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한국의 정치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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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0년대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시대적 상황)
본 론
정치 상황
1)발췌 개헌안 과 5.26정치 파동
2)정치 혼란과 사회혼란
3)사사 오입 개헌과 장기 집권
4)폭력 정치와 국가 보안법 파동
5)3.15부정 선거 와 김주열의 주검
6)최조 민주 혁명 4.19
결 과
경제 상황

해방후 경제 사정
본 론
결 과
<그 밖의 정치적 중요 회의>

본문내용

선거는 민의원만 뽑았다. 참의원을 뽑으면 자기의 뜻을 밀고 가기 어려워 질것이라 생각해서였다. 이는 이승만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기 위해 헌법을 고칠 작정이었다. 결국 투표후 총 203명의 좌석 가운데 자유당이 114석을 차지하고 무소속의원을 포섭해 결국 개헌에 필요한 136명보다 1명 많은 137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54년 9월 6일 ‘초대 대통령만은 몇 번이고 거듭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개헌안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국민의 여론은 들끓고 야당은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반대 운동을 벌였다. 결국 표결 결과 135명찬성과 60명 반대 7명 기권으로 1명이 모자라 개헌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를 맡은 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하고 이틀후 결과를 뒤집고 헌법 개정안이 통과 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는 203명의 3분지 2는 135.33..인데 소숫점 이하 숫자는 사람으로 1인이 되지 못하므로 인격으로 할 수 없으므로, 사사 오입하면 135명임을 강조하고 개정안 통과를 선포했다. 이로써 국회는 난장판이 됐으나, 어디선가 깡패들이 와서 야당의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국민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이승만의 독재 권력은 날로 기승을 부렸고 자유당 세상이 되어 나라는 날로 어지러워져 갔다. 이후 부정 선거에 맛을 들인 자유당 국회의원들을 두목으로 받드는 ‘정치 깡패’가 생겨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예) 대구매일 신문의 낮 테러사건
정부고관이 대구를 방문했는데 교육자는 높은 사람이 찾아오면 학생을 동원해 마중하는 것이 예사로 알았고 정부도 당연시 여겼다. 그래서 학생들을 총동원해 뙤약볕 아래 3시간이나 세워 두었고, 이를 매일 신문사가 호되게 꾸짖는 글을 실었다. 다음날 자유당 간부들이 찾아와 신문사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사원에게 상처를 입힌 사건이 발생하고 신문사는 경찰에게 보호요청을 했으나 오히려 구경만 할뿐이었다. 경북 경찰국 사찰과장이 ‘대낮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테러가 아니므로 범인들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어둡고 불안한 세상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마침내 한데 뭉쳐,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굳센 각오 아래 새로운 정당, 신익희를 당수로 하는 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로써 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에 민주당과 자유당, 독재와 민주, 경찰과 국민이 대결시대로 접어든다.
4)폭력 정치와 국가 보안법 파동
56년은 3대 대통령과 4대 부통령을 선거하는 해였다. 헌법을 2번이나 뜯어 고친 이승만이 이제 그만 물러나 새로운 참 민주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에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러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있는 자유당은 어떻 해서든 이승만을 다시 당선 시키려고 온갖 조직을 만들고 경찰과 군대 및 주요기관을 손에 넣었다. 자유당은 미국의 원조금을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사용하고 온갖이득을 챙겼다. 국민들이 이를 모를리 없었지만 애초부터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에 장면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발전시키겠다는 등 7가지의 선거 공약을 내걸고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로 전국을 돌며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신익희는 심장 마비를 일으켜 56년 5월 숨을 거두었다. 야당의 후보가 쓰러진 가운데 선거는 예정대로 실시되어 다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되었다. 부통령은 자유당을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 해 8월에 지방의회 선가가 있었는데 자유당은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 국민들을 더 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국에 걸쳐 야당 후보의 입후보등록을 방해하는가 하면 경범죄 등을 뒤집어 쒸워 구속을 일삼았다. 또 민주당 전당대회때 부통령인 장면을 저격하려 했다.
이즘부터 자유당과 경찰의 조종을 받는 이른바 ‘정치 깡패‘ 가 나타나 나라를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부연설명 이기붕
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전 경찰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 다른 간부들을 북한 공산당의 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하고, 진보당을 해체 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결국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 유죄가 판결되 사형이 선고되 국민들은 물론 법조계에도 비판을 일으켰다
이는 진보당세력이 커짐을 느낀 자유당의 음모였고 조작이었다. 한편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마져 침해해 국민들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 가기만 했다. 58년 8월 국가 보안법을 만들었으나 이는 ‘60년 대통령선거를 대비하는 것이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로써 여당과 야당의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 됐는데 결국 자유당이 사복경찰을 동원 야당 의원을 국회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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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6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9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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