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I. 서론 - 불교미술과 미술사 연구의 역사
II. 본론
1. 불교미술의 특징
2. 한국의 불교 미술
3. 한국의 효 사상을 드러내는 불교 미술
4. 대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불교 미술
III. 결론 - 결과 요약
IV. 참고문헌
I. 서론 - 불교미술과 미술사 연구의 역사
II. 본론
1. 불교미술의 특징
2. 한국의 불교 미술
3. 한국의 효 사상을 드러내는 불교 미술
4. 대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불교 미술
III. 결론 - 결과 요약
IV. 참고문헌
본문내용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효 개념은 불교에서도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불교미술에서 많이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명동 법화사에는 대표적인 불교미술 작품 중 하나인 효모상이 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다니며 손을 잡은 아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작품은 아들의 효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효 개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경주 불국사에 있는 모자화상이 있다. 이 작품은 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어머니 앞에서 꽃을 들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아들의 효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2014년 최선아는 “효(孝) 실천으로서의 불교미술 - 석굴암, 불국사 창건 목적과 관련하여 -”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서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불교미술을 “효 실천”이라는 키워드로 조명함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미술의 형태인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 목적을 재고하였다 최선아, “효(孝) 실천으로서의 불교미술 - 석굴암, 불국사 창건 목적과 관련하여 -”, 2014, 신라문화
. 해당 연구에서 최선아는 약 4세기 경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유입되었고 한국의 효 개념이 불교가 한반도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 제작된 소형 금동 불상들을 보면 추복의 의미를 지니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다. 이를 불사라고 하는데 <계미명(癸未銘) 금동불상>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다는 명문이 적혀있고 <영강명(永康銘) 금동광배>,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불상>의 광배 부분에도 역시 비슷한 명문이 적혀있다. 또한 불사는 효뿐만이 아니라 호국에 대해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중고기(中古期) 및 중대(中代) 초기 신라 왕경에 창건된 사찰 중에서는 국찰로서의 성격을 띤 곳이 많았다. 예컨대 법흥왕의 발원으로 개창되며 진흥왕 재임 5년에 완공된 흥륜사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사액을 통해 왕실과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이후 이곳에서는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대법회가 열린 바 있다.
이러한 불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효 개념이 이에 적용되기 시작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립에 반영되어 추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존재하는 토함산을 살펴보자. 신라 시대는 부모의 사망 이후에는 화장을 진행했다. 화장 후 유해는 보편적으로 산골을 통해 처리했다. 이는 평민뿐만 아니라 왕족에 대해서도 통용되었다고 보인다. 허나 경주의 경우 확인된 수많은 골호는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특정한 장소에 안장하는 화장묘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토함산 일대는 이러한, 중요한 매장의 장소이자 추복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화장과 관련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산골의 장소로 대부분 “동해”가 명시되어 있었고 <문무왕릉비>에 따르면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해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경진(鯨津, 즉 동해)에 뼛가루를 날렸다”고 되어 있으며, 효성왕 또한 “유언에 따라…뼈를 동해에 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도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을 해 유골은 동해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지성 역시 부모의 유해를 “동해변에 뿌렸음”을 명문을 통해 밝힌바 있고 왕족이나 평민에게 관계 없이 이들은 모두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화장을 장법으로 택하였다. 이처럼 동해변과 가까운 토함산 인근 지역은 화장묘, 즉 불교적 장지(葬地)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불교미술은 우리나라의 효 문화와 연관되며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를 잘 보여주는 바가 있다. 우리의 문화가 외래의 종교였던 불교미술에 적용되는 것은 결국 한반도에도 이 영향을 미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문화를 재건하기 마련이며 문화는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나라에서 불교문화는 효를 의미하는 데에 이용되었고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미술을 통해 효 개념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많이 존재하며, 이는 우리나라 문화와 불교문화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온 결과물 중 하나이다.
4. 대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불교 미술
불교미술과 우리나라의 대북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북관계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명동 법화사에는 대표적인 불교미술 작품 중 하나인 효모상이 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작품으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다니며 손을 잡은 아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작품은 아들의 효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효 개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경주 불국사에 있는 모자화상이 있다. 이 작품은 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어머니 앞에서 꽃을 들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아들의 효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2014년 최선아는 “효(孝) 실천으로서의 불교미술 - 석굴암, 불국사 창건 목적과 관련하여 -”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서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불교미술을 “효 실천”이라는 키워드로 조명함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미술의 형태인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 목적을 재고하였다 최선아, “효(孝) 실천으로서의 불교미술 - 석굴암, 불국사 창건 목적과 관련하여 -”, 2014, 신라문화
. 해당 연구에서 최선아는 약 4세기 경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불교가 유입되었고 한국의 효 개념이 불교가 한반도에서 토착화되는 과정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고구려 혹은 백제에서 제작된 소형 금동 불상들을 보면 추복의 의미를 지니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다. 이를 불사라고 하는데 <계미명(癸未銘) 금동불상>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다는 명문이 적혀있고 <영강명(永康銘) 금동광배>,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불상>의 광배 부분에도 역시 비슷한 명문이 적혀있다. 또한 불사는 효뿐만이 아니라 호국에 대해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중고기(中古期) 및 중대(中代) 초기 신라 왕경에 창건된 사찰 중에서는 국찰로서의 성격을 띤 곳이 많았다. 예컨대 법흥왕의 발원으로 개창되며 진흥왕 재임 5년에 완공된 흥륜사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사액을 통해 왕실과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이후 이곳에서는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대법회가 열린 바 있다.
이러한 불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효 개념이 이에 적용되기 시작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립에 반영되어 추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존재하는 토함산을 살펴보자. 신라 시대는 부모의 사망 이후에는 화장을 진행했다. 화장 후 유해는 보편적으로 산골을 통해 처리했다. 이는 평민뿐만 아니라 왕족에 대해서도 통용되었다고 보인다. 허나 경주의 경우 확인된 수많은 골호는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특정한 장소에 안장하는 화장묘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토함산 일대는 이러한, 중요한 매장의 장소이자 추복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화장과 관련한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산골의 장소로 대부분 “동해”가 명시되어 있었고 <문무왕릉비>에 따르면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해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경진(鯨津, 즉 동해)에 뼛가루를 날렸다”고 되어 있으며, 효성왕 또한 “유언에 따라…뼈를 동해에 뿌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덕왕도 “불교의 법식대로 화장을 해 유골은 동해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지성 역시 부모의 유해를 “동해변에 뿌렸음”을 명문을 통해 밝힌바 있고 왕족이나 평민에게 관계 없이 이들은 모두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화장을 장법으로 택하였다. 이처럼 동해변과 가까운 토함산 인근 지역은 화장묘, 즉 불교적 장지(葬地)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불교미술은 우리나라의 효 문화와 연관되며 석굴암과 불국사는 그를 잘 보여주는 바가 있다. 우리의 문화가 외래의 종교였던 불교미술에 적용되는 것은 결국 한반도에도 이 영향을 미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문화를 재건하기 마련이며 문화는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나라에서 불교문화는 효를 의미하는 데에 이용되었고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미술을 통해 효 개념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많이 존재하며, 이는 우리나라 문화와 불교문화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해 온 결과물 중 하나이다.
4. 대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불교 미술
불교미술과 우리나라의 대북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북관계에서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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