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화해`라는 낱말의 뜻
2. 성경에서 가르치는 화해의 기본 구조와 그 교훈
3.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해의 실제와 그 교훈
4. 우리의 갈 길은?
2. 성경에서 가르치는 화해의 기본 구조와 그 교훈
3.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해의 실제와 그 교훈
4. 우리의 갈 길은?
본문내용
오하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3.3.3.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삼하14장) - 슬기로운 대화로 이루는 화해
(1) 창세기 33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을, 45장과 50장에서 요셉과 형들의 화해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사무엘하 14장에서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다윗과 압살롬 부자를 화해시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드고아 출신의 이 슬기로운 여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기 여동생 다말을 겁탈한 암논을 죽이고 달아난 뒤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 다윗을 찾아옵니다. 막 장례를 치른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여인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고 살아 왔는데,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죽이는 비극이 벌어졌고, 온 집안 사람들이 당시 보복법을 따라 남은 아들까지 벌하여 없애려한다고 하면서, 이 일에 임금 다윗이 개입하여 남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다윗이 이를 약속하고 보장했지만, 이 여인은 물러가지 않고 다윗 자신이 압살롬을 불러들이지 않고 있는 점을 넌지시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다윗에게 한 이야기는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달아나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압살롬을 용서하고 불러들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다윗에게 깨우쳐 주려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우를 죽인 형에게 내릴 복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과부 행세를 한 것입니다.
다윗도 이제서야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배다른 형을 죽이고 쫓겨 달아나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던 왕자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화해에 관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근친 상간과 형제 살인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갈라진 부모 자식도 다시 서로 만나야 하듯이, 서로 죽이고 죽는 등의 여러 가지 비극적인 일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사무엘하 13장 39절을 보면 비록 형제를 죽이고 달아난 압살롬이지만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했다고 합니다.
(3) 이렇게 갈라진 부모 자식 사이를 이어주려면, 슬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기로움은 형제자매끼리, 부모자식끼리, 이웃 사람들끼리, 같은 동포끼리 사이가 어그러져 서로를 해치고 갈라져 만나려 하지 않을 때 그 사이에 들어서서 죽을 사람을, 죄짓고 쫓겨난 사람을 살리는 슬기로움입니다. 그 원인이야 어떠했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그 때문에 아비와 자식이 갈라지고 백성들 사이에 마음이 어그러지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이에 들어서서 이미 죽은 사람이야 어찌 하랴만 산 사람이라도 살리고 산 사람끼리는 화목하게 살도록 한 것이 이 드고아 여인의 슬기로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때 우리 마을에, 우리 아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나라에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해치는 일들이 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얼른 화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나온 드고아 여인처럼 슬기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3) 갈라진 사람을 이어주는 이러한 슬기로움은 드고아 여인에게서 보듯이 또한 함부로 말하여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쳐 일을 그르치지 아니하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해야 할 바를 깨닫도록 쉽게 차근차근 이야기할 줄 아는 슬기로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무서운 얼굴을 하여 크고 높은 목소리로 야단치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잘 잘못을 똑바로 지적하여 말해야 하기도 하겠습니다만 어쩌면 오늘처럼 사람들이 바른말 듣기 싫어하는 시대에서는 드고아 여인처럼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간절하게 사태를 밝혀나가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3.4. 화해의 보기가 될 만한 다른 본문들
(1) 역대하 28장8-15절에서는 북왕국 군대가 남왕국 군대를 쳐부수고 동족을 사마리아 성으로 사로잡아오자, 예언자 오뎃이 이들을 꾸짖어 포로들을 잘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2) 빌레몬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친 종 오네시모가 이제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빌레몬이 그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화해시키려고 애쓴 것입니다.
4. 우리의 갈 길은?
(1) 화해의 일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화해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했다면, 또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자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2) 이 세상에서 화해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과 화해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3) 오래 갈등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오랫만에 다시 만나 화해하기에 앞서 느끼는 불안이 적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서로 마주보고 나아가 서로에게 은혜를 구하고 베푸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다시 만나 화해한 뒤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잘 의논하여 실천할 수 있습니다.
(4) 생존이 위협받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오히려 생명 보존의 길을 열어 주셔서 서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신뢰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로써 이루어, 마침내는 온 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5) 화해는 지난날 서로가 주고받았던 상처에 대한 기억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지 않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슬기롭게 대화하여 설득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6) 양보와 희생의 수고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 화해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평화의 사도'로 이러한 화해의 길을 계속 가려 한다면, 이전보다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면서 더욱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며 더욱더 진지하게 우리 스스로를 훈련하는 일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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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다윗과 압살롬의 화해(삼하14장) - 슬기로운 대화로 이루는 화해
(1) 창세기 33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을, 45장과 50장에서 요셉과 형들의 화해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사무엘하 14장에서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다윗과 압살롬 부자를 화해시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드고아 출신의 이 슬기로운 여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기 여동생 다말을 겁탈한 암논을 죽이고 달아난 뒤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 다윗을 찾아옵니다. 막 장례를 치른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여인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홀로 두 아들을 키우고 살아 왔는데,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죽이는 비극이 벌어졌고, 온 집안 사람들이 당시 보복법을 따라 남은 아들까지 벌하여 없애려한다고 하면서, 이 일에 임금 다윗이 개입하여 남은 아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호소합니다. 다윗이 이를 약속하고 보장했지만, 이 여인은 물러가지 않고 다윗 자신이 압살롬을 불러들이지 않고 있는 점을 넌지시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다윗에게 한 이야기는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달아나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압살롬을 용서하고 불러들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다윗에게 깨우쳐 주려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우를 죽인 형에게 내릴 복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과부 행세를 한 것입니다.
다윗도 이제서야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배다른 형을 죽이고 쫓겨 달아나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던 왕자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화해에 관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근친 상간과 형제 살인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갈라진 부모 자식도 다시 서로 만나야 하듯이, 서로 죽이고 죽는 등의 여러 가지 비극적인 일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사무엘하 13장 39절을 보면 비록 형제를 죽이고 달아난 압살롬이지만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했다고 합니다.
(3) 이렇게 갈라진 부모 자식 사이를 이어주려면, 슬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기로움은 형제자매끼리, 부모자식끼리, 이웃 사람들끼리, 같은 동포끼리 사이가 어그러져 서로를 해치고 갈라져 만나려 하지 않을 때 그 사이에 들어서서 죽을 사람을, 죄짓고 쫓겨난 사람을 살리는 슬기로움입니다. 그 원인이야 어떠했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그 때문에 아비와 자식이 갈라지고 백성들 사이에 마음이 어그러지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이에 들어서서 이미 죽은 사람이야 어찌 하랴만 산 사람이라도 살리고 산 사람끼리는 화목하게 살도록 한 것이 이 드고아 여인의 슬기로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때 우리 마을에, 우리 아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나라에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해치는 일들이 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얼른 화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나온 드고아 여인처럼 슬기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3) 갈라진 사람을 이어주는 이러한 슬기로움은 드고아 여인에게서 보듯이 또한 함부로 말하여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쳐 일을 그르치지 아니하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해야 할 바를 깨닫도록 쉽게 차근차근 이야기할 줄 아는 슬기로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무서운 얼굴을 하여 크고 높은 목소리로 야단치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잘 잘못을 똑바로 지적하여 말해야 하기도 하겠습니다만 어쩌면 오늘처럼 사람들이 바른말 듣기 싫어하는 시대에서는 드고아 여인처럼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간절하게 사태를 밝혀나가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3.4. 화해의 보기가 될 만한 다른 본문들
(1) 역대하 28장8-15절에서는 북왕국 군대가 남왕국 군대를 쳐부수고 동족을 사마리아 성으로 사로잡아오자, 예언자 오뎃이 이들을 꾸짖어 포로들을 잘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2) 빌레몬서에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친 종 오네시모가 이제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빌레몬이 그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화해시키려고 애쓴 것입니다.
4. 우리의 갈 길은?
(1) 화해의 일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화해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했다면, 또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자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2) 이 세상에서 화해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과 화해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3) 오래 갈등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오랫만에 다시 만나 화해하기에 앞서 느끼는 불안이 적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서로 마주보고 나아가 서로에게 은혜를 구하고 베푸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다시 만나 화해한 뒤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잘 의논하여 실천할 수 있습니다.
(4) 생존이 위협받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오히려 생명 보존의 길을 열어 주셔서 서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신뢰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로써 이루어, 마침내는 온 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5) 화해는 지난날 서로가 주고받았던 상처에 대한 기억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지 않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슬기롭게 대화하여 설득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6) 양보와 희생의 수고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 화해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평화의 사도'로 이러한 화해의 길을 계속 가려 한다면, 이전보다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면서 더욱더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며 더욱더 진지하게 우리 스스로를 훈련하는 일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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