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고려(高麗)와 호족통합(豪族統合)
2)국자감(國子監)과 십이공도(十二公徒)
3)벽란도(碧瀾渡)와 국제교역
4)대몽항쟁(對蒙抗爭)과 삼별초(三別抄)
5)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2)국자감(國子監)과 십이공도(十二公徒)
3)벽란도(碧瀾渡)와 국제교역
4)대몽항쟁(對蒙抗爭)과 삼별초(三別抄)
5)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본문내용
에는 모두 1,010부에 4,700여 권의 저술이 실려 있는데, 당·송·요 뿐 아니라, 원효(元曉) 등 신라 고승들의 저술도 181부가 수록되어 있다.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 목록에 따라 선종 8년(1091)경부터 하나하나 간행하였다. 숙종 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속장경은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때, 흥왕사가 불타면서 4천권이 넘는 판본(板本)도 함께 소실(燒失)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된 후에 부처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겠다는 소망 하에 조성되었다. 대몽항쟁의 와중에서 대장경의 조판이 착수된 것은 고종 23년(1236)의 일이었다. 대장경의 조판을 알리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의하면, 몽고의 잔인과 암매(暗昧)를 불천(佛天)에 호소하면서 그로 인해 분멸(焚滅)된 부인사 대장경에 가름하여 가시 각성(刻成)할 터이니, 신통력을 발휘하여 몽병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가가 평안하게 해 줄 것을 군신의 소망으로서 간구하고 있다.
대장경의 조판작업이 시작되면서 즉시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이어서 진주의 남해(南海)에도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두어 일을 추진해 나갔다. 고려의 구본(舊本)을 위시해서 북송본(北宋本)·거란본 등 제장경(諸藏經)을 수집하여 수기(守其)의 주도 아래 편집 교정하였다. 고종 25년부터 경판(經板)이 조출(雕出)되기 시작하였고, 고종 34년에 이르러서는 각판작업(刻板作業)이 일단락되었다. 그후 경판들은 강화도에 모아져 정리를 마친 다음, 고종 38년(1251) 9월에 왕과 백관이 대장경 판당(板堂)에서 행향(行香)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모두 5,111종 6,805권으로 총 경판수 81,137매(枚)에 이른다. 처음 대장경판당에 안치되었던 대장경은 그 뒤 같은 강화도내의 선원사(禪源寺)로 이안(移安)된 듯하며, 이후 조선조 태조 7년을 전후해 서울을 거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원장(原藏)과 달리 보판(補板)으로 일컬어지는 종경록(宗鏡錄) 등 15종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각판과 같은 시기에 분사대장도감에서 만든 것이지만, 일부는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포함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은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거국적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집권자 최이(崔怡)의 주도 아래 착수 진행되고, 그 아들인 최항(崔沆)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최우와 최항은 사재(私財)를 시납함으로써 이 사업을 지원하였다. 최씨정권이 사재를 바쳐 대장경을 조판해 낸다는 사실은 분사대장도감이 진주지방에 설치된다는 점을 통해 보다 확실해진다. 진주는 최충헌의 식읍이 설정되었으며, 최우 때에는 진주의 녹전(祿轉)·세포(稅布)·요공(貢) 일체가 그에게 직납하였다. 진주 지방에 분사대장도감이 설치됨으로써, 최씨정권은 소요되는 막대한 재력과 노동력을 비교적 용이하게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장경의 조판에는 불교계도 실로 엄청난 정력을 기울였다. 여러 불교경전을 수집하고, 이를 편집 교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 교정의 총책임을 맡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을 남긴 이는 수기인데, 그는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으로서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뒤에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에 이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경의 조판에는 화엄종을 주축으로 한 교종측의 적극적인 관심과 역량(力量)이 크게 발휘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세계 불교문화사상 유례가 없는 큰 보배로 대장경의 조판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불교가 지니는 수준과 저력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대장경 경판에 각인(刻印)된 인명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경판의 조성 사업에는 왕족 귀족 관인층은 물론 아래로 지방군현민도 다수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판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장경판의 조성을 위한 문필활동과 경판 판각행위의 몸보시, 혹은 경판조성에 따른 경비조달의 재보시를 포함한 일체의 '각성활동(刻成活動)'을 두드러지게 한 자들로 보인다. 전직관료를 위시한 품관층과 진사·동정적 소유자 그리고 향리층들의 '재향세력(在鄕勢力)'들도 많이 참여했다. 결국 대장경판의 조성사업은 비록 강화도의 최씨정권의 기획과 의도 하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다양한 계층들의 자발적 참여로 결실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적지 않은 문인지식층이 민족적 수난 극복을 위한 현실참여의 한 형태로서 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 동참하였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팔만대장경의 조성은 대몽항쟁기간에 불력에 의한 외침 격퇴를 염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씨정권이 주도하였지만 지방세력·문화지식층 등 폭넓은 층이 참여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대장경에는 당시 고려 불교계의 경전에 대한 높은 이해가 응축되어 있다.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거의 없으며, 수록된 경전이 풍부하고, 글자체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우리의 높은 불교문화의 수준을 나타내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출전
『高麗史』
『大覺國師文集』
『東國李相國集』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徐首生, 「大藏經의 二重板과 補遺板 硏究」 『東洋文化硏究』4, 1977, 경북대
閔賢九, 「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 『韓國學論叢』1, 1978
朴相國, 「海印寺 大藏經板에 대한 再考察」 『韓國學報』33, 1983
金潤坤, 「高麗大藏經의 彫成機構와 刻手의 性分」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念論文), 1990
文暻鉉, 「高麗大藏經 雕造의 史的 考察」 『佛敎와 歷史』(李箕永博士古稀紀念論叢), 1991
金潤坤, 「『고려대장경』의 각판과 국자감시 출신」 『國史館論叢』46, 1993
崔永好, 「華嚴宗系列 승려의 『江華京板 高麗大藏經』 각성사업 참여」 『釜山史學』29, 1995
자료출처:http://uniweb.unitel.co.kr:8083/class/history/lesson/4/4-25-1.html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 목록에 따라 선종 8년(1091)경부터 하나하나 간행하였다. 숙종 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속장경은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때, 흥왕사가 불타면서 4천권이 넘는 판본(板本)도 함께 소실(燒失)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된 후에 부처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겠다는 소망 하에 조성되었다. 대몽항쟁의 와중에서 대장경의 조판이 착수된 것은 고종 23년(1236)의 일이었다. 대장경의 조판을 알리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의하면, 몽고의 잔인과 암매(暗昧)를 불천(佛天)에 호소하면서 그로 인해 분멸(焚滅)된 부인사 대장경에 가름하여 가시 각성(刻成)할 터이니, 신통력을 발휘하여 몽병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가가 평안하게 해 줄 것을 군신의 소망으로서 간구하고 있다.
대장경의 조판작업이 시작되면서 즉시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이어서 진주의 남해(南海)에도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을 두어 일을 추진해 나갔다. 고려의 구본(舊本)을 위시해서 북송본(北宋本)·거란본 등 제장경(諸藏經)을 수집하여 수기(守其)의 주도 아래 편집 교정하였다. 고종 25년부터 경판(經板)이 조출(雕出)되기 시작하였고, 고종 34년에 이르러서는 각판작업(刻板作業)이 일단락되었다. 그후 경판들은 강화도에 모아져 정리를 마친 다음, 고종 38년(1251) 9월에 왕과 백관이 대장경 판당(板堂)에서 행향(行香)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모두 5,111종 6,805권으로 총 경판수 81,137매(枚)에 이른다. 처음 대장경판당에 안치되었던 대장경은 그 뒤 같은 강화도내의 선원사(禪源寺)로 이안(移安)된 듯하며, 이후 조선조 태조 7년을 전후해 서울을 거쳐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원장(原藏)과 달리 보판(補板)으로 일컬어지는 종경록(宗鏡錄) 등 15종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각판과 같은 시기에 분사대장도감에서 만든 것이지만, 일부는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포함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은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거국적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집권자 최이(崔怡)의 주도 아래 착수 진행되고, 그 아들인 최항(崔沆)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최우와 최항은 사재(私財)를 시납함으로써 이 사업을 지원하였다. 최씨정권이 사재를 바쳐 대장경을 조판해 낸다는 사실은 분사대장도감이 진주지방에 설치된다는 점을 통해 보다 확실해진다. 진주는 최충헌의 식읍이 설정되었으며, 최우 때에는 진주의 녹전(祿轉)·세포(稅布)·요공(貢) 일체가 그에게 직납하였다. 진주 지방에 분사대장도감이 설치됨으로써, 최씨정권은 소요되는 막대한 재력과 노동력을 비교적 용이하게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장경의 조판에는 불교계도 실로 엄청난 정력을 기울였다. 여러 불교경전을 수집하고, 이를 편집 교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 교정의 총책임을 맡아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을 남긴 이는 수기인데, 그는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으로서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뒤에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에 이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장경의 조판에는 화엄종을 주축으로 한 교종측의 적극적인 관심과 역량(力量)이 크게 발휘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세계 불교문화사상 유례가 없는 큰 보배로 대장경의 조판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불교가 지니는 수준과 저력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대장경 경판에 각인(刻印)된 인명을 분석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경판의 조성 사업에는 왕족 귀족 관인층은 물론 아래로 지방군현민도 다수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판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장경판의 조성을 위한 문필활동과 경판 판각행위의 몸보시, 혹은 경판조성에 따른 경비조달의 재보시를 포함한 일체의 '각성활동(刻成活動)'을 두드러지게 한 자들로 보인다. 전직관료를 위시한 품관층과 진사·동정적 소유자 그리고 향리층들의 '재향세력(在鄕勢力)'들도 많이 참여했다. 결국 대장경판의 조성사업은 비록 강화도의 최씨정권의 기획과 의도 하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당시 다양한 계층들의 자발적 참여로 결실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적지 않은 문인지식층이 민족적 수난 극복을 위한 현실참여의 한 형태로서 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 동참하였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팔만대장경의 조성은 대몽항쟁기간에 불력에 의한 외침 격퇴를 염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씨정권이 주도하였지만 지방세력·문화지식층 등 폭넓은 층이 참여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대장경에는 당시 고려 불교계의 경전에 대한 높은 이해가 응축되어 있다. 오자(誤字)나 탈자(脫字)가 거의 없으며, 수록된 경전이 풍부하고, 글자체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우리의 높은 불교문화의 수준을 나타내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출전
『高麗史』
『大覺國師文集』
『東國李相國集』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徐首生, 「大藏經의 二重板과 補遺板 硏究」 『東洋文化硏究』4, 1977, 경북대
閔賢九, 「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 『韓國學論叢』1, 1978
朴相國, 「海印寺 大藏經板에 대한 再考察」 『韓國學報』33, 1983
金潤坤, 「高麗大藏經의 彫成機構와 刻手의 性分」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念論文), 1990
文暻鉉, 「高麗大藏經 雕造의 史的 考察」 『佛敎와 歷史』(李箕永博士古稀紀念論叢), 1991
金潤坤, 「『고려대장경』의 각판과 국자감시 출신」 『國史館論叢』46, 1993
崔永好, 「華嚴宗系列 승려의 『江華京板 高麗大藏經』 각성사업 참여」 『釜山史學』29, 1995
자료출처:http://uniweb.unitel.co.kr:8083/class/history/lesson/4/4-2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