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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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천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직지사(直指寺)
Ⅱ. 갈항사지
Ⅲ. 세종대왕 왕자태실
Ⅳ. 동방사터 칠층석탑
Ⅴ. 수도암

본문내용

진다.
- 대양문(大陽門) : 대양문은 부처님의 큰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문이다.
<금강문>
<천왕문>
- 금강문과 천왕문
직지사의 중요 문화재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
직지사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 직지사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606)
직지사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607) ·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670)
한천사출토 금동자물쇠외 일괄(보물 1141) · 직지사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1186)
예념미타도량참법<권제6∼10>(보물 1241) · 백지금니금강보문발원합부(보물 1303)
묘법연화경(보물 1306) · 직지사대웅전(보물 1576)
직지사석조나한좌상(경북유형문화재 296)
<직지사 만세루>
2-2. 대웅전 영역
- 만세루(萬歲樓)
누각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 형식의 집을 말한다. 누는 궁궐 원림 속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사대부들이 야외에서 풍류와 휴식을 즐기는 장소로 일반화되었다. 풍광이 좋은 산야에 있던 누각이 사찰의 구성요소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다.
보통은 일주문과 중심 법당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다락식인 경우는 누각 밑을 통과하여 법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사찰 누각은 만세(萬歲)· 보제(普濟)· 안양(安養)· 침계(枕溪)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규모가 큰 만세루· 보제루 등은 집회의 장소로 많이 사용되고, 규모가 작은 침계루· 안양루 등은 휴식이나 풍류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만세루(萬歲樓)는 현재의 복락이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하는 누각이다. 여기에서는 과거나 미래는 별 의미가 없다. 과거· 현재· 미래, 즉 삼세를 통섭하는 인연법으로 설명하는 불교와는 의미가 다소 다르다.
- 대웅전과 삼층석탑
- 삼층석탑 : 보물 606호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 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3기가 쓰러져 있던 것을 2기는 대웅전 앞에 1기는 비로전 앞에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 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 대웅전(보물 1576호)
신라시대 대웅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고려 이후 조선 초기,적어도 정종대까지는 2층 5간의 특수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사적기에 대웅대 광명전이라 하였는데 명칭부터 특이하여 혹시 당시에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사승 인수, 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현 건물은 이로부터 150여 년 후인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1973.4.10~1975.6.20)하였다. 다시 녹원 화상에 의하여 재차 연목 및 기와가 번와(1979.10.25~1980.1.14)되었고, 1980년 8월에는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215호였는데,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후불탱화 : 보물 670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는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 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 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함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 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에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대웅전 앞 석등>
<대웅전 앞 정료대>
<대웅전 앞 소맷돌>
<대웅전 앞 배례석>
2-3. 비로전 영역
- 비로전
<비로전 안의 천불>
<석가모니탄생상>
고려 태조 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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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4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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