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로잔언약
2. 동질성 단위에 대한 심의회
3. 복음과 문화에 대한 심의회
4. 검소한 삶에 대한 심의회
5. 세계 복음화 심의회
6.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심의회
2. 동질성 단위에 대한 심의회
3. 복음과 문화에 대한 심의회
4. 검소한 삶에 대한 심의회
5. 세계 복음화 심의회
6.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대한 심의회
본문내용
양심을 회복하고 우리의 복음주의적 사회 유산을 재발견하게 됨에 따라 일부 우리 형제 자매들이 우리를 흘겨보며 다시 사회적 복음의 이단으로 빠지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한 책임 있는 사회 활동과 진정한 복음을 왜곡시킨 자유주의의 "사회적 복음"은 아주 별개의 것이다. 로잔 합의 사항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인간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개념을 자만심에 가득한 꿈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한다"(LC15).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을 끊으려는 또 다른 이유는 종종 우리 사고 속에서 자라고 있는 이분법이다. 성경은 분명 이것들을 구분한다. 하지만 또한 서로 서로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긴장 속에 각각의 상을 묶으라고 지시한다. 일원론에서 그것을 혼돈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이원론에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 또한 잘못됐다.
(B) 특정 상황과 선물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이 각각에 속해 있다고 단정한다고 해서, 이 두 가지가 독립해서 존재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이 두 가지 기독교인의 의무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적당할 때도 있다.
특정 상황이 요구하는 것과 함께 때때로 복음주의와 사회 활동을 갈라놓기 위한 또 하나의 변명 거리가 있다. 즉, 영적 은사의 분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령이 주신 다른 형태의 목회를 위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원칙을 잘 나타내는 좋은 예가 사도행전 6장이다. 스데반과 빌립은 또한 설교를 맡기도 했지만 이 사회적인 봉사를 하도록 뽑혔다(행6:8-15; 8:5-13). 여전히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어떤 이들은 목회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 활동에 또 다른 이들은 복음 전파 목회직에 부르신다.
(C) 세 가지 종류의 관계
특정 상황과 은사적 부르심이 합법적으로 우리의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 볼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의 토론으로부터 대두된 것은 두 가지가 완전히 합쳐지는 관계는 없었지만 적어도 세 가지의 동등하게 효력을 지니는 관계가 있다.
첫 번째는 사회 활동이 복음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복음 전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듭남을 주시고 이 새로운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 뿐"이라고 썼으며(갈5:6)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약2:18) 요한은 우리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 궁핍한 형제 자매를 도울 때 흘러 넘치리라고 했다(요13:16-18). 로버트 E 스피어는 1900년 복음에 대해 "가는 곳마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창조하는 힘을 심는다"라고 썼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상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 책임은 복음의 결과 이상이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선한 일을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없어서는 안될 구원의 증거다(약2:14-26).
두 번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파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때때로 천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이전에 자비로운 일을 행하셨다. 최근 북쪽 가나에서 바젤 선교사들이 댐을 건설해줌으로써 복음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또 많은 선교사들의 의료적, 농업적, 영양학적, 교육적 일을 함으로써 비슷한 효과를 거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밥을 위한 기독교인" 즉, 오로지 우리가 제공하는 물리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개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뇌물이 아니라 세상으로의 사랑의 다리가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사회 활동은 결과나 목적으로써 복음전파를 따를 뿐만 아니라 다리로써 그것을 앞서가며 또한 동반자로서 복음 전도에 동행한다. 이런 동행자 관계는 분명 예수님의 대중적 사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분은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고쳤다. 그의 사역에서 선포kerygma와 봉사diakonia는 동반자였다. 그의 말씀은 그의 일을 설명했으며 그의 일은 그의 말을 극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똑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책임이 아니며 사회적인 책임은 복음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주와 구세주로 선언하는 것은(복음 전파) 사람들이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죄도 회개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또 옛 것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심지어 그것이 주로 사회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또 사회적 책임은 심지어 그것이 주로 복음적의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복음적인 면을 띠었다고 말하여져 왔다.
(D)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동반자 관계가 평등한 것인가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문제를 즉, 이 둘은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느냐 또는 어느 것이 선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던진다. 로잔 합의 사항은 "희생적인 섬김이라는 교회의 의무에 있어 복음전파가 주된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LC6).
먼저, 복음주의는 어떤 우선권을 가진다. 논리적인 우선권을 얘기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장했듯이) 사회적 활동이 복음 전파의 결과나 목적이라면 복음전파는 그것에 앞서야 한다. 더욱이, 일부 국가에서 사회적인 진보는 편만하는 종교 문화의 방해를 받고 있다. 오로지 복음주의만이 이것을 바꿀 수 있다.
두 번째로 복음주의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의 구원의 복음으로 데리고 올 때, 기독교인들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가 인간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괴로움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을 끊으려는 또 다른 이유는 종종 우리 사고 속에서 자라고 있는 이분법이다. 성경은 분명 이것들을 구분한다. 하지만 또한 서로 서로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긴장 속에 각각의 상을 묶으라고 지시한다. 일원론에서 그것을 혼돈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이원론에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 또한 잘못됐다.
(B) 특정 상황과 선물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이 각각에 속해 있다고 단정한다고 해서, 이 두 가지가 독립해서 존재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이 두 가지 기독교인의 의무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적당할 때도 있다.
특정 상황이 요구하는 것과 함께 때때로 복음주의와 사회 활동을 갈라놓기 위한 또 하나의 변명 거리가 있다. 즉, 영적 은사의 분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성령이 주신 다른 형태의 목회를 위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원칙을 잘 나타내는 좋은 예가 사도행전 6장이다. 스데반과 빌립은 또한 설교를 맡기도 했지만 이 사회적인 봉사를 하도록 뽑혔다(행6:8-15; 8:5-13). 여전히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어떤 이들은 목회로 또 어떤 이들은 사회 활동에 또 다른 이들은 복음 전파 목회직에 부르신다.
(C) 세 가지 종류의 관계
특정 상황과 은사적 부르심이 합법적으로 우리의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을 분리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 볼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의 토론으로부터 대두된 것은 두 가지가 완전히 합쳐지는 관계는 없었지만 적어도 세 가지의 동등하게 효력을 지니는 관계가 있다.
첫 번째는 사회 활동이 복음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복음 전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듭남을 주시고 이 새로운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 뿐"이라고 썼으며(갈5:6)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약2:18) 요한은 우리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 궁핍한 형제 자매를 도울 때 흘러 넘치리라고 했다(요13:16-18). 로버트 E 스피어는 1900년 복음에 대해 "가는 곳마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창조하는 힘을 심는다"라고 썼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상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 책임은 복음의 결과 이상이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선한 일을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이것들은 없어서는 안될 구원의 증거다(약2:14-26).
두 번째로, 사회 활동은 복음 전파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때때로 천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이전에 자비로운 일을 행하셨다. 최근 북쪽 가나에서 바젤 선교사들이 댐을 건설해줌으로써 복음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또 많은 선교사들의 의료적, 농업적, 영양학적, 교육적 일을 함으로써 비슷한 효과를 거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밥을 위한 기독교인" 즉, 오로지 우리가 제공하는 물리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개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뇌물이 아니라 세상으로의 사랑의 다리가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사회 활동은 결과나 목적으로써 복음전파를 따를 뿐만 아니라 다리로써 그것을 앞서가며 또한 동반자로서 복음 전도에 동행한다. 이런 동행자 관계는 분명 예수님의 대중적 사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분은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고쳤다. 그의 사역에서 선포kerygma와 봉사diakonia는 동반자였다. 그의 말씀은 그의 일을 설명했으며 그의 일은 그의 말을 극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똑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는 사회적인 책임이 아니며 사회적인 책임은 복음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주와 구세주로 선언하는 것은(복음 전파) 사람들이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죄도 회개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또 옛 것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는 심지어 그것이 주로 사회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또 사회적 책임은 심지어 그것이 주로 복음적의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복음적인 면을 띠었다고 말하여져 왔다.
(D) 어느 것이 먼저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주의와 사회적 책임의 동반자 관계가 평등한 것인가 평등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문제를 즉, 이 둘은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느냐 또는 어느 것이 선행하느냐 하는 문제를 던진다. 로잔 합의 사항은 "희생적인 섬김이라는 교회의 의무에 있어 복음전파가 주된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LC6).
먼저, 복음주의는 어떤 우선권을 가진다. 논리적인 우선권을 얘기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장했듯이) 사회적 활동이 복음 전파의 결과나 목적이라면 복음전파는 그것에 앞서야 한다. 더욱이, 일부 국가에서 사회적인 진보는 편만하는 종교 문화의 방해를 받고 있다. 오로지 복음주의만이 이것을 바꿀 수 있다.
두 번째로 복음주의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의 구원의 복음으로 데리고 올 때, 기독교인들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가 인간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괴로움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