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드라마 <무인시대>의 기획의도
2. 무신정권표
3. 경대승의 일대기(무인시대 홈페이지 출처)
4. 최근 뉴스나 학자의 의견
5. 참고자료
6. 비판적 의견
2. 무신정권표
3. 경대승의 일대기(무인시대 홈페이지 출처)
4. 최근 뉴스나 학자의 의견
5. 참고자료
6. 비판적 의견
본문내용
의 세력기반의 하나였던 도방도 아울러 폐지되었다.
수안궁주
-명종의 1남2녀중 막내.
-빼어난 미모와 청순한 자태.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의정왕후)를 잃었으며 그 일로 아버지의 연민속에서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가 무신정변으로 즉위하자 궁주로 책봉된다.
-어린 나이에 중서령(관직명)에게 시집을 갔다.
-애첩 명춘이 죽고 외롭던 처지의 명종을 곁에서 위로하며 궐내에서 지냈다. 이 무렵 경대승과 첫 만남을 하였고 연정을 품는다. 동시에 정균의 눈에 띈다. 정균은 수안궁주의 남편이었던 중서령을 압박하여 파혼지경으로 이루게 한 후에 호시탐탐 그녀를 노린다.
-수안궁주는 명종에게 하소연해보지만 정균은 왕을 발 아래로 보던 권신이었다. 수안궁주는 명종의 언질을 받고 경대승에게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하소연한다.
-경대승은 정균과 정중부를 제거한 뒤, 수안궁주는 아버지 명종을 위해 이혼을 하고 경대승과 정략결혼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연정을 품은 경대승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경대승은 그런 수안궁주의 속내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수안궁주는 경대승과 가슴아픈 이별을 하게된다.
6. 비판적 의견
경대승은 백성들을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아니다. 먼저 경대승이 천명한 것이 개혁과는 거리가 먼 복고( 復古 )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은 온건파 무신들과 문신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내놓은 것으로 정작 백성들에게 중요한 지방관의 수탈, 대토지겸병 등의 문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경대승은 자신의 정권이 흔들릴 수 있는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경대승정권 중후반기부터 민란이 터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도방은 개혁도구였으나 후에 변질되었다? 아니다. 도방은 사병조직일 뿐으로 경대승의 수족이 되어 반대세력 탄압에 앞장섰으며 정권 초기부터 경대승의 뒷배를 믿고 약탈, 살상 등을 감행하여 큰 폐단을 끼쳤다. 오히려 도방의 횡포 기록은 후에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도방이 철저히 탄압을 받고 해체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러한 해악에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경대승은 백성에게 폐단을 끼친 자를 제거하였다? 아니다. 우선 경대승은 기록에 나온 것처럼 오광척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죽여버렸으며 허승과 김광립은 사병을 양성하여 일인독재에 걸림돌이 되어 숙청하였고 자신의 반대세력들에겐 무자비한 압박을 가한다. 그 반면 자신의 동조자였던 이광정, 최충렬 같은 자들은 갖가지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나 영달하였고 경대승 자신도 불법행위를 저지른 도방의 일원을 구명해주는 등으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다. 간단히 말해서 경대승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이러한 잔인한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러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혹은 그로 인하여 )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경대승은 청렴했으며 경대승정권은 부패가 없었다? 아니다. 경대승이 부친이 빼앗은 밭을 모두 바쳐 사람들이 청렴함에 탄복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경대승이 청렴했다면 과연 벼슬도 받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수백 명이나 되는 도방 인원들을 양성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도 재물을 되돌리는 등의 ' 연출 '로써 민심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경대승의 불법적인 축재 기록이 나와있지 않은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 듯 싶다. 경대승이 청렴했다고 해도 그것은 한 개인의 깨끗함이지 정권의 깨끗함과는 무관하며 경대승정권의 부패는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경대승이 집권자인만큼 정권의 부정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경대승이 반역렬전에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정치를 잘해서였다? 아니다. 우선 우리는 경대승을 열전에 넣은 자들이 조선 초기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관들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복고의 뜻을 가지고 무신정권체제를 거부한 인물로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문신체제의 복구에 노력을 기울인 자였다. 문신들이 호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무신정권 초기 의종복위운동의 수장이었던 김보당은 그 당시 사가들로 인하여 ' 현자 '로 평가받았고 그 다음으로 무신정권에 대항한 조위총의 행동도 ' 의거 '로 평가되었으며 조위총 그 자신의 기록은 고려사 제신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반백성들이 경대승에게 동조한 것은 무신정변 이후 워낙 혼란이 심해졌기 때문에 그의 복고정책에 동조한 것뿐이다. 또한 경대승이 왕실을 핍박하지 않았으며 일찍 요절함으로 인해 더 이상의 정치적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본다.
경대승정권은 개혁적 정권이었다? 아니다. 만일 정권이 개혁적이라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요구된다. 첫째는 현 정권의 인물 구성원들이 기존 체제의 구성원들과 어느 정도 다른 인물들이어야 하고 둘째는 현 정권의 행동에서 기존 체제를 새로이 뜯어고치려는, 말 그대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경대승정권의 주요 구성원들은 온건파 무신 내지는 옛 체제의 구성원들이었던 문신들이었으며 경대승정권의 행동은 상기하였듯이 전혀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옛 체제로 돌아가려는 복고를 시도하였으며 이전 정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숙청 및 도방정치로써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강권적 행동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본다면 경대승정권은 개혁 정권이 아니라 반대로 보수 반동적인 정권이다.
경대승은 호민관이었다? 아니다. 보았듯이 그도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 여러 가지 불법적인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전까지의 무신정권에 비해서 반대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무신정변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렀던 체제를 되살리려는 모습으로 혼란한 사회에 ' 대안 '을 제시하였다. 비록 경대승의 행동은 실패하였고 그나마 대부분은 엉뚱한 쪽으로 활용이 되었으나( 경대승정권은 최씨 막부체제의 기원이다. ) 경대승의 꿈은 무신정권 후에 등장한 권문세족체제로 불완전하나마 계승되었다. 경대승의 정책을 본다면 대안조차 제시하지 않았던 전 무신정권에 비하면 긍정적이지만 역시 그 목적은 지배체제를 위한 것으로써 민생안정( 초기에만 유지됐지만 )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경대승은 무신정권의 희망과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수안궁주
-명종의 1남2녀중 막내.
-빼어난 미모와 청순한 자태.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의정왕후)를 잃었으며 그 일로 아버지의 연민속에서 총애를 받았다. 아버지가 무신정변으로 즉위하자 궁주로 책봉된다.
-어린 나이에 중서령(관직명)에게 시집을 갔다.
-애첩 명춘이 죽고 외롭던 처지의 명종을 곁에서 위로하며 궐내에서 지냈다. 이 무렵 경대승과 첫 만남을 하였고 연정을 품는다. 동시에 정균의 눈에 띈다. 정균은 수안궁주의 남편이었던 중서령을 압박하여 파혼지경으로 이루게 한 후에 호시탐탐 그녀를 노린다.
-수안궁주는 명종에게 하소연해보지만 정균은 왕을 발 아래로 보던 권신이었다. 수안궁주는 명종의 언질을 받고 경대승에게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하소연한다.
-경대승은 정균과 정중부를 제거한 뒤, 수안궁주는 아버지 명종을 위해 이혼을 하고 경대승과 정략결혼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연정을 품은 경대승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경대승은 그런 수안궁주의 속내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수안궁주는 경대승과 가슴아픈 이별을 하게된다.
6. 비판적 의견
경대승은 백성들을 위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아니다. 먼저 경대승이 천명한 것이 개혁과는 거리가 먼 복고( 復古 )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은 온건파 무신들과 문신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내놓은 것으로 정작 백성들에게 중요한 지방관의 수탈, 대토지겸병 등의 문제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경대승은 자신의 정권이 흔들릴 수 있는 행동은 일체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경대승정권 중후반기부터 민란이 터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도방은 개혁도구였으나 후에 변질되었다? 아니다. 도방은 사병조직일 뿐으로 경대승의 수족이 되어 반대세력 탄압에 앞장섰으며 정권 초기부터 경대승의 뒷배를 믿고 약탈, 살상 등을 감행하여 큰 폐단을 끼쳤다. 오히려 도방의 횡포 기록은 후에 별로 보이지 않는다. 도방이 철저히 탄압을 받고 해체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이러한 해악에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경대승은 백성에게 폐단을 끼친 자를 제거하였다? 아니다. 우선 경대승은 기록에 나온 것처럼 오광척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죽여버렸으며 허승과 김광립은 사병을 양성하여 일인독재에 걸림돌이 되어 숙청하였고 자신의 반대세력들에겐 무자비한 압박을 가한다. 그 반면 자신의 동조자였던 이광정, 최충렬 같은 자들은 갖가지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나 영달하였고 경대승 자신도 불법행위를 저지른 도방의 일원을 구명해주는 등으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다. 간단히 말해서 경대승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이러한 잔인한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러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혹은 그로 인하여 )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경대승은 청렴했으며 경대승정권은 부패가 없었다? 아니다. 경대승이 부친이 빼앗은 밭을 모두 바쳐 사람들이 청렴함에 탄복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경대승이 청렴했다면 과연 벼슬도 받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수백 명이나 되는 도방 인원들을 양성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도 재물을 되돌리는 등의 ' 연출 '로써 민심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경대승의 불법적인 축재 기록이 나와있지 않은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 할 듯 싶다. 경대승이 청렴했다고 해도 그것은 한 개인의 깨끗함이지 정권의 깨끗함과는 무관하며 경대승정권의 부패는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경대승이 집권자인만큼 정권의 부정에 대하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경대승이 반역렬전에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정치를 잘해서였다? 아니다. 우선 우리는 경대승을 열전에 넣은 자들이 조선 초기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관들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복고의 뜻을 가지고 무신정권체제를 거부한 인물로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문신체제의 복구에 노력을 기울인 자였다. 문신들이 호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무신정권 초기 의종복위운동의 수장이었던 김보당은 그 당시 사가들로 인하여 ' 현자 '로 평가받았고 그 다음으로 무신정권에 대항한 조위총의 행동도 ' 의거 '로 평가되었으며 조위총 그 자신의 기록은 고려사 제신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반백성들이 경대승에게 동조한 것은 무신정변 이후 워낙 혼란이 심해졌기 때문에 그의 복고정책에 동조한 것뿐이다. 또한 경대승이 왕실을 핍박하지 않았으며 일찍 요절함으로 인해 더 이상의 정치적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도 한몫을 담당하였다 본다.
경대승정권은 개혁적 정권이었다? 아니다. 만일 정권이 개혁적이라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요구된다. 첫째는 현 정권의 인물 구성원들이 기존 체제의 구성원들과 어느 정도 다른 인물들이어야 하고 둘째는 현 정권의 행동에서 기존 체제를 새로이 뜯어고치려는, 말 그대로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경대승정권의 주요 구성원들은 온건파 무신 내지는 옛 체제의 구성원들이었던 문신들이었으며 경대승정권의 행동은 상기하였듯이 전혀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옛 체제로 돌아가려는 복고를 시도하였으며 이전 정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숙청 및 도방정치로써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강권적 행동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본다면 경대승정권은 개혁 정권이 아니라 반대로 보수 반동적인 정권이다.
경대승은 호민관이었다? 아니다. 보았듯이 그도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 여러 가지 불법적인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이전까지의 무신정권에 비해서 반대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무신정변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렀던 체제를 되살리려는 모습으로 혼란한 사회에 ' 대안 '을 제시하였다. 비록 경대승의 행동은 실패하였고 그나마 대부분은 엉뚱한 쪽으로 활용이 되었으나( 경대승정권은 최씨 막부체제의 기원이다. ) 경대승의 꿈은 무신정권 후에 등장한 권문세족체제로 불완전하나마 계승되었다. 경대승의 정책을 본다면 대안조차 제시하지 않았던 전 무신정권에 비하면 긍정적이지만 역시 그 목적은 지배체제를 위한 것으로써 민생안정( 초기에만 유지됐지만 )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경대승은 무신정권의 희망과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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