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풍 창녕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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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풍 창녕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도동서원(道東書院)·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

1.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김굉필의 약력· 김굉필의 도학· 김굉필의 시문
2.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 연혁· 도동서원의 배치· 전체성과 통일성· 위계와 서열·
이중적인 청빈의 미학과 성리학 상징의 세계· 예를 위한 장치
3. 제일강산정(第一江山亭) : 이로정(二老亭)

Ⅱ. 비슬산 유가사
1. 『삼국유사』피은편 포산이성조의 기록
2. 유가사의 연혁과 유가종
유가사의 연혁 · 고려시대의 불교계와 유가종
3. 유가사의 건축적 의미
4. 유가사의 전각· 불탑· 불상
5. 사찰에 반영된 민중의 신앙 형태

Ⅲ. 창녕지역 유물·유적

1. 창녕개관
2. 교동· 송현동 고분군
3. 신라 진흥왕 척경비(拓境碑)
4. 탑금당 치성문기비(塔金堂 治成文記碑)
5. 술정리 동 · 서 삼층석탑
6. 퇴촌리 삼층석탑

본문내용

릿돌을 얹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비석에는 불사 조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인양사(仁陽寺)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 있는 여러 사찰의 범종 · 탑 · 불상 · 금당 · 요사 등의 조성연대와 소요된 양식에 관하여 낱낱이 기재하였다. 앞면과 양 측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우아한 기법으로 승려상이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특이하게 비의 이름, 즉 비액이나 제명도 없이 앞면에는 10줄에 걸쳐 줄마다 28자씩, 오른쪽 옆면에는 26자씩 2줄, 왼쪽 옆면에는 25자 1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첫 줄에 \"원화오년 경인 유월 삼일 ○표아찬 김○○원문기지신해인양사종성 신유년육사 ○○식이백육석...(元和五年 庚寅 六月 三日 ○表阿飡 金○○願文記之辛亥仁陽寺鍾成 辛酉年六寺 ○○食二白六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데, 원화 5년은 이 비석을 세운 해를 말하며 신라 헌덕왕 2년(810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혜공왕 7년(771년)부터 헌덕왕 2년(810)까지 약 40년간 어느 스님이 인양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이룩한 많은 불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비석의 가장 특이한 점은 뒷면에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 인물상을 일부에선 지장보살이라고도 하나, 전체적인 모습을 볼 때 많은 불사에 공덕을 쌓은 스님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이처럼 비석 돌의 한 면에 인물상, 그것도 불보살상이 아닌 승려상을 조각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 승려상은 머리 생김새가 무척 반듯하여 도가 높은 수행자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심한 조각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귓바퀴까지 표현한 걸 보면 대강한 조각은 아닌 듯한데,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 조각은 그리 우수한 편이 못 된다.폭이 좁은 비면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몸은 굴곡이 없고 옹색하다. 곧게 늘어뜨린 오른손은 너무 길어 조화를 잃었다. 늘어진 커튼처럼 일정하게 주름이 잡힌 옷자락도 힘이 없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승려상은 \"8세기의 이상주의가 사라지고 9세기의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조각\"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5. 술정리 동 · 서 삼층석탑
5-1. 술정리 동삼층석탑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 긴장감 넘치는 직선의 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단순함과 절제미 그리고 적정한 비례와 균형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기단부의 안정감, 탑신부의 알맞은 체감에 따른 상승감, 그리고 상호 모순적인 이 두 요소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모두 비례와 균형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이중기단은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은 듯 편안하고 넉넉하여 탑신부를 받친 모습이 아주 안정되어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훤출하게 솟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그 위로 포개진 2층과 3층 몸돌은 쾌적한 크기로 체감되어 있다. 각 층의 지붕돌 또한 두께는 적절하고 처마 깊이가 알맞아 대단히 세련되고 우아하다. 뿐만 아니라 지붕돌들 역시 몸돌에 상응하는 체감을 보이면서 탑신부의 상승감을 유도하고 있다.
이 탑은 1965년 해체, 보수 시 3층 몸돌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잔형사리용기(靑銅盞形舍利容器), 담황색 유리제사리병(안에 난백색 사리 7립), 오색구슬 9개, 유리제 원형소품 1개 등이 발견되었다.
5-2. 술정리 서삼층석탑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동삼층석탑과 나란히 서있지 않다. 그 당시 있었던 절 이름을 모르니 발견된 장소의 지명에 따라 명명하는 성의 없는 이름 짓기 방식 때문에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 이름 때문에 술정리 동서삼층석탑은 당연스럽게 사사건건 견주어지고, 그 결과 기어이 ‘동삼층석탑만 못하다.’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술정리 서삼층석탑이 형편없는 졸작이 아니다. 다만 원체 우수한 동삼층석탑 가까이에 있게 된 서삼층석탑의 불행이라고 할까.
서삼층석탑은 전체 높이가 4.5m로, 전체 탑의 높이가 5.75m인 동삼층석탑보다는 작지만 역시 전형적인 이중기단에 탑신부가 올려 진 삼층석탑이다. 동삼층석탑에는 없는 안상 조각이 각 면에 큼직하게 둘씩 조각되어 있으며, 상층기단 덮개돌이 주저앉고, 2층과 3층 몸돌을 후대에 보수한 점, 그리고 상층기단의 안상을 훼손하고 후대에 문비를 조각하려고 한 탓에 흉물스러운 점을 감안한다면 역시 균형 잡힌 탑이다. 서삼층석탑의 덮개돌에는 바위구멍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 출산을 빌던 알터이다.
6. 퇴촌리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 10호인 퇴천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기의 것으로 높이는 3.72m이다. 이 석탑은 원래 창녕읍 퇴천리 398번지 민가 내에 무너져 있었으나 1969년에 해체, 보완, 수리하여 만옥정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탑이 무너져 있던 동리일대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어 비교적 큰 사찰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 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전형 석탑 양식인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웠다. 하층기단에는 각 면에 2개의 우주와 탱주를 두고 4개의 판석을 조립하여 하대갑석(下臺甲石)을 형성하였다. 하대갑석 윗면 중앙에는 몰딩과 각형(角形)의 2단 받침을 두고 상층 기단의 면석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두 개의 우주를 두고 있으나 탱주는 하나로 축소되었다. 상층기단의 갑석에는 부분적으로 파손이 심하나 역시 윗면 중앙에는 각형의 탑신괴임을 두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았다. 각층의 탑신에는 네 귀퉁이에 우주만을 조각했으며 탑신의 높이는 무리 없는 체감현상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처마의 아랫선이 수평이고 윗선은 양쪽 전각(轉角) 부분에서 살짝 곡선을 그렸으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낙수면의 경사 역시 그다지 심하지 않다. 옥개받침은 각각 4단으로 조성하여 전성기의 신라석탑에 비해 축소되고 있으며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이 석탑은 탑의 형식이나 제작수법, 그리고 각 부분간의 비례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부분적으로 파손이 되긴 했으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우수한 탑으로 신라 석탑의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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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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