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답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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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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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2
동구릉(東九陵)

본문내용

갖기도 한다. 일반적인 행궁은 궁궐이 갖는 삼조(三朝)와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원리를 적용한 형태로서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진입부, 치조(治朝)에 해당하는 정전(正殿)부분, 연조(燕朝)에 해당하는 침전(寢殿) 부분의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남한산성 행궁의 기본적인 구조는 상궐(上闕), 하궐(下闕), 그리고 한남루(漢南樓)라는 외삼문의 누문을 갖춘 구조로서 이들을 둘러싸고 연결된 행각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상부로부터 내전(內殿)과 외전(外殿), 그리고 문지를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완만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3단의 층단식(層段式)으로 둠으로써 안으로 들어갈수록 단을 높이는 방식이며, 좌향을 동남향을 취함으로써 기본적으로는 궁실건축의 형태를 따르고자 하였다. 여기에 숙종때 左殿과 右室을 조성하면서 행궁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도성 배치원리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즉 행궁을 도성의 정궁으로 보고 종묘봉안처(宗廟奉安處)인 좌전(左殿)을 행궁의 왼쪽에, 사직봉안처(社稷奉安處)인 우실(右室)은 행궁의 오른쪽에 두었던 것이다.이외에 광주부 읍치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공해(公 )로서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이 있고, 기타 재덕당(在德堂)ㆍ유차산루(有此山樓) 이위정(以威亭) 이명정(以明亭) 완대정(緩帶亭) 우희정(又喜亭) 옥천정(玉泉亭) 등이 있다.이러한 건축물들은 행궁이 조성된 인조대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는데, 후대로 갈수록 행궁 본래의 기능보다는 광주부 치소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이 강화된다. 이러한 특징은 순조대의 공해 건물로서 좌승당과 일장각이 조성되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1-3-11. 남한산성 관련 설화
1) 청량당(淸凉堂) : 이회의 억울함을 달래라 청량당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5-1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단묘(壇廟)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안의 청량산 꼭대기에 위치한 서장대(수어장대)의 서편 담 밖에 있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성책임자였던 이회(李晦)가 모함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뒤에 그를 처형한 이서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인조2년(1624) 남한산성 수축 당시 서북성은 8도 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한 벽암대사 김각성이 맡았고, 동남성은 총책임자인 이서의 부장 이회가 맡아서 쌓았다. 그러나 서북성은 기일내에 축성이 완료되었으나 이회가 맡은 구역은 성이 완성되지 못하였고 “이회는 축성경비를 주색잡기에 탕진하였다”는 등의 모함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회는 군령에 의하여 서장대에서 즉결처분으로 참수되었다. 이때 이회의 처 송씨는 남편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으로 축성금을 구하러 갔다가 쌀을 싣고 한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2) 숭렬전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통곡하다가 한강 물에 투신자살하였다고 한다.이회를 처형한 후 그가 쌓은 성벽을 조사해 보니 성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었으며, 다만 산세가 워낙 험하므로 성벽 기초공사 등으로 기일이 지연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당우(堂宇)를 세우고 그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전설에는 형장에 선 이회가 말하기를 “내가 죽는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내가 무죄인줄 알라”하였다. 과연 그가 처형되는 순간 유언대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바위에 앉아 이회의 죽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 또는 응암이라 하는데 높이 3.7, 폭 5.8m 크기로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겨진 글과 함께 수어장대 모퉁이에 서 있다.이 매바위에 대하여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것은 이회의 목을 베었을 때 목에서 매가 나왔다는 이야기와 매가 앉았던 발자국이 일제통치시대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바위에는 여러 홈이 파여져 있는데, 일본인들이 패망 후 물러가면서 매 발자국을 파간 흔적이라는 것이다.청량당에는 이회의 영정과 더불어 부인 송씨와 후실 유씨, 그리고 남한산성 수축당시 8도 도총섭으로서 서북성을 쌓았던 벽암대사 각성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현재의 영정은 6.25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는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나누어 축조하였고, 또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승군을 이끌고 용전분투하였으며,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성하의 맹세’를 맺은 것을 보고 표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청량당에 그 영정을 봉안한 것이다.청량당이라는 명칭은 청량이라는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청계당과 매당 또는 응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계당이라 부르는 것은 벽암대사 김각성 스님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매당 또는 응당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수어장대에 있는 매바위 전설로 인하여 청량당에 모신 이회의 혼령을 매당왕신 혹은 응당왕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현재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문을 달고 좌우측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이 사당은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조선조 인조 때의 장군인 이서(李曙)의 신주를 배향(配享)하고 있다. 이곳에 숭열전을 세워 온조왕을 모시고, 이후에 이서가 배향된 데는 각각 특별한 현몽 일화가 전해진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와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에 나타나 왕의 위험을 구해준 온조왕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의견을 드렸다. “온조왕이 여기 도읍을 정하여 역년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그 신령이 있을 것입니다. 고인은 군대를 동원해 주둔하면 그곳 지신에 제를 지낸다 하였습니다. 이제 대가가 여기 머무신 뒤로 성황의 제사는 이미 행하였으니 온조왕에게 제사지내는 예도 아울러 행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여 그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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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2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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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24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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