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아래 문제에 대하여 교재를 참조하여 각각 서술해주세요. (서술한 문제당 6점, 총 30점)
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비교·설명해주세요.
①구석기시대의 생활상
②신석기시대의 생활상
⑵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을 설명해주세요.
①삼국사회의 신분제
②삼국사회의 농민생활
⑶ 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를 설명해주세요.
①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
②신라 하대의 사상계의 변화
⑷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를 설명해주세요.
①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
②고려의 ‘외왕내제’
⑸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2. 참고문헌
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비교·설명해주세요.
①구석기시대의 생활상
②신석기시대의 생활상
⑵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을 설명해주세요.
①삼국사회의 신분제
②삼국사회의 농민생활
⑶ 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를 설명해주세요.
①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
②신라 하대의 사상계의 변화
⑷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를 설명해주세요.
①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
②고려의 ‘외왕내제’
⑸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2. 참고문헌
본문내용
계속해서 송과 왕래하였고, 이는 또 다시 거란의 고려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1019년 귀주(평북 구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고 곧이어 거란과 책봉-조공관계를 회복하였다. 이후 동아시아에는 고려-거란-송 간에 세력 균형이 맞춰 지면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약 100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송과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12세기 들어 만주 쑹화강 유역에서 여진 완안부가 흥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동하였다. 여진은 발해의 구성원이던 말갈의 후예로,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와는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완안부가 부족을 통일한 후 고려를 침략해오자 고려는 1107년 별무반을 조직하고 여진을 공격하여 두만강 너머까지 9개의 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9성은 방어의 어려움으로 결국 2년 만에 돌려주었다. 여진은 1115년 금을 건국한 뒤 거란(1125)과 송(1126)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1117년에 고려에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금과의 국력 차이를 인정하고 금에 사대하기로 결정하면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다. 이후 중국 양쯔강 남쪽에서는 남송이 건국됨으로써 고려-금-남송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96-97쪽.
②고려의 ‘외왕내제’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의 5대 및 송, 거란, 금과 차례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중국 왕조의 책봉은 국왕의 즉위가 이루어진 뒤에 추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이고, 중국 왕조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고려는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국가 및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비록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고려는 황제국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국왕을 황제 또는 천자라고 했으며, 국왕을 부를 때는 폐하(陛下)라고 하였다. 또한 왕실의 용어와 격식도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었다. 중앙의 3성 6부, 국왕의 원구(圓丘)에서 제천 의례 등도 황제국의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국가적 자존감을 지켰으며, 황제국 의식을 바탕으로 주변의 발해 및 여진 세력을 규합하여 거란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조공하는 번국(蕃國)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여진족과 탐라의 추장들이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향직(鄕職)이나 무산계(武 散階)를 수여하였다. 특히 여진은 조공국을 가리키는 명칭인 동번(東蕃)서번(西蕃) 등으로 불렀다. 이로써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를 구성했으며, 그 안에서 고려 국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 ’라고 하였다.
다만, 이것이 고려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책봉을 받고 고려국왕을 칭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황제를 칭했다. 이러한 체제를 ‘외왕내제(外王內帝) ’라고 하며, 중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이 아닌 다원적(多元的) 천하관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12세기에는 고려뿐 아니라 베트남, 대하(大夏) 등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책봉을 받는 동시에 황제를 칭했는데, 이는 당시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관련이 있다. 12세기 들어 여진이 흥기하면서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전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대하며 번국으로 불렸던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거꾸로 고려에 사대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힘의 균형이 무너진 현실을 인정하고 금과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다원적 천하관에 입각한 외왕내제의 상태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 원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으면서 황제국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98쪽.
⑸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고려 후기에는 무신란으로 파괴된 고려 전기의 보수적인 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무신집권기에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역사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동명왕에 의한 고구려 건국을 한문 서사시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구려의 전통을 부각시키면서,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나타난 신이한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신이사관을 계승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규보가 전통을 평가하는 기준은 유교적 가치관이었으므로 유교적 합리주의사관을 뛰어넘어 전통문화를 재인식하려 한 것으로 평가된다.
몽골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전쟁 이후 고려가 국가를 유지한 데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를 포함하여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았던 설화와 전설, 그리고 불교 관련 내용이 많이 수록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삼음으로써 중국사와 대등한 역사체계를 구성하였다. 일연과 비슷한 시기에 이승휴는 1287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사시로 기록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었다. 여기서도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으로 설정하고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 이는 몽골과 전쟁이 끝난 뒤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수용되자 역사 서술도 영향을 받았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1312)를 시작으로 주자가 창안한 강목체(綱目體) 사서가 편찬되었다. 강목체는 사실의 기록보다 평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후 신진사대부에 의해 성리학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사서들이 편찬되었다. 이제현의 『사략(史略)』(1357), 이인복이색의 『금경록(金鏡錄)』(1371) 등이 대표적인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122-123쪽.
2. 참고문헌
송찬섭 외(2017),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12세기 들어 만주 쑹화강 유역에서 여진 완안부가 흥기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동하였다. 여진은 발해의 구성원이던 말갈의 후예로,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와는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완안부가 부족을 통일한 후 고려를 침략해오자 고려는 1107년 별무반을 조직하고 여진을 공격하여 두만강 너머까지 9개의 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9성은 방어의 어려움으로 결국 2년 만에 돌려주었다. 여진은 1115년 금을 건국한 뒤 거란(1125)과 송(1126)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북부를 차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1117년에 고려에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금과의 국력 차이를 인정하고 금에 사대하기로 결정하면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다. 이후 중국 양쯔강 남쪽에서는 남송이 건국됨으로써 고려-금-남송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96-97쪽.
②고려의 ‘외왕내제’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의 5대 및 송, 거란, 금과 차례로 책봉-조공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중국 왕조의 책봉은 국왕의 즉위가 이루어진 뒤에 추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이고, 중국 왕조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고려는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국가 및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비록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고려는 황제국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국왕을 황제 또는 천자라고 했으며, 국왕을 부를 때는 폐하(陛下)라고 하였다. 또한 왕실의 용어와 격식도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었다. 중앙의 3성 6부, 국왕의 원구(圓丘)에서 제천 의례 등도 황제국의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국가적 자존감을 지켰으며, 황제국 의식을 바탕으로 주변의 발해 및 여진 세력을 규합하여 거란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조공하는 번국(蕃國)을 필요로 하였다. 이에 여진족과 탐라의 추장들이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향직(鄕職)이나 무산계(武 散階)를 수여하였다. 특히 여진은 조공국을 가리키는 명칭인 동번(東蕃)서번(西蕃) 등으로 불렀다. 이로써 고려가 중심이 되는 천하를 구성했으며, 그 안에서 고려 국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 ’라고 하였다.
다만, 이것이 고려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책봉을 받고 고려국왕을 칭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황제를 칭했다. 이러한 체제를 ‘외왕내제(外王內帝) ’라고 하며, 중국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이 아닌 다원적(多元的) 천하관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12세기에는 고려뿐 아니라 베트남, 대하(大夏) 등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책봉을 받는 동시에 황제를 칭했는데, 이는 당시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관련이 있다. 12세기 들어 여진이 흥기하면서 고려의 다원적 천하관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전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대하며 번국으로 불렸던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거꾸로 고려에 사대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힘의 균형이 무너진 현실을 인정하고 금과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다원적 천하관에 입각한 외왕내제의 상태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 원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으면서 황제국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98쪽.
⑸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고려 후기에는 무신란으로 파괴된 고려 전기의 보수적인 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무신집권기에 새로운 문화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역사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동명왕에 의한 고구려 건국을 한문 서사시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구려의 전통을 부각시키면서,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 나타난 신이한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신이사관을 계승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규보가 전통을 평가하는 기준은 유교적 가치관이었으므로 유교적 합리주의사관을 뛰어넘어 전통문화를 재인식하려 한 것으로 평가된다.
몽골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전쟁 이후 고려가 국가를 유지한 데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를 포함하여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았던 설화와 전설, 그리고 불교 관련 내용이 많이 수록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삼음으로써 중국사와 대등한 역사체계를 구성하였다. 일연과 비슷한 시기에 이승휴는 1287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사시로 기록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지었다. 여기서도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단군조선으로 설정하고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 이는 몽골과 전쟁이 끝난 뒤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수용되자 역사 서술도 영향을 받았다. 민지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1312)를 시작으로 주자가 창안한 강목체(綱目體) 사서가 편찬되었다. 강목체는 사실의 기록보다 평가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후 신진사대부에 의해 성리학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사서들이 편찬되었다. 이제현의 『사략(史略)』(1357), 이인복이색의 『금경록(金鏡錄)』(1371) 등이 대표적인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122-123쪽.
2. 참고문헌
송찬섭 외(2017),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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