를 살았던 편작이 있으며, 후한 시대의 화타라는 명의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오래된 의학 서적은 內徑으로 소문과 영추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자는 병리학이고 후자는 침구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설에 의해서 인간을 5장 6부로 나누어 본 것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6. 중세의 서양 과학 기술
로마의 멸망 이후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스콜라철학의 태도는 자연 과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게르만 튜튼족의 침임으로 버터와 멍에, 가죽을 다루는 기술등이 유입되면서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을 이용하면서 편자와 박차, 안장을 개발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12세기의 르네쌍스라고 불리우는 아라비아 중심의 서양 문화가 점차로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는 현상이 이렁나게 된다. 아랍 과학이 대규모로 번역되면서 학문의 발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델라드와 크레모나의 자레드(Gerard of Cremona) 등이 유클리드의「기하원본」이라든지 톨레미의「알마게스트」,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갈렌, 이븐 시나 등의 저서를 소개하여 커다란 발전의 기초를 쌓게 된다. 13세기를 맞이하여 유럽의 각국에서는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비엔나, 하에델베르크와 같은 대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학문의 세속화가 이루어져서 과학 연구의 전문화와 연구의 자유, 비판의 자유등이 보장되게 된다. 중세 전기가 플라톤의 세기였다면 후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밑에서 학문이 진행되어진다.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와 그의 제자인 로버 베이컨(Roger Bacon)에 의해서 가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그 가설에서 도출된 결론은 다시 경험을 통해서 재검증받아야 한다는 가설 연역법(hypopthetic-ded-uctive method)이 제창되어진다. 특히 베이컨은 권위와 관습을 버리고 자연에 대한 지식은 “실험”을 통하여 얻을 것을 주장하면서, 자동차, 비행기, 잠수함 등의 기계들을 예견하였다. 중세 후기로 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퀴나스는 우주는 물질로 충만되어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캄(William of Ockha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촉 이론에 반대하면서 임피터스(impetus)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면도날의 원칙(razer principle)로 불리우는 원칙에 의해 자연은 복잡한 것 보다는 보다 간단하게 되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뷰리딩과 알버트 삭스니에게 계승되었고, 니콜 오렘(Nicole Orisme)은 세 가지 운동을 그라프로 그려 설명하였다. 계량학파로도 불리우는 머튼 대학의 학자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대한 배격이 이루어졌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발전으로 매우 제한된 것들이었다.
7. 과학 혁명
과학 혁명은 어떤 면에서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썼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이용 가능한 것으로보고 이에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며, 자연 법칙을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러한 움직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탈코스, 니콜 오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사상들의 계보를 따라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동설은 당시에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코 브라헤(Tycho Brahe)의 많은 관측 기록을 통해 케플러가 그리스 자연관의 “원형의 전설”을 무너뜨리고 타원 괘도와 면적 속도의 법칙을 발견한데 이어서 갈리레이(Galileo Galilei)에 이르러 지동설이 주장됨으로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갈릴레이가「두 가지 세계상에 관한 대화」라는 책을 통해서 지동설을 지지하여 종교 재판을 받은 일화는 매우 잘 알려진 일화이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서 우주의 구조에서 운동의 문제를 중심으로 삼는 역학 발달의 선구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던가 타탈리아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에게서 발견된 투사체의 문제와 힘의 편행사변형에 대한 발견들은 갈릴레이에 이르러 역학 발전의 기틀을 이루게 된다. 갈릴레이는 운동의 상대성과 관성. 관성이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물체는 정지해 있거나 등속도 직선운동을 한다는 것
, 낙하법칙 등을 발견하였다. 이는 자연 현상을 수학화하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했다는 점에 있어서 점차 과학화되어가는 세계상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고전 역학은 뉴튼(Isaac Newton)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뉴턴에 와서는 하늘의 운동과 땅의 운동이 다르지 않다라는 것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보통 「프린키피아」로 알려진 그의 저서를 통해서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등이 제시되면서 과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8. 과학 혁명의 흐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석기하학과 미분학을 포함하는 수학, 그리고 빛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는 광학이 발전하게 된다. 갈릴레이는 “자연이란 책은 수학이란 글로 쓰여 있다”라고했으며, 케플러도 신이 우주를 기하학적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인해 17세기에는 새로운 수학적 발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라르 데사르그에 의해 르네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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