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에서의 예술의 매개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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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예술이 현실에 대해 갖는 관계
2. 1. 죽은 것에의 미메시스
2. 2. 합리적 구성

3. 예술의 지시적 성격
3. 1. 타자의 개념
3. 2. 고통의 경험과 행복의 약속

4. 맺는 말

본문내용

제거함으로써 희생자들에게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결과를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Vgl. NL 423 f.) 이러한 사실은 "휑하게 공허한 눈"속에 잠긴 "비탄" (NL 605)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예술의 태도 자체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예술존재 Kunstsein라는 것이 원래 삶의 진지함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NL 600) 명랑성과 진지성의 양극화 저편에 있는 예술은 그 때문에 단지 화해의 암호일 뿐이며, 그리고 이 제 3의 것은 아직 덮여 있기 때문에, 진보된 예술작품은 무의 형상들을 기술할 뿐이다. (NL 60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단념할 수 없다. 문제는 다만 예술에서 선취되는 유토피아적 상태가, 생산이 자체목적으로 되는 경향을 보이는 야생적인 사회의 현재상태와 반대로, 그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노동강제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향유될 수 있는 상태로 특징지어진다는 데 있다. (Vgl. T 108) 비합리적인 자기보존법칙이 지양되면서도 인류가 더 이상 삶의 궁핍을 겪지 않게 될, 충족된 유토피아에서는 영원한 평화가 지배하는 것이다. (Vgl. MM 207 f.) 다른 한편으로 역사 이전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 행복은 역사적 노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아도르노는 "목표로서 설정된 행복은 합리성의 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을 수단으로 필요로 한다" ( T 429) 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예술이 추구하는 행복의 이념은 예술의 알레고리적 성격과 결부된다. 사회적 실천의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이 그처럼 (기존의) 사회현실을 넘어서 있는 만큼, 예술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에의 약속 또한 그만큼 이행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행복에의 요구와 행복의 좌절 사이에 낀 예술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맹목적인 자연관계 속에 들어있는 삶에 소송을 거는 예술은 무엇보다 극단적인 부정성으로 인해, 포기할 수 없는 행복에의 약속과 어긋나게, 바로 "지금까지 결핍되었기 때문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행복 Desiderat von Gluck"을 실현하는 것과 대립되는 것이다. ( T 504) 그 이유는 아마도 또한, "행복의 수난자"로서의 프루스트의 경우에서처럼, 행복 전체를 요구하는 대신 삶 전체를 포기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Vgl. NL 675) 따라서 예술은 "가상 없는 현재적인 행복,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아닌 허상이라는 치명적인 유보조건을 가진, 행복의 알레고리다." ( T 197)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아도르노에 있어서 행복이 마치 실현된 것으로 짐짓 꾸며댐으로써 행복을 기만하는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을 근거짓는다. "기존의 것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모든 행복은 대용물이고 거짓이기 때문에, 예술은 약속에 충실하기 위해 약속을 깨뜨려야 한다." ( T 461) 그것은 또한 미적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을 근거짓는다. "잘못된 세계에서 누리는 쾌락은 모두 거짓이다. 행복을 위해 행복이 거부된다. 그렇게 하여 예술에서는 욕망 Begehren이 살아남는다." ( T 26) 행복의 완전한 실현이 유토피아적 상태에 유보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삶 속에서 행복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단지 값싼 위안에 불과한 것으로 포기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예술에서 허상에 불과한 행복이 단지 부정적으로만 그리고 굴절되어 나타난다면, 그로부터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와같이 예술에서 행복에의 약속과 행복의 실현 사이에 풀기 어려운 이율배반과 관련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에서의 행복을 (현실 속에서 꿋꿋이) "버티는 느낌 Gefuhl des Standhaltens" ( T 31) 이라고 정의한다. 즉 예술작품을 통해 매개되는 행복은 미적인 쾌락의 향유나 관조적인 만족으로 용해되지 않으며, 오직 잘못된 사회의 힘에 저항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의 자기각성과 『부정 변증법』에서 사유의 자기반성을 각각 결론적으로 이끌어낸 바 있는 아도르노는『미학 이론』에서 현대에 이르러 위기에 처한 예술이 존속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 예술의 자기비판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예술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적 입장은 주술로부터 생겨난 예술 및 문학이 근대 계몽의 역사를 통해 자율적 예술로 발전되고 이에 수반된 예술의 정신화과정이 현대에 와서 물화과정으로 변증법적 전회를 일으켰다는 그의 역사철학적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술의 자율성이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아도르노는 화해되지 못한 삶과 화해에 대한 계몽유토피아적 이념을 서로 매개하는 예술의 기능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도르노는 현실에 대한 예술의 관계를 죽은 것에의 미메시스와 합리적 구성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고찰한다. 그는 겉보기에 대립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상보적 관계에 있는 이 두 측면을 통해 진정한 현대예술의 개념을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그는 현대예술이 퇴행적 미메시스와 물화된 합리성으로 양극화되는 데 반대하여, 반성된 미메시스와 자기반성적인 합리성을 예술의 본질적 요소들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로부터 아도르노 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예술의 지시적 성격, 즉 예술이 역사적 고통의 표현이자 동시에 유토피아적 화해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예술이 지시하는 타자는 예술이전의 타자, 예술외적인 타자,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타자를 모두 포괄하며, 이들은 각각 인류의 전사(前史), 사회 현실, 그리고 유토피아적 세계와 관련된다. 지금까지 비동일자로 억압받고 배제되어 온 타자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리고 유토피아적 화해를 선취함으로써, 현대 이후 위기에 처한 예술과 문학은 다시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된다.
여기서 연구자가 얻은 결론은 부정성을 배경으로 전개된 아도르노의 매개적 사유가 정신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술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점이고, 그의 미학이 부정적 변증법의 측면에서 읽혀져야 하며, 감성과 정신 사이를 매개하는 예술의 기능이 미학내적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중요한 사회적 함의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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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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