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정주영의 기업가정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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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상쇄시켰다
1976년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 모델 ‘포니’를 생산하고, 고려산업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동년 6월 17일 당해 연도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공사비 9억3천1백14만 달러의 세계 최대의 초대형 심해 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여 일명 주베일 드라마로 불릴 정도로 세계건설업계의 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지칭되었던 공사를 하게 되었다. 공사규모는 육상과 해상에 걸친 토목부분의 모든 공정과 건축, 전기, 설비 부문까지 총동원된 종합건설공사였다는 것으로도 특기할만한 사업이었다. 이 사우디 국왕의 주베일산업항 계획의 현대시공은 재벌로 성장한 정주영 회장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6년 12월 18일 현대종합상사주식회사를 설립합으로써 해외수출 종합상사로서 발돋움하고 해외시장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아산사업복지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무를 다하게 된다. 마침내 1977년 2월 한국경제의 총수 자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가출한 막노동꾼에서 대한민국 재계의 총수 자리인 경제인연합회 회장까지 되는 성공시대를 열었다. 그의 나이 62세의 장년기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그는 쉬지 않고 사업을 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81년 4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고, 그해 9월 IOC에서 열리는 바덴바덴에서 올림픽의 서울 유치를 위해 활동하였으며, 그해 9월 30일 제24회 세계올림픽 개최지 서울 확정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83년 2월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설립, 1984년 2월 25일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의 A지구 최종 물막이 공사에 이른 바 정주영공법으로 불리우는 폐유조선공법을 시도하여 4천7만평을 간척하였으며, 그 결과 연산 5만톤의 쌀을 수확하는 국토는 넓을수록 좋다는 그의 지론을 확인시킨 결과를 낳았다. 이 면적은 여의도의 33배로서 우리 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김제평야보다 넓다. 당시 이 유조선공법으로 절약된 공사비는 290억원이었으며,<뉴스위크>와<타임>지까지 유조선 공법이 소개되었고, 런던 뎀즈강 하류 방조제공사를 맡았던 세계적인 철구조물 회사에서는 이 유조선공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총 공사비 6천4백70억 원을 투입해서 만든 서산농장은 영농사원 1인당 관리면적이 35만평에 이른다. 이 면적은 우리 나라 일반농가 80호가 짓는 농사면적과 같다.
정주영회장은 1990년대 들어와서 전반기는 대선 참여 등과 통일국민당창당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고 1997년 11월의 IMF 관리 경제하에서 구조조정으로 재벌을 해체하면서 세계적 초우량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교두보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에서 1999년으로 이어지는 20세기 말에 85세의 정주영회장은 황소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하여 북한을 방문하는 대담성과 용기, 그리고 그의 남북통일관은 금강산개발 목적으로 이어지면서 금강산유람선관광사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는 자수성가형기업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정치가 또는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20세기의 대표적 기업가이다.
사실 1970년대 삼성이 투자한 중화학공업은 거의 모두 실패했다 (표 3-14 참조). 이로인해 삼성은 한국재계에서 정상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산업구조를 변화시켜야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표 2-4에서 보여주듯이 삼성은 상위 10대 재벌 중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1983년, 전자제품의 수출한계와 중공업 부문의 투자한계를 절감한 73세의 이병철은 반도체산업에 집중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여기서 삼성은 반도체라는 새로운 산업에 모험을 걸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고부가가치산업, 하이테크산업과 자원절약산업으로 이룩한 일본의 성공적인 전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병철, 1983). 그리고 1987년 세계 반도체시장은 420억 달러의 대규모 시장으로 예상되었다25) 반도체산업의 발전은 삼성이 1980년대 전략산업으로 추구한 전자산업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4년 삼성은 국내에서 자금을 동원하기가 용이하지 않자 256K 반도체 칩 생산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1억 4천만 달러의 차관을 끌어들였다. 1억 달러는 홍콩에 있는 10개 은행들로부터, 4천만 달러는 도쿄은행이 이끄는 일본은행단으로부터 빌렸다. 이 금액은 건설 이외의 목적을 위해 한국기업이 외국에서 빌린 가장 큰 액수였다. 이로써 삼성은 동방생명 (후일 삼성생명)이라는 자체 내의 금융기관을 통하여 자금을 조달할 뿐만 아니라 해외신용도 동원하게 됨으로써 자금조달의 부문에서 정부로 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된다.
반도체산업의 위험부담을 의식한 이병철은 DRAMs의 대량생산이라는 일본 성공의 예를 따르도록 결정했다 (Hobday, 1995: 81). 삼성은 1981년 64K DRAM과 1985년 256K DRAM의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이병철이 강조한 기술발전은 삼성반도체통신이 한국 최초로 64K DRAM 칩 제조와 곧이어 256K DRAM 칩을, 그리고 1MB 칩을 생산할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84년, 일본 반도체제조업자가 주도한 기억회로memory circuits 특히 256K DRAM의 가격이 하락하였기 때문에 삼성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직후 삼성반도체통신은 Macron Technologies Inc.(Idaho소재)의 도움으로 초대규모 집적회로VLSI를 생산하여 시장에 출시했다. 반도체의 세계시장가격 역시 곤두박질쳤다. 삼성반도체통신은 반도체 생산 초기부터 가격경쟁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시장에서의 손실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제품 디자인을 따라잡고자 애썼으며 제조과정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1988년 반도체 산업에 총 8억 달러의 투자는 홉데이Hobday에 의하면 이병철의 도박이었다 (Hobday, 1995: 82 그러나 이병철 그의 진취적 기상은 현삼성의 모티브로 자리잡아 오늘날 삼성의 굳건한 입지에 확고한 역할을 하고 있다.그는 20세기의 손꼽히는 한국의 자주적 기업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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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5.25
  • 저작시기2002.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5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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