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아산 정주영 그는 누구인가?
1.아산 정주영의 일대기
2. 아산의 연대별 기업 활동
1930년대 : 맨 손으로 상경해 쌀장사 시작
1940~1950년대 : 현대의 모태 현대건설 창립
1960년대 : 국가기간사업 기틀 마련
1970년대 : 해외 건설 진출 및 중공업 체제 구축
1980년대 : 사업구조 고도화와 자동차ㆍ반도체의 수출 산업화
1990년대 : 첨단기술 개발 및 구조조정 박차
1998년 이후 : 금강산 관광사업 및 남북교류 활성화
2. 아산의 위기와 위기 탈출 전략
(1)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와 탈출 전략
1)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
2)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 탈출 전략
3. 아산 정주영의 경영철학
Ⅲ. 아산의 경영철학
1. 아산의 생전 일화
2. 아산의 위기와 위기 탈출 전략
3. 아산 정주영의 경영철학
Ⅳ.아산 정주영의 업적 및 평가
1.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의 설립
2.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
3.정주영 못다 이룬 꿈
(1). 매각되는 서산의 꿈
(2). 실패의 쓴 맛을 준 정치실험= 6공화국 말 새로운 인생 실험
(3). 고전하는 금강산 사업
(4). 고로(高爐)사업 진출
4.해외에서 보는 정주영
(1) 홍콩<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 아시아 10대 인물 선정(1999년 11월)
(2) 영국<이코노미스트>지,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1999년 2월)
(3) 홍콩<아시아위크>지 「사업가 명예의 전당」에 선정(1994년 12월)
(4) IOC로부터 올림픽훈장 수여받아(1998년 2월)
Ⅴ. 결 론
Ⅱ. 아산 정주영 그는 누구인가?
1.아산 정주영의 일대기
2. 아산의 연대별 기업 활동
1930년대 : 맨 손으로 상경해 쌀장사 시작
1940~1950년대 : 현대의 모태 현대건설 창립
1960년대 : 국가기간사업 기틀 마련
1970년대 : 해외 건설 진출 및 중공업 체제 구축
1980년대 : 사업구조 고도화와 자동차ㆍ반도체의 수출 산업화
1990년대 : 첨단기술 개발 및 구조조정 박차
1998년 이후 : 금강산 관광사업 및 남북교류 활성화
2. 아산의 위기와 위기 탈출 전략
(1)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와 탈출 전략
1)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
2)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위기 탈출 전략
3. 아산 정주영의 경영철학
Ⅲ. 아산의 경영철학
1. 아산의 생전 일화
2. 아산의 위기와 위기 탈출 전략
3. 아산 정주영의 경영철학
Ⅳ.아산 정주영의 업적 및 평가
1.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의 설립
2.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
3.정주영 못다 이룬 꿈
(1). 매각되는 서산의 꿈
(2). 실패의 쓴 맛을 준 정치실험= 6공화국 말 새로운 인생 실험
(3). 고전하는 금강산 사업
(4). 고로(高爐)사업 진출
4.해외에서 보는 정주영
(1) 홍콩<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 아시아 10대 인물 선정(1999년 11월)
(2) 영국<이코노미스트>지,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1999년 2월)
(3) 홍콩<아시아위크>지 「사업가 명예의 전당」에 선정(1994년 12월)
(4) IOC로부터 올림픽훈장 수여받아(1998년 2월)
Ⅴ. 결 론
본문내용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쓰라린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정치 외도에 나섰다가 정권의 괘씸죄 에 걸려 문민정부 5년 동안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따라서 그는 "눈이 내릴 때는 마당을 쓸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인생신조처럼 사업 확장도 모두 중단한다. 이러한 정치 실험 실패는 그의 건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현대그룹 경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대북 경협 사업에만 관심을 보이게 된다.
(3). 고전하는 금강산 사업
정주영이 말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금강산 사업은 최근 수익성 부재와 '숙부의 난'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현대가 금강산사업 시작 후 5년 동안 계속해서 커다란 적자를 내고 있으며, 최근 KCC가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며 현대그룹을 인수할 경우 금강산 관광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주영이 금강산 관광을 시발로 개성공단 건설 등 북한 프로젝트 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지만 이것이 앞으로 결실을 이룰지는 미지수이다.
(4). 고로(高爐)사업 진출
1997년 10월 현대그룹은 경남 하동에 일관제철소를 착공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이는 2005년에 고로제철소를 완공하겠다는 것. 현대는 당시 현대제철소 건설을 가로막는 정부 뒤에는 포철의 공작이 있다고 주장하며 건설을 강행하겠다고 밝혔었다.
정주영은 공사석에서 "고로사업이 독점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횡포가 지나치다." 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었다. 이는 자동차 중공업 등 철강수요가 많은 현대의 사업구조를 고려해, 직접 고로사업을 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현대제철소 허용 여부는 하동 지역의 환경영향평가가 끝난 다음에나 검토해 볼 문제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끝내 이 꿈을 접어야만 했다.
4.해외에서 보는 정주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25동란 이후 불모지와 같았던 국내 상황 속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해외에서는 이런 정주영을 한국 산업근대화의 주역,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 불가능했던 일을 실현한 사람, 강인한 추진력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지닌 기업인으로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1) 홍콩<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 아시아 10대 인물 선정(1999년 11월)
20세기 말 홍콩의 경제전문 주간지인<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20세기 아시아 10대 인물'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선정했다. 정주영의 선정 이유에 대해 이 잡지는 "정 회장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한국을 막강한 산업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하며 "정주영 신화는 한국 근대사회 성립과 거의 동격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2) 영국<이코노미스트>지,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1999년 2월)
영국의 유력한 경제전문 주간지인<이코노미스트>지는 한국이 외화부족으로 인한 경제위기로 지난 1997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에, 정주영이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기아자동차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불가능은 없다"는 신화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정 회장이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목표달성을 위해 전력투구한다는 점에서 나폴레옹과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3) 홍콩<아시아위크>지 「사업가 명예의 전당」에 선정(1994년 12월)
또 1994년에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경제지인<아시아위크>지에서 아시아 지역 발전에 공헌이 큰 사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제1회 사업가 명예의 전당」을 제정하고, 그 첫 인물로 5명의 기업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 정주영을 제일 먼저 소개했다.<아시아위크>지는 정주영을 첫 번째로 소개한 이유에 대해 "정 회장은 쌀가게 배달 소년에서 한국의 최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4) IOC로부터 올림픽훈장 수여받아(1998년 2월)
정주영은 기업인으로서의 평가 외에도 지난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올림픽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올림픽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정주영은 지난 81년부터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며, 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해 진정한 벤처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벤처정신은 한마디로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척하는 이런 벤처정신이야 말로 인간 정주영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정주영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벤처 사업가였고 누구보다도 벤처정신을 잘 이행해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0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나들었고, 금강산 개발 사업은 정주영 인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사업 또한 안 될 일을 되게 만드는 정주영 특유의 기발함과 추진력, 그의 벤처정신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렇듯 정 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산 증인이자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보통인"으로써는 감히 생각도 못해냈을 그런 일들을 "보통인"으로써 이뤄냈다는 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우리들에게 뭔가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크다. 물론 대통령 출마로 인해 그의 삶에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그의 전체적인 업적을 보았을 때 그것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단지 한 세기를 풍미했던 성공한 사업인 으로만 간주해 버리기엔 그의 업적과 공헌이 너무 다대하기 때문에 그의 경영철학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그를 근본으로 하는 많은 훌륭한 경영인들을 배출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근 모 대학 대학원에서 그의 경영철학을 강의하는 곳도 있다고 하는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선의 방법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흐름이라 보고 싶다.
따라서 그는 "눈이 내릴 때는 마당을 쓸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인생신조처럼 사업 확장도 모두 중단한다. 이러한 정치 실험 실패는 그의 건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현대그룹 경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대북 경협 사업에만 관심을 보이게 된다.
(3). 고전하는 금강산 사업
정주영이 말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금강산 사업은 최근 수익성 부재와 '숙부의 난'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현대가 금강산사업 시작 후 5년 동안 계속해서 커다란 적자를 내고 있으며, 최근 KCC가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하지 않겠다."며 현대그룹을 인수할 경우 금강산 관광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주영이 금강산 관광을 시발로 개성공단 건설 등 북한 프로젝트 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지만 이것이 앞으로 결실을 이룰지는 미지수이다.
(4). 고로(高爐)사업 진출
1997년 10월 현대그룹은 경남 하동에 일관제철소를 착공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이는 2005년에 고로제철소를 완공하겠다는 것. 현대는 당시 현대제철소 건설을 가로막는 정부 뒤에는 포철의 공작이 있다고 주장하며 건설을 강행하겠다고 밝혔었다.
정주영은 공사석에서 "고로사업이 독점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횡포가 지나치다." 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었다. 이는 자동차 중공업 등 철강수요가 많은 현대의 사업구조를 고려해, 직접 고로사업을 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현대제철소 허용 여부는 하동 지역의 환경영향평가가 끝난 다음에나 검토해 볼 문제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끝내 이 꿈을 접어야만 했다.
4.해외에서 보는 정주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25동란 이후 불모지와 같았던 국내 상황 속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해외에서는 이런 정주영을 한국 산업근대화의 주역,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 불가능했던 일을 실현한 사람, 강인한 추진력과 창조적 아이디어를 지닌 기업인으로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1) 홍콩<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誌), 아시아 10대 인물 선정(1999년 11월)
20세기 말 홍콩의 경제전문 주간지인<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20세기 아시아 10대 인물'에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선정했다. 정주영의 선정 이유에 대해 이 잡지는 "정 회장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돼버린 한국을 막강한 산업국가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하며 "정주영 신화는 한국 근대사회 성립과 거의 동격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강조했다.
(2) 영국<이코노미스트>지, "정주영은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1999년 2월)
영국의 유력한 경제전문 주간지인<이코노미스트>지는 한국이 외화부족으로 인한 경제위기로 지난 1997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이후에, 정주영이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기아자동차와 LG반도체를 인수하고,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것에 대해 "불가능은 없다"는 신화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정 회장이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목표달성을 위해 전력투구한다는 점에서 나폴레옹과 매우 흡사하다"고 밝혔다.
(3) 홍콩<아시아위크>지 「사업가 명예의 전당」에 선정(1994년 12월)
또 1994년에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경제지인<아시아위크>지에서 아시아 지역 발전에 공헌이 큰 사업가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제1회 사업가 명예의 전당」을 제정하고, 그 첫 인물로 5명의 기업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 정주영을 제일 먼저 소개했다.<아시아위크>지는 정주영을 첫 번째로 소개한 이유에 대해 "정 회장은 쌀가게 배달 소년에서 한국의 최대 기업을 일군 기업인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4) IOC로부터 올림픽훈장 수여받아(1998년 2월)
정주영은 기업인으로서의 평가 외에도 지난 1998년 2월 일본 나가노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올림픽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올림픽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정주영은 지난 81년부터 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며, 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Ⅴ. 결 론
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해 진정한 벤처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벤처정신은 한마디로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척하는 이런 벤처정신이야 말로 인간 정주영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정주영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벤처 사업가였고 누구보다도 벤처정신을 잘 이행해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0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나들었고, 금강산 개발 사업은 정주영 인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었지만, 이 사업 또한 안 될 일을 되게 만드는 정주영 특유의 기발함과 추진력, 그의 벤처정신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렇듯 정 회장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산 증인이자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보통인"으로써는 감히 생각도 못해냈을 그런 일들을 "보통인"으로써 이뤄냈다는 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우리들에게 뭔가 시사하는 바는 아주 크다. 물론 대통령 출마로 인해 그의 삶에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그의 전체적인 업적을 보았을 때 그것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단지 한 세기를 풍미했던 성공한 사업인 으로만 간주해 버리기엔 그의 업적과 공헌이 너무 다대하기 때문에 그의 경영철학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그를 근본으로 하는 많은 훌륭한 경영인들을 배출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근 모 대학 대학원에서 그의 경영철학을 강의하는 곳도 있다고 하는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선의 방법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좋은 흐름이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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