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과 국제관계 - 한반도 통일을 위한 사례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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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국내외 환경과 독일의 정책

가. 독일의 기본 입장
나. 상황 변화
다. 독일의 전략

3. 주변 강국의 정책

가. 미 국
나. 소 련
다. 영국과 프랑스

4. 통일에 따른 기본 문제

가. NATO 회원 잔류
나. 소련군 철수
다. NATO 개혁과 안보 구조 변화
라. 소련·독일 관계의 재정립
마. 국경선 불변 원칙
바. 유럽연합(EU)의 입장

5. 통일 독일의 외교 정책

가. 유럽 중시 안보 정책
나. 제3국 분쟁 해결 참여
다. 범세계적 문제의 도전
라. 협력이 외교의 핵심

6. 맺는 말

본문내용

기 때문에 독일 통일 방법은 한반도와는 무관하며, 교훈을 전수할 수도 없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패전국으로써 또한 히틀러 제3국의 죄악 때문에 한반도의 경우보다 더욱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던 독일이 통일된 것은 아무리 유리하지 않은 상황도 노력하면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과 한국은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갖게 한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최초로 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통일 과정에서 첫 단추를 정확하게 끼우도록 하였다. 서독은 미국의 지지 획득을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그 결과가 미국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제공한 마샬 플랜 지원에 의한 전후 경제적 폐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경험이나 미국의 핵우산 아래 NATO 동맹체 안에 안주할 수 있었던 상황들을 독일의 정치인과 국민들은 항상 강조하여 미국의 신뢰를 얻었다. 미국이 한국의 통일 문제에도 전폭적으로 지지하도록 대미 신뢰 구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대북한 관계 및 금융·통화 위기 극복 과정에서 나타난 한·미간의 거리감은 사실상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한국은 미국이 도움을 주는데 있어 어떠한 우려나 유보적 감정을 갖지 않고, 명쾌한 태도로써 전폭적으로 지지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대독일 정책, 특히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은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보였으며, 여기서 우리는 많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이 40년대에서 50년대에 이르는 동안 독일 통일을 회의적으로 생각했으며, 서독이 친서방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통일 자체를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그후 미국 정부는 60년대까지는 1955년 체결된 독일 조약 규정에 맞게 독일 통일을 형식적으로만 지지하는(lip service) 태도를 보였다. 70년대와 80년대 상반기까지도 미·소 두 초강대국의 정책을 대변하는 두 독일이 상호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양 진영간의 데탕트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했다. 즉, 독일이 통일되기보다는 분단된 채 있는 상태(status quo)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책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6월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씨 문을 여시오,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촉구하면서부터 미국의 정책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독일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표명되었다. 이어 부시 대통령에 와서는 독일 문제가 국제화하고, 미·독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독일은 우호와 신뢰를 바탕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았으며, 호의를 향유할 수 있었다. 독일은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 독립 국가의 자결권 인정이라는 미국의 기본 원칙에 따라 통일을 추진하는데 전폭적인 도움을 획득하였다. 독일이 유럽에서 미국의 가장 믿을 만한 우방이라는 신뢰를 얻으려 노력하여 성공함으로써 통일을 앞장서서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의 통일은 2차 대전 패전국이라는 원죄에 따라 미, 영, 불, 소 4대 전승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2+4」회담에서 통일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운영함에 있어서도 독일은 당사자인 동·서독이 먼저 합의하고, 차후에 4개국이 동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통일문제는 어떠한 난관이나 전제 조건이 있더라도 본질적으로 해당 당사국에 의하여 우선 추진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나온 결과였다. 4대 전승국 외의 국가들이 독일 통일 문제에 간섭하고 영향력 발판을 확보하려 시도하였을 때, 독일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주변 국가들이 영향력 행사를 위한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한국은 이를 결단성 있게 거부해야 한다. 더구나 한국은 2차 대전의 패전국이 아니기 때문에 「2+4」회담이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 일, 중, 러 4개국은 한반도통일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분명한 선 밖에서 있어야 하며, 지나치게 이 문제에 간섭하지 않도록 사전에 견제해야 한다.
독일은 사전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통일 기회가 오자 이를 신속하게 포착하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가져온 절호의 기회를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있는 동안 최대로 활용하였다. 공산주의 이념을 무력화하고, 체제간의 대립을 무의미하게 만든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독일에만 유리한 통일 바탕이 될 리는 만무하다. 만약에 우리도 사전에 준비를 갖추고, 이를 활용하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통일 과정에 상당한 진전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한 것이 국제적 여건과 환경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 것이다. 국토가 분단된 것도 불가피한 운명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찾고 있지만, 패전국인 일본은 분단되지 않은 것을 고려할 때, 분단을 방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된다. 앞으로 갑자기 올지도 모르는 통일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아야 한다.
독일은 강력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통일이 이루어졌다.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 비용 부담, 귀향 군에 대한 주택 마련, 개혁 정책에 필요한 자금 지원 등이 소련의 독일 통일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국제 금융·통화 위기를 빠른 시기 안에 극복하여 경제력을 축적해야만 통일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폴란드와 같이 국경선 문제와 관련이 있는 전승국 외의 나라에도 경제력을 활용하여 독일 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독일은 통일을 돈으로 샀다고 하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경제력을 축적하고 이를 구사하였는데, 이에 관한 효율적인 방법 등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를 선별하여 그 희망을 최대로 충족시켜야 한다. 또한 약속한 것은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대외 신뢰를 높여야 한다. 중요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상대편에 아량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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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5.31
  • 저작시기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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