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쟁 두번째 해
전쟁 세 번째해
전쟁 네 번째 해
전쟁 다섯 번째 해
전쟁 여섯 번째 해
전쟁 20년째 해
전쟁21년째 해
그리스의 全盛과 衰退
전쟁 세 번째해
전쟁 네 번째 해
전쟁 다섯 번째 해
전쟁 여섯 번째 해
전쟁 20년째 해
전쟁21년째 해
그리스의 全盛과 衰退
본문내용
여 군비를 마련하였다. 이번에는 그리스의 여러 국가들이 단결하여 동맹을 형성하였으며, 스파르타는 육군을 동원하여 방위선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481년 봄 페르시아 대군이 많은 함선의 엄호를 받아가면서, 오늘의 다다넬스 해협의 헬레스폰트를 船橋로 건넜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각 민족이 각양 각색의 장비로 편성해 있는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많은 비전투원·종·노예·부인네들·말·낙타 등의 대집단이 그리스로 건너오니 대부분의 그리스의 도시가 굴복하였다. 480년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王이 지휘하는 군대와 충돌하였다. 3백명의 스파르타군은 결사적인 방어 끝에 모두 전사하였다. 이어 아테네市는 페르시아군에 의해 함락된 후 약탈·방화되었다. 한편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앞바다의 섬에 피난하였으나, 살라미스만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대부분의 페르시아 함선이 파괴되고 결국 아테네는 대승을 거두었다. 아테네市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은 서쪽(스파르타)으로 이동해 갔으나 플라타이에 전투에서 패배하였고(479 BC),마침내 페르시아군은 총퇴각하였다. 동방의 강대한 전제세력의 침략에서 그리스가 최종적 승리를 거둔 페르시아 전쟁은 첫째로, 역사상 최초의 동서의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페르시아 전쟁이 결과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일 것이다. 둘째로, 페르시아의 패퇴로서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황금시대, 특히 결정적 역할을 한 아테네의 번영시대가 도래하였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를 통해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트라테고스가 된(476 BC)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다(477 BC). 델로스(Delos)동맹은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전에 공동자금을 비축하였다. 중앙 그리스, 테살리아, 에게해의 여러 도시,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로서 구성된 이 동맹은 연합함대의 조직을 목적으로 하였다. 나중에 델로스 공동자금은 아테네로 옮겼으며(435 BC), 이 자금을 아테네 해군 강화 및 종국적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의 형성에 사용함으로써, 아테네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아테네의 국내 상공업의 발달은 극에 달하고 가내공업과 농업의 분야는 노예의 노동력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아테네는 外港 피라이오스를 축조하고 성벽을 다시 쌓아올렸다. 문화는 번영하여 이른 바 페리클레스 시대가 실현되었다. 파르테논, 테세온 등 신전이 건축되고 제우스像이나 아테네像이 조각되어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 등 극작가들이 나왔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가 번성함에 따라 다른 도시들, 즉 스파르타, 코린트, 메가라, 테베 등도 또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융성은 가장 두드러졌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 반도의 세력균형은 파괴되었다. 특히 아테네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스파르타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의 종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反아테네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양대 진영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육군국과 해군국, 귀족제와 민주제, 농업국과 상업국 사이의 패권다툼이었다. 스파르타는 北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지배에 손을 뻗고 노예의 반란을 부채질 한다는 이유로 아테네를 비난하였다. 경제적으로 볼 때 아테네는 코린트灣을 지배할 야심을 갖고 있었다. 코린트만은 아테네가 시실리섬과 남이탈리아와 통상하기 위한 주요 통로였다. 그것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코린트와 적대관계를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먼저 코린트 및 메가라가 아테네와 전쟁하였고(431 BC), 이 두 나라의 호소로 스파르타가 참전하였다. 테베는 플라타이에를 공격하고 스파르타는 아티카 지방에 침입하였으며, 이후 약 30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은 고대사의 가장 주목할 만한 객관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테네의 무역은 파괴되고 민주제는 전복되고 많은 인구가 전염병으로 감소되었다.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도덕심은 해이해지고 정신적 퇴폐가 생겼다. 아테네는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멜로스의 전 남자시민을 학살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마침내 아테네의 동맹국은 사모스를 제외하고 모두 탈퇴하였고 아테네에 대한 식량보급로가 끊기고 말았다. 코린트의 식민지였던 시라쿠사이(Syracusae) 원정(415∼413 BC)은 패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원정은 실패하고 아테네는 해군병력을 상실하였다. 그후 헬레스폰트 연안의 아이고스포타미 해전(405 BC)에서 스파르타의 공격으로 아테네 함대가 섬멸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무능한 정치가들이 나오고 정치는 중우정(衆愚政)이 되고 말았다. 패전 후 아테네에 가해진 항복 조건은 가혹하였다. 성벽의 파괴, 모든 해외 소유지의 포기, 거의 모든 해군력의 폐기 등 한마디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예속국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지시 아래 아테네 정부는 움직이게 되었으며, 그 밖의 다른 그리스 국가들에 대해서도 스파르타의 괴뢰적인 과두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리하여 전후의 스파르타는 한때 전성을 누렸다.
그러나 전쟁에서 온 후유증과 농업적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스파르타의 좁은 관점 및 군사적 보수주의 등은 동맹국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 사이에 아테네는 재기하고, 테베는 종국적으로 스파르타의 압제를 벗어나 아테네와 동맹을 형성하였다. 그리스 각국간의 반목과 갈등을 틈타서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테베를 도와 反스파르타 세력을 조성하고, 그리스의 세력대립을 부채질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압박에 굴하고 소아시아의 도시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아테네는 낙소스 해전에서 승리하고 테베는 에파미논다스가 팔랑크스隊를 형성하여, 레크트라 전투(371 BC)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당분간 테베의 패권의 시대가 왔으나 테베조차 에파미논다스의 사후에는 쇠퇴하고, 결국 그리스 전체가 쇠퇴한 물적·정신적 여건 속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 "세계사 총론" 차하순
"아테네 민주정치사" 양병우
기원전 481년 봄 페르시아 대군이 많은 함선의 엄호를 받아가면서, 오늘의 다다넬스 해협의 헬레스폰트를 船橋로 건넜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각 민족이 각양 각색의 장비로 편성해 있는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많은 비전투원·종·노예·부인네들·말·낙타 등의 대집단이 그리스로 건너오니 대부분의 그리스의 도시가 굴복하였다. 480년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王이 지휘하는 군대와 충돌하였다. 3백명의 스파르타군은 결사적인 방어 끝에 모두 전사하였다. 이어 아테네市는 페르시아군에 의해 함락된 후 약탈·방화되었다. 한편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 앞바다의 섬에 피난하였으나, 살라미스만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대부분의 페르시아 함선이 파괴되고 결국 아테네는 대승을 거두었다. 아테네市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은 서쪽(스파르타)으로 이동해 갔으나 플라타이에 전투에서 패배하였고(479 BC),마침내 페르시아군은 총퇴각하였다. 동방의 강대한 전제세력의 침략에서 그리스가 최종적 승리를 거둔 페르시아 전쟁은 첫째로, 역사상 최초의 동서의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페르시아 전쟁이 결과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일 것이다. 둘째로, 페르시아의 패퇴로서 그리스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황금시대, 특히 결정적 역할을 한 아테네의 번영시대가 도래하였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를 통해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트라테고스가 된(476 BC)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다(477 BC). 델로스(Delos)동맹은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전에 공동자금을 비축하였다. 중앙 그리스, 테살리아, 에게해의 여러 도시,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로서 구성된 이 동맹은 연합함대의 조직을 목적으로 하였다. 나중에 델로스 공동자금은 아테네로 옮겼으며(435 BC), 이 자금을 아테네 해군 강화 및 종국적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의 형성에 사용함으로써, 아테네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아테네의 국내 상공업의 발달은 극에 달하고 가내공업과 농업의 분야는 노예의 노동력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아테네는 外港 피라이오스를 축조하고 성벽을 다시 쌓아올렸다. 문화는 번영하여 이른 바 페리클레스 시대가 실현되었다. 파르테논, 테세온 등 신전이 건축되고 제우스像이나 아테네像이 조각되어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 등 극작가들이 나왔다.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가 번성함에 따라 다른 도시들, 즉 스파르타, 코린트, 메가라, 테베 등도 또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융성은 가장 두드러졌으며, 그 때문에 그리스 반도의 세력균형은 파괴되었다. 특히 아테네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스파르타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의 종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反아테네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양대 진영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육군국과 해군국, 귀족제와 민주제, 농업국과 상업국 사이의 패권다툼이었다. 스파르타는 北펠로폰네소스 지역의 지배에 손을 뻗고 노예의 반란을 부채질 한다는 이유로 아테네를 비난하였다. 경제적으로 볼 때 아테네는 코린트灣을 지배할 야심을 갖고 있었다. 코린트만은 아테네가 시실리섬과 남이탈리아와 통상하기 위한 주요 통로였다. 그것은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던 코린트와 적대관계를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먼저 코린트 및 메가라가 아테네와 전쟁하였고(431 BC), 이 두 나라의 호소로 스파르타가 참전하였다. 테베는 플라타이에를 공격하고 스파르타는 아티카 지방에 침입하였으며, 이후 약 30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은 고대사의 가장 주목할 만한 객관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테네의 무역은 파괴되고 민주제는 전복되고 많은 인구가 전염병으로 감소되었다. 전쟁이 장기화 됨에 따라 도덕심은 해이해지고 정신적 퇴폐가 생겼다. 아테네는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멜로스의 전 남자시민을 학살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마침내 아테네의 동맹국은 사모스를 제외하고 모두 탈퇴하였고 아테네에 대한 식량보급로가 끊기고 말았다. 코린트의 식민지였던 시라쿠사이(Syracusae) 원정(415∼413 BC)은 패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원정은 실패하고 아테네는 해군병력을 상실하였다. 그후 헬레스폰트 연안의 아이고스포타미 해전(405 BC)에서 스파르타의 공격으로 아테네 함대가 섬멸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무능한 정치가들이 나오고 정치는 중우정(衆愚政)이 되고 말았다. 패전 후 아테네에 가해진 항복 조건은 가혹하였다. 성벽의 파괴, 모든 해외 소유지의 포기, 거의 모든 해군력의 폐기 등 한마디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예속국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의 지시 아래 아테네 정부는 움직이게 되었으며, 그 밖의 다른 그리스 국가들에 대해서도 스파르타의 괴뢰적인 과두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리하여 전후의 스파르타는 한때 전성을 누렸다.
그러나 전쟁에서 온 후유증과 농업적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스파르타의 좁은 관점 및 군사적 보수주의 등은 동맹국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 사이에 아테네는 재기하고, 테베는 종국적으로 스파르타의 압제를 벗어나 아테네와 동맹을 형성하였다. 그리스 각국간의 반목과 갈등을 틈타서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테베를 도와 反스파르타 세력을 조성하고, 그리스의 세력대립을 부채질하였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압박에 굴하고 소아시아의 도시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아테네는 낙소스 해전에서 승리하고 테베는 에파미논다스가 팔랑크스隊를 형성하여, 레크트라 전투(371 BC)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당분간 테베의 패권의 시대가 왔으나 테베조차 에파미논다스의 사후에는 쇠퇴하고, 결국 그리스 전체가 쇠퇴한 물적·정신적 여건 속에 놓이게 되었다.
[참고] "세계사 총론" 차하순
"아테네 민주정치사" 양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