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용과 사회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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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삼국의 토속신앙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2. 불교의 전래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3. 불교의 변천에 따른 사회의 변천

Ⅲ. 결론

본문내용

능동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은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어 삼국의 지배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리고 왕이 여래가 아닌 보살이라는 구세보살 사상은 신라의 공인 불교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이 흥미롭다 .불교 공인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이들의 왕비도 각각 출가하여 승니가 되었다. 구세보살 사상은 왕을 절대시하고 완전무결하게 생각하는 북중국의 '왕즉불' 사상과는 달라서 왕은 보살로 간주되어 수도과정에 있게되며 스스로 출가한 보살로서 귀족이나 백성들을 제도하게 된다.
신라의 초전불교는 왕즉불 사상에서 구세보살 사상으로 바뀌면서 귀족들의 반대를 무마하게 되어 공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권 중심의 귀족정치를 성립시키는 면으로 작용하였다.
불교가 수용되어 공인되어가던 시기의 삼국사회는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로의 체제 개편을 단행해가고 있었다. 삼국은 점차 왕권을 강화하면서 정복국가를 성립시켜 갔다. 그러한 국가체제의 정비과정과 불교의 수용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면 불교를 수용하여 공인해 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체제정비를 보다 상세하게 부각시켜 봄으로써 이때를 전후한 한국 고대사회가 변화되는 모습을 이해하기로 하자. .
연맹왕국에서 왕실이 왕권을 강화해 나가면서 귀족국가체제를 성립시켜 나가는 방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현을 정비하면서 지방을 보다 확실하게 장악해가는 것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5부 및 신라 6부의 개편은 이런 면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부'는 본래 성읍국가의 기반을 가졌던 것인데, 연맹왕국 내에 편입되면서 그것의 장은 귀족으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귀족은 '부'에 대한 상당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실은 이들의 지배를 점차 배제시키는 방향에서 부의 개편을 서둘렀을 것이다.
'부' 체제를 개편하는 작업은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지방을 점차로 왕권의 직접적인 통치체제 속에 흡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과의 신속한 연결을 위해 우역을 두고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설치되어 적어도 자급자족의 부락공동체가 무너지고 이전 성읍국가 내지 부 규모의 지역을 연결시키는 확대된 교환경제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지증왕6년에 국내의 주(州), 군(郡), 현(縣)을 정하고 비로소 군주를 두었으며 동 왕 15년에는 소경을 설치하였다. 지증왕대에서부터 신라국가는 서울과 지방을 확고하게 장악해가는 중앙집권체제로의 개편을 단행해 갔다. 군주는 지방 행정조직이 갖추어져가는 과정에서 주의 장관으로서 군사적 임무를 지닌 군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군사조직의 정비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방이 중앙왕실의 통치질서 속에 편입되는 과정이 군사조직의 정비와 병행되고 있는 셈이다. 법흥왕 4년에 설치된 병부는 그동안 추구해온 군사조직이 거의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해준다.
불교공인 이후 진흥왕대 전륜성왕 사상과 연관된 화랑도의 개창은 넓게는 귀족연합이요, 좁게는 가문별로 흩어진 군사력을 중앙으로 통합해 가려는 체제정비가 마무리 되어감을 뜻해 준다.
불교가 공인되는 시기에 삼국이 모두 체제정비를 마무리짓고 있다. 삼국 각국의 체제정비의 성격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귀족연합체제를 이룩하려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것은 귀족의 각 문호별로 흩어진 군사력을 중앙의 통제 속에 묶으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가 광개토왕 대에 강력한 정복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과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고국원왕대의 실패는 고구려의 군사력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부족별로 흩어져 있어서 그것의 통솔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삼국이 체제를 정비하는 모습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왕실과 귀족의 연합을 의도하는 것이고 그러한 귀족연합 위에 중앙집권적인 군사체제가 확립되어 나갔다. 공인불교가 전륜성왕 관념을 강력하게 표방하면서 군국불교로 성립되는 것은 당시에 행해진 체제정비의 성격과 표리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공인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은 정복국가를 성립시키면서도 일방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면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실 중심의 사상이지만, 다른 귀족세력과의 연합을 의도하는 성격을 지녔다. 구세보살 사상은 '왕즉불' 사상과는 달리 왕법과 불법의 조화인 동시에 왕실과 다른 귀족 사이의 연합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III. 결론
불교는 귀족들과의 타협과정을 거치고 삼국에 수용 공인되면서 중앙집권적 사상토대가 되었다. 국가에 의해 공인된 불교는 국가불교로 나아가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호국불교라는 개념이 이 토대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신라는 왕실이 주도하여 불교를 공인한 이래 국왕이 곧 불교의 수장으로서 석가왕실(釋迦王室)이 환생한 것으로 일치시키기 위해 왕과 왕후의 호칭을 불교식으로 바꾸고 정교일치의 형태를 보였다. 신라 중고기의 왕실에서 전륜성왕사상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했던 것에서도 이 무렵의 정교일치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중대의 왕실에서는 덕이 높은 고승을 국사에 책봉했고 여러 고승을 만나 법문을 청해듣기도 했으며 정치적 자문까지도 구하였다. 따라서 국왕은 고승들로부터 정치적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고승들의 간언(間言)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도 했던 것이다.
통일초기 문무왕은 죽음에 이르러 백제계 승려인 경흥(憬興)을 국사로 삼아야 한다고 유언으로 당부했다. 그러나 신라계의 반발로 국사가 아닌 국로로 봉해졌지만 이를 볼 때 백제출신의 승려인 경흥을 내세워 백제유민을 불교를 이용하여 포섭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고도 보여진다. 이는 비단 백제계뿐만 아니라 고구려계에도 적용되어 정법(正法)에 의해 천하를 통일한 것이라고 종교적인 해석으로 윤색하여 삼국민의 대결구도를 깨고 하나의 나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시대불교신앙연구, 김영태, 불광출판부
신라의 사상과 문화, 김상현, 일지사
한국사 8 삼국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두산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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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2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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