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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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전통문화의 개념

Ⅱ.한국 전통 문화의 성격론

Ⅲ. 고대 사회의 신화 및 신앙의 이해

Ⅳ. 고구려 사회와 문화
1.고구려 일반
2.고구려 사회의 특징
3.고구려 문화의 특성

Ⅴ. 백제 사회와 문화
1.백제사 일반
2.문화의 전개
3.일본에 끼친 백제 문화

Ⅵ. 신라의 사회와 문화(1)
1.신라의 일반
2.문화의 전개

Ⅶ. 통일신라의 문화
1.통일 신라사 일반
2.문화의 전개

Ⅷ. 고려 문화(1)
1.고려사 일만
2.문화의 전개
- 불교이념과 성리학 이념 시기의 예제 관념의 차이 -

Ⅸ. 고려 문화(2)
1.유학
2.풍수지리설
3.도교
4.무교

Ⅹ. 조선문화
1. 유교의 기능과 성격
2. 유교적 생활 문화

본문내용

부 수용한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 한 예는 상례로서 분량도 많고 자세하였는데 독립된 상례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 였다.
예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서인과 남인 사 이의 정치적인 정쟁으로 발전하였으니 두차례에 걸친 예송이 그것이다. 이는 당쟁 이 본격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당쟁의 이슈가 예를 따지는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효종 사후 계모인 조씨가 아들을 위해 상복을 1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3년복을 입 어야 하는가를 두고 일어났으며, 15년뒤 효종비가 죽자 역시 계모인 조씨가 며느 리를 위해 상복을 9개월을 입어야 하는가, 1년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재연되었 다. 서인의 예론은 ‘천하동례(天下同禮)’로 모든 사람은 같은 예의 적용을 받는다는 원칙임에 비해, 남인의 예론은 ‘왕자예불동례(天者禮不同士庶)’라 하여 왕의 예는 일 반 사대부나 서민의 예와 같지 않다고 보았다. 전자는 신권을 강화하려는 반면, 후 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결국 효종 사후 서인의 주장(1년복)이 받 아들여졌다. 그러나 15년 뒤 숙종시 효종비가 죽었을 때는 남인의 주장(허목)(1년 복)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이때 15년 전의 경우에까지 소급 적용되어 3년복이 맞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로써 서인(송시열)은 정계에서 일시 실각하게 되었다.(경신 환국). 예송은 예치의 시대에 이데올로기 투쟁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4) 18세기 인물성(人物性) 논쟁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의 문하에서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인성과 물성(동물의 성 )이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논쟁이 시작되어 점차 주변으로 파급되었는데 이간은 동 론을, 한원진은 이론을 주장하였다. 학자의 지역적 분포에 따라 동론을 주장하는 이 를 낙하(洛派 서울), 이론을 주장하는 이를 호파(湖派 호서 충청)라고 하였기에 호 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하였다. 15년간 지속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간의 논지-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근원인 태극으로 말 미암아 생겨났다. 따라서 인간과 사물은 모두 태극으로서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 다. <-사람과 모든 우주만물의 보편적 이치를 추구하려는 자연과학정신이 담긴 이 용후생사상
한원진의 논지-본성(인의예지신)은 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리가 기 가운데 내재한 이후에 생긴 것으로 각기 받은 기가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곧 본성은 인간에게만 있다고 본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고 화이론( 華荑論)으로 연결하여 청을 오랑케로, 조선을 중화로 보려는 대의 명분.
이간은 본성이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것임을 주장하여 본성의 절대화를 기하려는 것이고, 한원진은 본성을 기질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아 동물성으로부터 분 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본성을 존중한다는 데서는 공통된다.
5) 실학의 발흥
조선 후기에 오면서 성리학은 점차 예석, 이기설 등 번쇄한 이론상의 시비를 야기 시키는 한편 조선의 전제적인 통치체제와 결부되어 절대적인 권위주의를 구축하였 을 뿐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과는 점점 멀어져갔다. 이에 여기에 대한 반발로서 일 부 학자들이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문제에 입각하여 고전 유교의 고유한 경세제민 의 이상을 재발견하고 거기서 한국 현실의 적용에 관한 새로운 이론들을 내어 놓았 으니 이를 실학이라고 한다.
실학은,
(1) 형이상학적 사변적 학문에 대한 실용실증주의 제창.
(2) 우주 자연 질서로부터 인간사회 질서를 분리.
(3) 중화주의적 세계관의 부정과 독자적 민족관의 주장.
(4) 사농공상의 신분제에 관한 비판과 새로운 직업관의 형성
등의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실학은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와 굳게 결부된 성리학적 권위주의의 뿌리 깊은 전통은 타파할 수 없었다.
6) 19세기 위정척사론의 제기
19세기에 이르면 주리, 주기설이 극단적으로 유리, 유기로까지 치닫게 되면서 경 색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격변하는 현실 앞에서는 너무 무기력한 것으로 공리 공 론으로 간주된다. 다만 유리론자들 중 기정진, 이항로, 유인석 등이 서양제국주의의 위협과 일본의 침략이라는 현실에 접하여서야 조금이나마 현실에 눈을 돌려 척사론 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는 봉건적 질서의 해체라는 위기의식에서 이를 수호 하기 위한 논리로서 제기된 것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2. 유교적 생활 문화
조선 전기까지 비록 정치적으로는 유교국가가 되었으나 생활 관습의 측면에서는 아직 고려의 유풍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유교적 생활관습이 조선사회에 완전히 정 착되는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교 적 생활 관습은 대개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형성되었던 것이고, 또한 양반 사 대부들의 생활 관습이다.
1) 친가 중심의 족보 편찬
조선전기형 - 고려적인 혈족의식이 크게 반영되어 아들과 딸을 출생순으로 기록 하고, 족보가 편찬될 때까지의 달들의 자손을 기록하며, 서얼 등도 서얼임을 밝혀 수록하였다.
조선후기형 - 아들과 딸을 구분하여 아들 딸 순으로 기재하되, 딸 대신에 사위 이름만을 기재하였고, 또 이들의 자녀 즉 외손은 기록하지 않게 되었으며, 서얼은 족보에서 제외하였다.
2)상속제도의 변화
조선 전기 - 남녀 구별없이 자녀에 대하여 재산을 고르게 나눈다는 원칙이 철저 하게 적용되었다. 또한 노비의 나이, 거주지의 원근, 토지의 비옥도 등도 엄밀히 계산하여 나누어졌다. 제사도 윤회봉사, 분할봉사, 외손봉사도 가능했고, 재산관리 및 상속에서 남녀(부모, 부부) 양쪽의 재산이 철저하게 자기 몫별로 개별 관리한 다.
조선 후기 - 표면적으로 균분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봉사자, 즉 장자를 우 대하였다. 그리고 딸에 대한 차별이 나타나서 사위가 제사에서 제외되었고, 가계 계승과 상속은 아들 그중에서도 장자 중심으로 바뀌어졌다.
3) 가부장적 생활 규범의 강조
남녀의 엄격한 구별 - 남녀칠세부동석, 남존여비, 내외법(內外法); 칠거지악(七 去之惡: 불순부모, 무자, 간음, 질투, 악질, 다언, 절도)과 삼불거(三不去: 칠거지 악이 라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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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24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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