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2.12 총선, 선거혁명을 이루다
2. 권인숙과 박종철
3.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4. 6월 시민항쟁 그 후....
5. 인물로 보는 6월 항쟁
6. 당시의 언론보도
7. 문서로 보는 6월 항쟁
2. 권인숙과 박종철
3.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4. 6월 시민항쟁 그 후....
5. 인물로 보는 6월 항쟁
6. 당시의 언론보도
7. 문서로 보는 6월 항쟁
본문내용
리 아저씨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도처에서 일어난 민중의 저항 속
에서, 당시 서울대 인류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종철열사가 경찰의 고
문이 시작된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탁치자 억하고... 목숨을 읽고
말았 다. 그네들 말대로라면 말이다. 이 사건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개무시 하고 4,13 호헌조치를 취한 빛나리 아저씨 정권에 대해 그간의
반발심을 못내 속으로만 간직해오던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결국
6.29라는 선언 나름대로의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이한열 (당시 22세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릴정도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전체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사건 현장은 연세대학교 교문 바로 안쪽이었고, 쓰러진 이한열 씨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이로부터 한달동안 혼수상태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1987년 봄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처음 경찰의 발표는 취조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억"하고 쓰러져 죽었다.)은 박종철 씨가 운동권학생이 아닌, 단지 운동권 학생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끌려가 친구가 숨은 곳을 대라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전까지는 운동권에 대해 냉담하던 일반 국민들에게도 독재정권( 당시 전두환 대통령임기 마지막 해, 다음해에는 노태우 씨가 대통령후보로 내정돼 있었고 당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노태우씨의 대통령 당선은 확정적인 상황이었다. )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6월 10일부터 박종철씨 사망 100일을 맞아 전국규모의 추모제가 준비되어 있었다.
6월 9일 신촌 연대에 모인 시위대가 전야제를 치루려 하자 경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학교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시위대의 진두에서 사수대( 전경/백골단이 시위대 본대를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시위대의 제일 앞부분에서 전경/백골단을 1차 저지하는 역할 )를 맡고 있던 이한열 씨는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 직격탄( 최루탄은 원래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시 경찰들은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 최루탄 자체를 마치 총 처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을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 어린 청년이 시위현장에서 경찰의 불법 최루탄 발사에 의해 직격탄을 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기사는 전국민의 공분을 이끌어 냈고,
운동권에 대한 지지, 민주화 시위에 대한 동조( 운동권 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시위 참여 - 시위 현장의 "넥타이 부대" 라는 말도 이때 처음 쓰이기 시작 )와 함께, 이후 한달간 계속된 "1987년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그가 혼수상태에서 계속해서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국민에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중요한 예인력으로 작용했던 것에 대해(그가 죽음에 지지 않고 끈질기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 정부는 경찰의 최루탄이 아니라 시위대의 돌에 맞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한열씨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빼내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했고, 시위대는 세브란스 병원을 겹겹이 둘러 싼채 경찰을 저지해야 했다.
당시 독재정권은 공영방송인 KBS MBC 등을 통해 운동권의 폭력성만을 부각시킴으로서 일반 시민들의 운동권에 대한 동조를 저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건에 의해 독재정권이 오히려 더 폭력적이며, 운동권은 그 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저항으로 소극적 의미에서의 물리력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87년 봄의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밀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것이었다면
1987년 6월의 이한열 씨 경우,
대낮에 신촌 한복판에서 나이어린 한 청년이 경찰의 총( 최루탄을 마치 총처럼 사용)을 맞아 죽음에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저 어린 청년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우린 뭘 하고 있었나 ...' 하는 의미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박종철 씨 사건에서 전국민에게 일어난 분노는 이한열 씨 사건에 의해 하나의 행동 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대대적으로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가자 정권도 더이상 전경/백골단의 폭력에 의해서만 시위를 진정시킬 수 없게 되었고, 6월 29일 정부는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주일 뒤 7월 5일, 이한열 씨는 처음 최루탄을 맞고 실려와서 한달간 죽음과 싸우던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한열 씨의 시신은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무대였던 신촌 연세대학교에서의 영결식과 시청앞광장( 이때 시청앞 광장 노제에 모인 인파가 백만명 )에서의 노제를 거쳐, 자신이 자라난 ( 전남 화순 출생, 광주 동산국/동산중/진흥고 ) 광주光州 망월동 묘지 5.18 묘역에 묻혔다. ( 현재의 구 5.18 묘역 )
6. 당시의 언론보도
당시 조선, 동아, 중앙, 한국일보 등 중앙 일간지에는 연일 계속되는 투쟁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진실은 축소, 왜곡되었으며 그 폭력성만이 부각될 뿐이었다. 하지만 6월을 기점으로 폭발하는 민중의 외침은 더 이상 외면될 수 없었고, 점차 보수언론들마저도 정권의 폭력성을, 시위대의 진실을 보도해낼 수 밖에 없었다.
6 10대회는 불법집회(1987, 6, 9 조선일보) 욕조에 두차례 머리 밀어넣어 '끝내 모른다' (1987, 1, 20중앙일보)
(1987, 1, 19 중앙일보)
7. 문서로 보는 6월 항쟁
난국타개를 위한 우리의 결의 고문 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김영삼)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 평화 위원회)
<참고자료>
http://guno.pe.kr/03classdata/classdata9_10.htm
http://my.netian,com/%7Edmss/junll.html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04
http://ww.610.or.kr
에서, 당시 서울대 인류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종철열사가 경찰의 고
문이 시작된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탁치자 억하고... 목숨을 읽고
말았 다. 그네들 말대로라면 말이다. 이 사건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개무시 하고 4,13 호헌조치를 취한 빛나리 아저씨 정권에 대해 그간의
반발심을 못내 속으로만 간직해오던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결국
6.29라는 선언 나름대로의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이한열 (당시 22세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릴정도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전체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사건 현장은 연세대학교 교문 바로 안쪽이었고, 쓰러진 이한열 씨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이로부터 한달동안 혼수상태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1987년 봄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처음 경찰의 발표는 취조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억"하고 쓰러져 죽었다.)은 박종철 씨가 운동권학생이 아닌, 단지 운동권 학생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끌려가 친구가 숨은 곳을 대라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전까지는 운동권에 대해 냉담하던 일반 국민들에게도 독재정권( 당시 전두환 대통령임기 마지막 해, 다음해에는 노태우 씨가 대통령후보로 내정돼 있었고 당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노태우씨의 대통령 당선은 확정적인 상황이었다. )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6월 10일부터 박종철씨 사망 100일을 맞아 전국규모의 추모제가 준비되어 있었다.
6월 9일 신촌 연대에 모인 시위대가 전야제를 치루려 하자 경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학교 안으로 밀고 들어왔고, 시위대의 진두에서 사수대( 전경/백골단이 시위대 본대를 직접 공격하지 못하도록 시위대의 제일 앞부분에서 전경/백골단을 1차 저지하는 역할 )를 맡고 있던 이한열 씨는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 직격탄( 최루탄은 원래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시 경찰들은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서 최루탄 자체를 마치 총 처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을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 어린 청년이 시위현장에서 경찰의 불법 최루탄 발사에 의해 직격탄을 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기사는 전국민의 공분을 이끌어 냈고,
운동권에 대한 지지, 민주화 시위에 대한 동조( 운동권 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시위 참여 - 시위 현장의 "넥타이 부대" 라는 말도 이때 처음 쓰이기 시작 )와 함께, 이후 한달간 계속된 "1987년 6월 항쟁" 전체를 관통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그가 혼수상태에서 계속해서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국민에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중요한 예인력으로 작용했던 것에 대해(그가 죽음에 지지 않고 끈질기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 정부는 경찰의 최루탄이 아니라 시위대의 돌에 맞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한열씨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빼내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했고, 시위대는 세브란스 병원을 겹겹이 둘러 싼채 경찰을 저지해야 했다.
당시 독재정권은 공영방송인 KBS MBC 등을 통해 운동권의 폭력성만을 부각시킴으로서 일반 시민들의 운동권에 대한 동조를 저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건에 의해 독재정권이 오히려 더 폭력적이며, 운동권은 그 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저항으로 소극적 의미에서의 물리력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87년 봄의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밀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것이었다면
1987년 6월의 이한열 씨 경우,
대낮에 신촌 한복판에서 나이어린 한 청년이 경찰의 총( 최루탄을 마치 총처럼 사용)을 맞아 죽음에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저 어린 청년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우린 뭘 하고 있었나 ...' 하는 의미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박종철 씨 사건에서 전국민에게 일어난 분노는 이한열 씨 사건에 의해 하나의 행동 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대대적으로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가자 정권도 더이상 전경/백골단의 폭력에 의해서만 시위를 진정시킬 수 없게 되었고, 6월 29일 정부는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일주일 뒤 7월 5일, 이한열 씨는 처음 최루탄을 맞고 실려와서 한달간 죽음과 싸우던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한열 씨의 시신은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무대였던 신촌 연세대학교에서의 영결식과 시청앞광장( 이때 시청앞 광장 노제에 모인 인파가 백만명 )에서의 노제를 거쳐, 자신이 자라난 ( 전남 화순 출생, 광주 동산국/동산중/진흥고 ) 광주光州 망월동 묘지 5.18 묘역에 묻혔다. ( 현재의 구 5.18 묘역 )
6. 당시의 언론보도
당시 조선, 동아, 중앙, 한국일보 등 중앙 일간지에는 연일 계속되는 투쟁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진실은 축소, 왜곡되었으며 그 폭력성만이 부각될 뿐이었다. 하지만 6월을 기점으로 폭발하는 민중의 외침은 더 이상 외면될 수 없었고, 점차 보수언론들마저도 정권의 폭력성을, 시위대의 진실을 보도해낼 수 밖에 없었다.
6 10대회는 불법집회(1987, 6, 9 조선일보) 욕조에 두차례 머리 밀어넣어 '끝내 모른다' (1987, 1, 20중앙일보)
(1987, 1, 19 중앙일보)
7. 문서로 보는 6월 항쟁
난국타개를 위한 우리의 결의 고문 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김영삼)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 평화 위원회)
<참고자료>
http://guno.pe.kr/03classdata/classdata9_10.htm
http://my.netian,com/%7Edmss/junll.html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04
http://ww.610.or.kr
추천자료
박정희 시대가 남긴 부정적 유산
NGO 와 정부간의 올바른 관계 정립 방안
미얀마의 민주화 이행과정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정부의 비교 고찰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인권침해와 인권보호
시민운동과 경실련
정책과정상의 참여자와 갈등 - 한약조제권 분쟁 과정
20세기 한국 현대사 고찰
시민사회의 다양한 얼굴
[한국정치와 정치교육] 제6공화국
YS와 DJ의 역사 속 리더쉽[김영삼, 김대중 정부 조사]
학생운동사 (대학설립 초기의 학생활동과 학생운동, 대학 자율화와 민주화 운동의 전개, 대학...
시민사회와 정컸력,한국 민주주의 공고화,한국의 정치민주주의,시민사회의 역할과 한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