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주요내용
1. 문화의 다양한 접근 방식
2. 문학과 사회문화의 상호작용
3. 은유와 판타지의 역할과 의미
1. 문화의 다양한 접근 방식
2. 문학과 사회문화의 상호작용
3. 은유와 판타지의 역할과 의미
본문내용
있다. 보통 요즘은 비관적 시선을 가진다. 안드로이드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 의지는 가질 수 없다, 와 결국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그래도 인간 고유의 자질, 감성, 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가 감성을 갔지 시작했다는 게 기계적 결정에 대한 우려를 하게 한다.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미래가 낙관적 보단 비관적으로 흘러간다.
11. 내가 쓰는 문학을 마무리하며,,,,
나는 문학을 아빠를 통해 접하고 친해졌다. 아빠가 책을 자주 읽으셔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문학을 접했다. 그러다 글방을 다니게 되며 나는 문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소설, 수필, 시 등등 여러 형태의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책 읽으면 몰랐던 것과 재밌는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문학이 좋았고 책이 좋았다. 고등학생이 되며 수능 공부를 할 때도 다른 과목보다 국어가 좋았다. 나는 국어 문학 지문에서 문제를 틀려도 답지를 보지 않고 계속 다시 읽곤 했다. 그러면 읽을 때 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게 돼 전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이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에게 재미와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견해를 주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은 벌을 받고 쫓겨난 세계이다. 그래서 죗값을 다 치르고 천상으로 가는 것이 사람들의 염원이다. 이 세상이 힘들어 삶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는 영웅을 소환한다. 바로 신화를 통한 방식과 같다. 자신의 힘으론 해결하지 못해 다른 힘에 기댄다. 그러므로 현실을 투사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화이다. 신은 능력 말고도 욕망마저도 초인적이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며 결국 사람의 모습이 투사돼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신격을 빌려 나타내고 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적 고난의 행군이 판타지에도 이어진다. 낙원에서 쫓겨나 인간세계가 만들어진다. 이제는 인간 세계의 현실 자체가 힘들어져 내 삶의 영역을 재편해야 할 상황이 온다. 이는 카오스 상황이며 위기 상황이다. 평소에 초현실적, 신격을 부정하더라고 위기 상황에선 초자연적 힘에 빌곤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간절한 믿음은 보편적이다. 이를 제도적 형태로 정비해 놓은 것이 문학이다. 문학과 인간에서 둘을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것이 판타지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의미가 가치가 있기 위해선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문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볼게 할지가 있어야 한다. 이는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 투사와 같은 것이다.
문학을 이해할 때는 인간의 삶을 알아야 하며 삶의 기반 속에서 문학이 나온다. 문학을 나의 삶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문학은 사회, 문화를 반영하며 그 당시 사회, 문화를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문학은 거울 같다. 거울 속에 비친 형상을 보며 모습을 확인한다. 그 후, 자기 모습을 반영하게 된다. 반영한다는 것은 즉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문학은 꿈을 꾼다고 하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잊을 수 있어야 한다. 몰입만 하게 되지 않고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모의하며 낯설게 하기 두 개가 조화로워야 한다. 문학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느낀 바와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없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당사자에게는 문학이 아닌 것이다.
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된 ‘낯설게 하기’와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행복한 일만 있지 않다. 누구나 힘들고 지치며 마음에 위안을 찾기 위해 게임 등을 찾곤 한다. 위안을 얻고자 하는 방법 중에는 문학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chaos’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학을 만들어 내고 찾을 필요가 없다. 문학이 우리의 삶을 낯설게 해서 객관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 문학에 문제상황을 투사하고 반영을 통해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알게 되니 처음 내가 <봄이에게>의 한 문장을 읽고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됐던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나의 상황을 화자가 말하는 ‘민들레’에 투사해 보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민들레를 내가 본받았으면 하는 개체로 보지만 실은 내가 ‘민들레’ 자체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이 ‘민들레’인 것이다.
또한, 나는 문학을 읽는다고 하면 항상 고전 소설, 고전 문학을 읽고 그게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거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 문학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판타지나, 최근 소설들은 문학이 아니라 얘들이나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느낀 바와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어야 하며 이런 게 없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당사자에게는 문학이 아니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나는 고전 문학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은데 이게 나에게 문학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는 내가 재밌게 읽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기 때문에 나에게 문학이라 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이해 안 되는 것보단 쉽게 낯설게 할 수 있고 내 상황을 투사해 볼 수 있는 것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학이 좋았고 더 알아보고 싶어 이 수업을 들었다. ‘내가 쓰는 문학’에 뭘 써야 할지 몰라서 최대한 수업내용을 담고자 했다. 물론 이것이 비평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게 나에게 ‘신화’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수업내용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교수님께서 “문학이 더 싫어졌다더라도 수업이 잘 못 된 것이지 문학이 잘못 된 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수업을 통해 문학의 자질이나 의미, 가치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딱딱하기만 전공 공부 속에서 문학에 대해 알아보는 게 재밌었던 거 같다. 더욱이 교수님의 문학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내가 더욱 이렇게 느꼈던 거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 학기 동안 수업해 주신 장일구 교수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11. 내가 쓰는 문학을 마무리하며,,,,
나는 문학을 아빠를 통해 접하고 친해졌다. 아빠가 책을 자주 읽으셔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문학을 접했다. 그러다 글방을 다니게 되며 나는 문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소설, 수필, 시 등등 여러 형태의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책 읽으면 몰랐던 것과 재밌는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문학이 좋았고 책이 좋았다. 고등학생이 되며 수능 공부를 할 때도 다른 과목보다 국어가 좋았다. 나는 국어 문학 지문에서 문제를 틀려도 답지를 보지 않고 계속 다시 읽곤 했다. 그러면 읽을 때 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게 돼 전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이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에게 재미와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견해를 주는 것이었다.
인간 세상은 벌을 받고 쫓겨난 세계이다. 그래서 죗값을 다 치르고 천상으로 가는 것이 사람들의 염원이다. 이 세상이 힘들어 삶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는 영웅을 소환한다. 바로 신화를 통한 방식과 같다. 자신의 힘으론 해결하지 못해 다른 힘에 기댄다. 그러므로 현실을 투사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화이다. 신은 능력 말고도 욕망마저도 초인적이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며 결국 사람의 모습이 투사돼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신격을 빌려 나타내고 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적 고난의 행군이 판타지에도 이어진다. 낙원에서 쫓겨나 인간세계가 만들어진다. 이제는 인간 세계의 현실 자체가 힘들어져 내 삶의 영역을 재편해야 할 상황이 온다. 이는 카오스 상황이며 위기 상황이다. 평소에 초현실적, 신격을 부정하더라고 위기 상황에선 초자연적 힘에 빌곤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간절한 믿음은 보편적이다. 이를 제도적 형태로 정비해 놓은 것이 문학이다. 문학과 인간에서 둘을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것이 판타지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의미가 가치가 있기 위해선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문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어떻게 다른 시각으로 볼게 할지가 있어야 한다. 이는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 투사와 같은 것이다.
문학을 이해할 때는 인간의 삶을 알아야 하며 삶의 기반 속에서 문학이 나온다. 문학을 나의 삶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문학은 사회, 문화를 반영하며 그 당시 사회, 문화를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문학은 거울 같다. 거울 속에 비친 형상을 보며 모습을 확인한다. 그 후, 자기 모습을 반영하게 된다. 반영한다는 것은 즉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문학은 꿈을 꾼다고 하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잊을 수 있어야 한다. 몰입만 하게 되지 않고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모의하며 낯설게 하기 두 개가 조화로워야 한다. 문학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느낀 바와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없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당사자에게는 문학이 아닌 것이다.
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된 ‘낯설게 하기’와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행복한 일만 있지 않다. 누구나 힘들고 지치며 마음에 위안을 찾기 위해 게임 등을 찾곤 한다. 위안을 얻고자 하는 방법 중에는 문학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chaos’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학을 만들어 내고 찾을 필요가 없다. 문학이 우리의 삶을 낯설게 해서 객관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 문학에 문제상황을 투사하고 반영을 통해 자아 성찰을 하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알게 되니 처음 내가 <봄이에게>의 한 문장을 읽고 힘들었던 마음이 치유됐던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나의 상황을 화자가 말하는 ‘민들레’에 투사해 보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민들레를 내가 본받았으면 하는 개체로 보지만 실은 내가 ‘민들레’ 자체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이 ‘민들레’인 것이다.
또한, 나는 문학을 읽는다고 하면 항상 고전 소설, 고전 문학을 읽고 그게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거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 문학에 해당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판타지나, 최근 소설들은 문학이 아니라 얘들이나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문학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느낀 바와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어야 하며 이런 게 없다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당사자에게는 문학이 아니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나는 고전 문학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은데 이게 나에게 문학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판타지는 내가 재밌게 읽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기 때문에 나에게 문학이라 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이해 안 되는 것보단 쉽게 낯설게 할 수 있고 내 상황을 투사해 볼 수 있는 것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학이 좋았고 더 알아보고 싶어 이 수업을 들었다. ‘내가 쓰는 문학’에 뭘 써야 할지 몰라서 최대한 수업내용을 담고자 했다. 물론 이것이 비평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게 나에게 ‘신화’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수업내용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교수님께서 “문학이 더 싫어졌다더라도 수업이 잘 못 된 것이지 문학이 잘못 된 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나는 이 수업을 통해 문학의 자질이나 의미, 가치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딱딱하기만 전공 공부 속에서 문학에 대해 알아보는 게 재밌었던 거 같다. 더욱이 교수님의 문학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내가 더욱 이렇게 느꼈던 거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 학기 동안 수업해 주신 장일구 교수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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