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의 대불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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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2차세계 대전당시 배경

2. 독일군의 대불작전

3. 작전경과

4. 결과

5. 의의

본문내용

를 나타내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제4단계의 공습은 10월 초순부터 말일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독일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주간폭격을 가능한한 피하고 주로 야간공습에 의존하엿다. 이때도 역시 주요 목표는 런던을중심으로 한 도시지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마치 불침전함같이 꿋꿋이 버티고 항쟁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야 말았다. 독일은 그들이 호전적인 침략을 개시해 온 이래 최초로 좌절의 고배를 마셨던 것이다. 영국전투 기간중 양군의 항공기 피해는 독일이 1389대 영국이 790대에 달하였다. 그러면 독일이 대영전투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는 전투기의 성능에 있어서 영국쪽이 우세했다는 점이다. 영구 전투 거의 주요기종인 스피트파이어는 독일의 메서쉬미르에 비하여 속도는 다소 떨어졌지만 회전반경이 작고 상승능력이 뜅어나 기동력에서 앞서 있었으며, 화력 또한 우세했다.
둘째, 영국은 기술적 기습을 달성했다. 즉 레이다시설로 독일군의 공격을 미리 탐지하여 공격측이 장악하게 마련인 선제권을 박탈함으로써 사태를 역전시켰던 것이다.
셋째, 독일은 영국 조종사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영국 조종사들의 용맹성과 노련함, 그리고 불타는 애국심은 독일 조종사들을 능가하여 조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것이다. 처칠이 영국 의회에서 "인류의 전쟁사에 있어서 이처럼 많은 사람이 이처럼 적은 사람에게 이토록 크게 의존한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영국조종사들의 역할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독일은 목표의 원칙을 위배하였다. 독일공군의 최우선목표는 영국의 전투기 사령부를 제압하여 제공권부터 장악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 항구와 선박을 공격하다가, 한때 제대로 비행장에 달려드는가 하더니, 이윽고 런던을 비롯한 도시로 목표를 옮기고 말았다. 결국 독일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목표를 공격했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문제에서도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네 가지 패인 외에 본질적으로 볼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패인은 독일이 전략공군력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일의 군사지도자들은 공군력의 사용이 지상군의 지원임무에 한정되어야 하며, 공군은 독자적 임무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집착했는데, 이는 급강하폭겨기의위력을 과신하게 된데서 기인한다. 즉 폴랜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에서 지상군에 대한 급강하폭격기의 전술지원에 크게 만족하고 고무되어 이러한 편견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대영전투는 폴랜드나 프랑스전역과 달리 일종의 전략적 과제였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제공권 획득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바바롯사 계획>
히틀러는 일찍부터 소련의 광대한 영토와 무진장한 자원을 탐내왔다. 그의 저서 '나의 전쟁'에는 우크라이나의 곡창, 우랄의 지하자원, 코카서스의 유전, 시베리아의 삼림자원 등에 대한 열병과도 같은 욕망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른바 생활권이라는 공상으로 뭉뚱그러지고 있다. 그리고 생활권의 확보를 위해 "동방으로의 돌진"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히틀러는 스탈린과 더불어 불가침조약을 맺은 바 있다. 이는 물론 서부유럽에 대한 공략시 배후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 히틀러의 의도와, 적군을 정비하고 제반 전쟁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얻고자 한 스탈린의 속셈이 투합하여 빚어진 결과였지, 결코 상호간에 화합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스탈린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핀랜드에 침입, 카렐리안 지협을 획득하였으며, 독일군이 프랑스 공략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발틱3국과 루마니아의 벳사라비아 지방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장차 예상되는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한 완충지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기 돌아앉아 킬을 갈고 있던 두 거인은 마주보고 격돌한 찰나에 도달하였다.
그러면 어째서 히틀러는 서부에서의 불길을 채 끄기도 전에 소련을 공격하여 독일이 가장 꺼려온 양면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던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소련을 점령하려 했다는 의도는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사상적인 면에서도 나찌즘과 볼쉐비즘은 견원지간이었고, 실제로 이러한 관계는 니찌즘의 태동 및 성장과정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군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독일인 장차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해공군의 확충이 절대 필요하다는 점이 대영전투에서 드러난 바 있으며, 그러기 위하여는 상대적으로 육군의 비용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당시 소련군의 성장속도로 보아 동부에서의 위협이 증가일로에 있었던 만큼 섣불리 육균의 규모를 감축할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면 소련은 더욱 강대해질 것이고, 영국이 소련을 참전토록 유혹할 경우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시기가 오면 스탈린의 구미가 당기리라는 점 역시 예상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구나 영국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 급속히 전투력을 회복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동부나 서부 어느쪽에든 재빨리 손을 써야만 되었다. 결국 시기적으로 보아 영국은 아직도 본토방어에 여념이 없었고, 프랑스는 전열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서부로부터의 위협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조속한 시일 안에 소련을 굴복시킨다면 양면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1940년 7월 31일 베르흐테스가텐별장에서 군수뇌부와 회합하여 전반적인 추리를 검토한 데 뒤이어, 마침내, 1940년 12월 18일 "지령 제 21호"로서 대소침공에 대한 최초의 정식명령을 하달하였으니 그것이 바바롯사작전계획이다.
바바롯사 계획의 주요내용은 대략 2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국경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소련군의 주공이 내륙으로 철수하여 지연전을 펴지 못하도록 침투와 포위에 의해 조기에 포착궤멸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급속한 진격으로 소련공군이 독일본토에 대한 폭격작전을 할 수 없는 곳까지 점령지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련 침공작전의 종국적인 목표는 볼가강으로부터 카짠을 거쳐 북극해에 연한 아창겔까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공군력으로 우랄 공업지대를 파괴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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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13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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