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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논
Ⅱ. 남행 전의 사록과 장신
Ⅲ. 관포 어득강과 퇴계의 교유
Ⅳ. 남도 기행과 남행록
1. 일정과 기여
2. 남행록 재편집
3. 일시 목록에 보이는 남행시
Ⅴ. 평생사적 의의
Ⅵ. 결 논
Ⅱ. 남행 전의 사록과 장신
Ⅲ. 관포 어득강과 퇴계의 교유
Ⅳ. 남도 기행과 남행록
1. 일정과 기여
2. 남행록 재편집
3. 일시 목록에 보이는 남행시
Ⅴ. 평생사적 의의
Ⅵ. 결 논
본문내용
, 선배들의 優許를 받으면서도 성찰과 절제의 한계는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실현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고 미래 설계도 굳혀 나갔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첫째 어관포의 초청에 응한 일이다. 騷壇 노장의 招致에는 필연적으로 시의 唱和가 있을 것임을 알고도 이를 피하지 아니하고 가서 시로서 대응한 -자기실체를 보인- 것이다. 또 한 분 선배인 吳竹齋와의 記遊 唱酬에 있어서도 그는 寓目興懷와 吟諷詠賦의 시작 능력을 십분 발표하였다. 나중의 서행록 발문에 기록해 둔 바와 같이 이 남도기행은 시(以資臥遊之興)를 쓰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퇴계가 일찌기 한 기간을 두고 이렇듯 많은 시를 읊은 일은 없었다. 퇴계의 본격적인 詩作생활(문학)은 이로부터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26-
특히 평생 처음 읊은 <梅花詩>를 비롯하여 관포의 <東州道院次韻詩>와 <過吉先生閭>, <月影臺>, <矗石樓>, <鼻巖示同遊>, <寄魚灌圃> 등 백수십수는 그를 대시인의 자리로 올려놓게 되었고, 그 시들은 문집의 첫 장을 장식하였다.
둘째 남행은 治·敎 兩全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32세 때인 임진년에 문과에 응시하고도 參榜을 보지않고 하향한 퇴계가 관포에게 동주도원의 이야기를 듣고 겸전의 가능성에 대하여 감(昆陽吏非吏, 機靜官家卽道家)을 잡은 것이다. 관포에게 흥해의 도원을 곤양에서도 이행(昆之閒僻 不減於興 則道院之稱 移之於昆) 하도록 권할 만큼 환로에서도 도의고양과 興學 교육이 가능함을 시사받았다. 여름에 서행하여 석 달 미만에 돌아왔지만 그 뒤를 科第를 거쳐 나아간 것은 이 때에 어떤 설계를 굳혔으리라고 믿는다.
셋째 養眞 結茅庵의 뜻은 이 때 벌써 다져지고 있었다. <三月三日出遊> 시에는 茅庵을 만들어 烟霞에 묻혀 사는 것을 소지라고 읊었다. 후일의 養眞庵, 寒栖庵(靜習堂), 溪上書堂(六友園), 陶山書堂(玩樂齋, 岩栖軒)의 연거생활은 출사후 사회 경험을 하고난 뒤에 작정한 것이 아니라 30대초에 이미 그러한 취향을 가졌고 결모 양진의 설계를 하고 있었다.
넷째로 산인 惠忠과의 邂逅는 노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때까지 퇴계는 많은 승려를 접했고 산사에 머물면서 독서도 했다. 찾아온 惠忠師를 대하고 난 뒤에 그에게 준 시의 서에 적은 내용은 세상 물정을 경험하고 난 뒤의 人·世觀의 재정립인 것 같이 느껴진다.
불교가 비록 살을 태우고 인륜을 끊은 것은 죄가 되는 것이지만, 속세에서 구하는 것이 없고 사리사욕이 없으며, 그 심사가 고요하고 말없이 도리를 터득하는 점 등은 장점으로 보았다.
) 李章佑, 「退溪詩와 僧侶」, 『退溪學報』68, pp.132∼133.
이글 이하의 번역문을 참조할 것, 原文은 再編한 南行錄의 32번에 있음.
아마 이러한 생각은 속된 것에 골몰하고, 명예에 급급하며, 바깥만 보고 속은 들여다보지 못하며, 벼슬과 지위로써 귀천을 나누며, 窮·達로서 높낮음을 결정하는 세태 관조의 결론이라 보아진다. 아무튼 퇴계의 불교와 승려에 대한 태도의 한 면목이 잘 드러나 있음에 주목을 끈다.
-227-
끝으로 퇴계는 探勝을 좋아하는 여행가이며, 慕先 景賢과 謙遜 자율하는 후배이며, 풍류가 넘치는 시인이며, 雄辭 辯으로 남을 효유할 수 있는 스승상이며, 인정이 풍부한 悅親戚의 가정인이며, 친화력 있고 온유돈후한 향당인이며, 철저한 생활(실천) 기록가란 인간상을 이 남행록은 提據해 준다.
Ⅵ. 結 論
퇴계의 생활에 대하여 평생 사업의 진행에 맞추어 연대 구분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출사 이전의 장신기(준비기간), 출사후의 사환기(봉사기간), 진퇴와 吾業(사) 실천기(자기실현기간)가 바로 그것이다. 제1기가 남행록과 서행록을 쓴 33세까지이고 제2기는 풍기군수를 버리고 도산에 돌아와 한서암을 짓고 입택한 50세까지, 제3기는 51세에 계상서당을 지어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 拙著, 『退溪의 燕居와 思想形成』, pp.72∼76.
拙著, 『退溪家年表』 p.247.
退溪先生文集 內集 卷二 葉5 <有嘆>.
교육과 저술을 시작하여 도산서당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성학(실학 : 당세에 필요한 바른 학문)을 펴 인간과 사회의 개조를 위해 몸바친 말년까지라고 하겠다.
따라서 제1기의 마지막 해인 계사년은 퇴계의 생애에 있어서 그 이전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이며, 그 해에 있었던 행력 자체가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먼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많은 시를 써 남겨 놓았다.
-228-
시에 담아져 있는 퇴계의 뜻이나 언어는 그의 삼분의 일의 전반부 인생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서행록은 조금 뒤로 미루어 놓고 가능한 대로 모두 輯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지면 관계로 시의 해석은 손을 대지 못하고 간단한 附注로 남행 여로를 재구성해 보았다.
퇴계의 평생에 있어서 계사년의 남행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로 묶어서 요약했으나, 연보에 실어놓은 이 해의 보록이 퇴계 생애의 나지막한 재(峴)로 나타내었다면 남행록은 높은 峻嶺같은 맥을 찾고 큰 강하의 줄기를 찾는 것과 같은 志行의 경계에 뜻을 붙여 명확하게 표시하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관포의 초청을 받은 사실로서도 당시 젊은 퇴계에 대한 평가를 추측할 수 있고, 문달한 사장과 처가의 尊老들로부터 받은 중망으로 퇴계의 인물평은 더 贅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퇴계는 출사전 33세에 주위로부터 주목받았고 그를 가까이에서 겪고 아는 사람은 그 때 이미 凡俗 庸衆人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시제와 交遊한 인물로써 판단이 가능하다.
이 논문의 補助를 위해서는 그 때 만난 인사들의 저술을 찾아 더 세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남행록의 완벽한 재구성은 아직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고 서행록과 더불어 읽으면 계사년의 퇴계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拙著의 퇴계가연표에는 4월 23일 이후 芝山蝸舍에 돌아온 7월 13일 까지의 서행기록이 시로 엮어져 있다. 퇴계의 생애와 학문을 이야기할 때 이 남행록이 다소나마 참고가 되고, 퇴계를 논할 때 남행의 의의를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29-
(1991 辛未年 天中節 於四器軒)
첫째 어관포의 초청에 응한 일이다. 騷壇 노장의 招致에는 필연적으로 시의 唱和가 있을 것임을 알고도 이를 피하지 아니하고 가서 시로서 대응한 -자기실체를 보인- 것이다. 또 한 분 선배인 吳竹齋와의 記遊 唱酬에 있어서도 그는 寓目興懷와 吟諷詠賦의 시작 능력을 십분 발표하였다. 나중의 서행록 발문에 기록해 둔 바와 같이 이 남도기행은 시(以資臥遊之興)를 쓰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퇴계가 일찌기 한 기간을 두고 이렇듯 많은 시를 읊은 일은 없었다. 퇴계의 본격적인 詩作생활(문학)은 이로부터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26-
특히 평생 처음 읊은 <梅花詩>를 비롯하여 관포의 <東州道院次韻詩>와 <過吉先生閭>, <月影臺>, <矗石樓>, <鼻巖示同遊>, <寄魚灌圃> 등 백수십수는 그를 대시인의 자리로 올려놓게 되었고, 그 시들은 문집의 첫 장을 장식하였다.
둘째 남행은 治·敎 兩全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32세 때인 임진년에 문과에 응시하고도 參榜을 보지않고 하향한 퇴계가 관포에게 동주도원의 이야기를 듣고 겸전의 가능성에 대하여 감(昆陽吏非吏, 機靜官家卽道家)을 잡은 것이다. 관포에게 흥해의 도원을 곤양에서도 이행(昆之閒僻 不減於興 則道院之稱 移之於昆) 하도록 권할 만큼 환로에서도 도의고양과 興學 교육이 가능함을 시사받았다. 여름에 서행하여 석 달 미만에 돌아왔지만 그 뒤를 科第를 거쳐 나아간 것은 이 때에 어떤 설계를 굳혔으리라고 믿는다.
셋째 養眞 結茅庵의 뜻은 이 때 벌써 다져지고 있었다. <三月三日出遊> 시에는 茅庵을 만들어 烟霞에 묻혀 사는 것을 소지라고 읊었다. 후일의 養眞庵, 寒栖庵(靜習堂), 溪上書堂(六友園), 陶山書堂(玩樂齋, 岩栖軒)의 연거생활은 출사후 사회 경험을 하고난 뒤에 작정한 것이 아니라 30대초에 이미 그러한 취향을 가졌고 결모 양진의 설계를 하고 있었다.
넷째로 산인 惠忠과의 邂逅는 노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때까지 퇴계는 많은 승려를 접했고 산사에 머물면서 독서도 했다. 찾아온 惠忠師를 대하고 난 뒤에 그에게 준 시의 서에 적은 내용은 세상 물정을 경험하고 난 뒤의 人·世觀의 재정립인 것 같이 느껴진다.
불교가 비록 살을 태우고 인륜을 끊은 것은 죄가 되는 것이지만, 속세에서 구하는 것이 없고 사리사욕이 없으며, 그 심사가 고요하고 말없이 도리를 터득하는 점 등은 장점으로 보았다.
) 李章佑, 「退溪詩와 僧侶」, 『退溪學報』68, pp.132∼133.
이글 이하의 번역문을 참조할 것, 原文은 再編한 南行錄의 32번에 있음.
아마 이러한 생각은 속된 것에 골몰하고, 명예에 급급하며, 바깥만 보고 속은 들여다보지 못하며, 벼슬과 지위로써 귀천을 나누며, 窮·達로서 높낮음을 결정하는 세태 관조의 결론이라 보아진다. 아무튼 퇴계의 불교와 승려에 대한 태도의 한 면목이 잘 드러나 있음에 주목을 끈다.
-227-
끝으로 퇴계는 探勝을 좋아하는 여행가이며, 慕先 景賢과 謙遜 자율하는 후배이며, 풍류가 넘치는 시인이며, 雄辭 辯으로 남을 효유할 수 있는 스승상이며, 인정이 풍부한 悅親戚의 가정인이며, 친화력 있고 온유돈후한 향당인이며, 철저한 생활(실천) 기록가란 인간상을 이 남행록은 提據해 준다.
Ⅵ. 結 論
퇴계의 생활에 대하여 평생 사업의 진행에 맞추어 연대 구분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출사 이전의 장신기(준비기간), 출사후의 사환기(봉사기간), 진퇴와 吾業(사) 실천기(자기실현기간)가 바로 그것이다. 제1기가 남행록과 서행록을 쓴 33세까지이고 제2기는 풍기군수를 버리고 도산에 돌아와 한서암을 짓고 입택한 50세까지, 제3기는 51세에 계상서당을 지어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 拙著, 『退溪의 燕居와 思想形成』, pp.72∼76.
拙著, 『退溪家年表』 p.247.
退溪先生文集 內集 卷二 葉5 <有嘆>.
교육과 저술을 시작하여 도산서당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성학(실학 : 당세에 필요한 바른 학문)을 펴 인간과 사회의 개조를 위해 몸바친 말년까지라고 하겠다.
따라서 제1기의 마지막 해인 계사년은 퇴계의 생애에 있어서 그 이전 어느 때보다 중요한 해이며, 그 해에 있었던 행력 자체가 의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먼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많은 시를 써 남겨 놓았다.
-228-
시에 담아져 있는 퇴계의 뜻이나 언어는 그의 삼분의 일의 전반부 인생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서행록은 조금 뒤로 미루어 놓고 가능한 대로 모두 輯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지면 관계로 시의 해석은 손을 대지 못하고 간단한 附注로 남행 여로를 재구성해 보았다.
퇴계의 평생에 있어서 계사년의 남행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로 묶어서 요약했으나, 연보에 실어놓은 이 해의 보록이 퇴계 생애의 나지막한 재(峴)로 나타내었다면 남행록은 높은 峻嶺같은 맥을 찾고 큰 강하의 줄기를 찾는 것과 같은 志行의 경계에 뜻을 붙여 명확하게 표시하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관포의 초청을 받은 사실로서도 당시 젊은 퇴계에 대한 평가를 추측할 수 있고, 문달한 사장과 처가의 尊老들로부터 받은 중망으로 퇴계의 인물평은 더 贅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퇴계는 출사전 33세에 주위로부터 주목받았고 그를 가까이에서 겪고 아는 사람은 그 때 이미 凡俗 庸衆人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시제와 交遊한 인물로써 판단이 가능하다.
이 논문의 補助를 위해서는 그 때 만난 인사들의 저술을 찾아 더 세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남행록의 완벽한 재구성은 아직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고 서행록과 더불어 읽으면 계사년의 퇴계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拙著의 퇴계가연표에는 4월 23일 이후 芝山蝸舍에 돌아온 7월 13일 까지의 서행기록이 시로 엮어져 있다. 퇴계의 생애와 학문을 이야기할 때 이 남행록이 다소나마 참고가 되고, 퇴계를 논할 때 남행의 의의를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29-
(1991 辛未年 天中節 於四器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