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내용 요약
1) 세균설 인종주의 강제격리
2) 식민지 조선과 한센병
3) 생존과 치료를 향해
4) 소록도, 절멸의 수용소
5) 해방된 조국,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
6) 개혁과 반동의 시간
7) 죽어도 되는, 죽여야 하는 215
8) 강제격리 폐지라는 희망
9) 다양해진 강제격리
10) 음성나환자촌
11) 치료를 향한 전 세계의 노력
12) 지금 한센인은 어디에 있는가?
2. 감상
3. 참고문헌
1) 세균설 인종주의 강제격리
2) 식민지 조선과 한센병
3) 생존과 치료를 향해
4) 소록도, 절멸의 수용소
5) 해방된 조국,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
6) 개혁과 반동의 시간
7) 죽어도 되는, 죽여야 하는 215
8) 강제격리 폐지라는 희망
9) 다양해진 강제격리
10) 음성나환자촌
11) 치료를 향한 전 세계의 노력
12) 지금 한센인은 어디에 있는가?
2. 감상
3.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우려하는 상황이었다. 1950년대는 격리주의와 반격리주의가 치료제, 격리, 전영병 통제 정책을 둘러싸고 조용히 충동하는 시기였다.
1963년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해 강제격리 규정은 삭제됐지만, \"제3종 전염병 환자가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돼 국가가 지정하면 한센병 환자를 계속 격리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세웠다. <전염병예방법시행령>과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에는 명시적으로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조항이 포함됐다. 즉, 다른 전염병의 경우 환자에게 주요 증상이 사라지면 퇴원이 가능했지만, 한센병은 전염성이 사라질 때까지 격리수용하도록 했다. 1963년 개정으로 일부였지만 한센병 완치 판정을 받으면 퇴원이 가능했다.
전국의 한센병 시설은 한센병 환자들과 병균이 더 이상 검출되지 않은 환자 중 장애가 심하거나 외모 변형이 심한 사람만 주로 남는 곳이 되어갔다. 결국 장애가 심하거나 변형된 사람들은 치료가 끝나도 사회복귀 대상에서 애초에 배제된 것이다.
소록도 내 별도의 격리시설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내부 규정을 지키지 않는 환자를 징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감금실이었다. 1935년 한센병 환자만 수감되는 형무소도 만들어졌다. 결핵환자를 격리하는 별도시설은 광복 이후에야 만들어졌다. 정신질환에 걸린 환자 중 당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면 감금실에 감금하여 처벌했다.
격리된 자녀들을 격리수용하는 미감아 보육원이 있었다. 광복이후에는 미감아동은 절대로 환자와 동거를 엄금한다는 조항에 따라 환자 자녀의 분리 수용을 명시했다. 국립삼육학원은 환자 자녀를 격리수용하기 위해 별도로 정부에서 만든 보육 및 수용시설이었다. 한센병 환자를 통제한 이유는 전염병 관리도 있었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거의 고아나 마찬가지인 이들이 질병을 이해하고 여러 치료제의 효과를 시험하는 데 최적의 연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0) 음성나환자촌
정부가 강제격리 방식이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한센인들의 재배치되면서 세균검사가 중요해졌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 중에서 세균검사에서 한센병균이 발견되지 않은 환자는 일반적으로 \'음성환자\'라 불렀다. 음성환자가 반드시 완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보건당국은 음성나환자라하여, 이들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전염성을 가진 집단으로 규명했다. 음성나환자의 등장은 일반인에게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음성나환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정착사업은 1961년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정착사업으로 세워진 마을을 \'정착마을(정착촌)\' 또는 \'음성나환자촌\'이라 불렀는데, 음성나환자촌이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 정착마을은 대게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하고 미개간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개간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정착마을은 전업형 축산을 통해 소득기반을 갖추기 시작했고, 1980년 전후에는 대다수 마을이 축산을 통해 일반 농가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정착사업으로 정착마을 주변 지역민의 반발의 문제가 발생했다. 음성나환자촌과 지역민 사이에서 충동은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음성나환자가 폭행당했다. 정부는 별조치없이 음성나환자들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는 사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한센병 환자들은 이전과 유사한 피해를 거듭 입었다. 한센병균을 둘러싼 생명정치가 음성나환자촌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음성나환자촌 설럽 초기에 발생한 이러한 갈등과 그로 인한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영속화 됐다.
정부나 학교는 음성나환자의 자녀는 한센병 환자가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음성나환자의 자녀의 대다수는 정착마을 내에 분교를 설립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공학에 성공하더라도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건 부지기수였다. 음성나환자 자녀에 대한 차별은 졸업후에 사회에 진출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광복이후 한센병 환자 단체는 성좌회였다. 1969년 10월 13일 \'한국한센연합회\'가 결성됐다. 한국한센연합회는 1971년 4월 20일 제3차 정기총회에서 \'한성협회\'로 개칭했다. 한센협회는 1974년 \'한성협동회\'로 이름을 바꿨고, 1975년에는 사회단체로, 그리고 198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한성장로회는 1966년 국립소록도병원 내 7개 교회에 헌당식에 참석했던 정착마을 교회의 70여 장로들이 모여서 결성하였다. 한성협동회와 한성장로회는 구성원이 상당히 겹쳤다. 국가의 한센병 관리체계 안에서 보자면 두 단체는 음성나환자가 정착마을에서 별다른 잡음 없이 생활하며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치료제를 복용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11) 치료를 향한 전 세계의 노력
1950년대 초 DDS제는 전 세계적으로 한센병 치료제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댑손제가 등장하면서 치료가 훨씬 수월해졌다. 1982년 WHO에서 MDT를 권고하자마자 한국 보건당국과 소록도병원은 이 권도안을 신속히 받아들였다. DDS제가 도입되면서 한센병 환자는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1983년 MDT 도입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오랫동안 DDS제 치료를 받아도 치료되지 않던 환자가 드디어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MDT가 도입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증가하던 재발 환자 역시 거의 사라졌다. 또한 MDT가 도입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양성환자도 극적으로 감소했다. 즉 MDT 도입으로 댄손 단독 치료로 음전환이 어렵돈 양성환자까지 치료가 가능해지고, 재발이 거의 사라지면서 한반도에서 수세기 동안 환자들을 괴롭히면 질병으로서 한센병 문제는 종료됐다.
12) 지금 한센인은 어디에 있는가?
MDT덕분에 양성환자는 급감하면서 신환자도 점차 감소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이르면 공중보건 문제로 한센병 문제는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한센인을 통제하는 방식은 2000년대 중반까지 1970년대 만들어진 틀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은 줄어들기란 쉽지 않았다. 정착마을은 낙인과 차별뿐만 아니라 도시화로 해체
1963년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해 강제격리 규정은 삭제됐지만, \"제3종 전염병 환자가 주무부령으로 정하는 자는 격리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돼 국가가 지정하면 한센병 환자를 계속 격리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세웠다. <전염병예방법시행령>과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에는 명시적으로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조항이 포함됐다. 즉, 다른 전염병의 경우 환자에게 주요 증상이 사라지면 퇴원이 가능했지만, 한센병은 전염성이 사라질 때까지 격리수용하도록 했다. 1963년 개정으로 일부였지만 한센병 완치 판정을 받으면 퇴원이 가능했다.
전국의 한센병 시설은 한센병 환자들과 병균이 더 이상 검출되지 않은 환자 중 장애가 심하거나 외모 변형이 심한 사람만 주로 남는 곳이 되어갔다. 결국 장애가 심하거나 변형된 사람들은 치료가 끝나도 사회복귀 대상에서 애초에 배제된 것이다.
소록도 내 별도의 격리시설 중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내부 규정을 지키지 않는 환자를 징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감금실이었다. 1935년 한센병 환자만 수감되는 형무소도 만들어졌다. 결핵환자를 격리하는 별도시설은 광복 이후에야 만들어졌다. 정신질환에 걸린 환자 중 당국의 통제를 따르지 않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면 감금실에 감금하여 처벌했다.
격리된 자녀들을 격리수용하는 미감아 보육원이 있었다. 광복이후에는 미감아동은 절대로 환자와 동거를 엄금한다는 조항에 따라 환자 자녀의 분리 수용을 명시했다. 국립삼육학원은 환자 자녀를 격리수용하기 위해 별도로 정부에서 만든 보육 및 수용시설이었다. 한센병 환자를 통제한 이유는 전염병 관리도 있었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거의 고아나 마찬가지인 이들이 질병을 이해하고 여러 치료제의 효과를 시험하는 데 최적의 연구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0) 음성나환자촌
정부가 강제격리 방식이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한센인들의 재배치되면서 세균검사가 중요해졌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 중에서 세균검사에서 한센병균이 발견되지 않은 환자는 일반적으로 \'음성환자\'라 불렀다. 음성환자가 반드시 완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보건당국은 음성나환자라하여, 이들은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전염성을 가진 집단으로 규명했다. 음성나환자의 등장은 일반인에게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음성나환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정착사업은 1961년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정착사업으로 세워진 마을을 \'정착마을(정착촌)\' 또는 \'음성나환자촌\'이라 불렀는데, 음성나환자촌이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 정착마을은 대게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하고 미개간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개간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정착마을은 전업형 축산을 통해 소득기반을 갖추기 시작했고, 1980년 전후에는 대다수 마을이 축산을 통해 일반 농가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정착사업으로 정착마을 주변 지역민의 반발의 문제가 발생했다. 음성나환자촌과 지역민 사이에서 충동은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음성나환자가 폭행당했다. 정부는 별조치없이 음성나환자들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는 사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한센병 환자들은 이전과 유사한 피해를 거듭 입었다. 한센병균을 둘러싼 생명정치가 음성나환자촌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음성나환자촌 설럽 초기에 발생한 이러한 갈등과 그로 인한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영속화 됐다.
정부나 학교는 음성나환자의 자녀는 한센병 환자가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음성나환자의 자녀의 대다수는 정착마을 내에 분교를 설립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공학에 성공하더라도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건 부지기수였다. 음성나환자 자녀에 대한 차별은 졸업후에 사회에 진출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광복이후 한센병 환자 단체는 성좌회였다. 1969년 10월 13일 \'한국한센연합회\'가 결성됐다. 한국한센연합회는 1971년 4월 20일 제3차 정기총회에서 \'한성협회\'로 개칭했다. 한센협회는 1974년 \'한성협동회\'로 이름을 바꿨고, 1975년에는 사회단체로, 그리고 198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했다. 한성장로회는 1966년 국립소록도병원 내 7개 교회에 헌당식에 참석했던 정착마을 교회의 70여 장로들이 모여서 결성하였다. 한성협동회와 한성장로회는 구성원이 상당히 겹쳤다. 국가의 한센병 관리체계 안에서 보자면 두 단체는 음성나환자가 정착마을에서 별다른 잡음 없이 생활하며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치료제를 복용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11) 치료를 향한 전 세계의 노력
1950년대 초 DDS제는 전 세계적으로 한센병 치료제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댑손제가 등장하면서 치료가 훨씬 수월해졌다. 1982년 WHO에서 MDT를 권고하자마자 한국 보건당국과 소록도병원은 이 권도안을 신속히 받아들였다. DDS제가 도입되면서 한센병 환자는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1983년 MDT 도입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오랫동안 DDS제 치료를 받아도 치료되지 않던 환자가 드디어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MDT가 도입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증가하던 재발 환자 역시 거의 사라졌다. 또한 MDT가 도입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양성환자도 극적으로 감소했다. 즉 MDT 도입으로 댄손 단독 치료로 음전환이 어렵돈 양성환자까지 치료가 가능해지고, 재발이 거의 사라지면서 한반도에서 수세기 동안 환자들을 괴롭히면 질병으로서 한센병 문제는 종료됐다.
12) 지금 한센인은 어디에 있는가?
MDT덕분에 양성환자는 급감하면서 신환자도 점차 감소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이르면 공중보건 문제로 한센병 문제는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한센인을 통제하는 방식은 2000년대 중반까지 1970년대 만들어진 틀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은 줄어들기란 쉽지 않았다. 정착마을은 낙인과 차별뿐만 아니라 도시화로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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