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본론
ⅰ)박완서 (분단, 여성, 우리네 삶에 대한 비판의 소설계의 우람한 거봉)
ⅱ)작품세계분석
ⅲ)『나목』,『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의 작품 분석
Ⅲ. 결론
Ⅱ.본론
ⅰ)박완서 (분단, 여성, 우리네 삶에 대한 비판의 소설계의 우람한 거봉)
ⅱ)작품세계분석
ⅲ)『나목』,『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의 작품 분석
Ⅲ. 결론
본문내용
공동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좌절된다. 6·25가 발발했던 것. 작중 오빠는 한때 사회주의 이념에서 우리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곧 사회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직업인으로 살아간다. 오빠는 사회주의에서 엄마의 만류와 혼란 끝에 결혼과 시골 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을 찾고 전향하지만 6.25 이후 다시 찾아온 감옥에 갇혀있던 사회주의자 동지들과 세상이 바뀐 것에 대한 혼란으로 괴로워하던 중 의용군으로 끌려간다. 그러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오지만 피난을 가려던 중에 도민증을 끊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고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 행적이, 오빠가 경험했던 시행착오의 과정을 당시의 전쟁 주체들은 용인하지 못한다. 남한 정부에서는 좌익으로, 또 북한 정부에서는 변절자로 폭력적으로 규정당하며 정말로 처절하게 죽어간다. 삶의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시행착오의 과정마저 용인하지 않는 양대 세력의 폭력성 앞에 작중화자는 어느 이데올로기도 자신의 내면성이 귀의할 곳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작중화자는 당시의 전쟁을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려는 자’와 ‘표리가 부동한 자’, 그리고 ‘다만 살아남기 위한 자’와 ‘선한 언표 속에 음험한 의도나 권력의지를 숨긴 자’, 아니면 ‘자신의 기억을 소중히 하는 자’와 ‘자신의 확실성을 위해 있던 사실을 쉽게 부정하는 자’간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소수의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려는 자’와 다수의 ‘표리가 부동한 자’의 쟁투이며,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다수의 살아남고자 했던 자’와 소수의 ‘선한 언표 속에 음험한 의도나 권력의지를 숨긴 자’의 대결이다.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하는 체벌은 매우 독특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상대방의 뺨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끼리 때리면 살살 때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 내가 때리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라. 열서너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이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증오심을 무진장 상승시켜가며 꽃 같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도록 사매질을 하는 광경을. 그거야말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도였다. (……) 우리도 별수 없이 이 야만적인 증오심에 씌어 점점 강도가 높게 서로의 뺨을 때렸다. 어느 고비를 지나면 누가 더 아프게 때리나는 별로 문제되지 않고 우리의 그 짓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채찍을 우리의 배후에 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의 그만 소리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증오심은 곧 수치심으로 변해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체벌이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42∼143쪽)
위의 인용은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섬뜩한 알레고리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에 기원이 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배후’로 숨어버리고, 다만 살아남고자 했던 자들끼리 벌였던 전쟁이 곧 한국 전쟁이었다”고. 악한 존재란 자신의 실천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예측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라고 한다면, 그 때문에 이들은 악행 후에도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악행을 가장된 초연, 냉소주의, 증오, 역설적인 즐거움, 공포를 가지고 바라보았던 자들에게 악행은 회복할 수 없는 인간적 파멸을 의미한다.
전쟁 중 악행을 저질렀던 많은 사람은 실은 전쟁 주체들이 내걸었던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 자체를 위협하며 침입하는 위험들을 차단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드러날까봐, 혹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가장 철저한 이데올로그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1940년대에서 50년대까지의 박완서 성장기를 다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개성출신의 뼈대 있는 집안의 어린아이가 교육열에 불타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상경하여 당시 부자들만 들어가는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이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기, 입학 첫해에 6.25가 터져 피난을 가게 되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쓴 자전소설이다.
개성에서의 귀여움 받던 어린시절, 서울 상경하여 가난한 달동네에 사는 서러움, 일제 점령기하의 국가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고통, 친구와의 우정과 경쟁, 6.25의 파괴성, 공산주의에 물든 오빠로 인한 집안풍비박산, 6.25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살아남은 조카와 자신, 어머니의 슬픈 감정 삶의 방식을 다루었다.
Ⅲ. 결론
박완서는 한국인의 삶이 안고 있는 모순의 영역을 철저하고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중 하나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박완서의 문학적 변화가 7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들이 보여준 변화의 본질적 한계와 맞물려 있다는 것, 즉 70년대의 의식적 토양 속에서 받아들인 매우 제한된 범주의 변화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변화의 한계는 이른바 ‘반성하는 중간층’의 의식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면서 동시에 박완서 세대가 겪은 역사적 체험의 축척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완서의 문학의 특성인 ‘상황이나 인물들에 대한 즉각적인 판단을 유도하는 단호하면서도 신랄한 특유의 문체’로 소시민적 삶의 불모성과 허위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소시민적 가정에서 여자들이 부당하게 겪어온 고통 받는 모습들을 소재로 즐겨 다루어온 작품경향으로 볼 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박완서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시민의 모습은 우리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참고문헌
『박완서 문학앨범』-웅진출판, 1992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강인숙, 도서출판 둥지, 1997
『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권영민, 민음사, 1993
『제3세대 한국문학』-박완서, 삼성출판사, 1983
인터넷 : http://munhak.com/md/98spr/7.htm
http://songkw.com.ne.kr/sosul/a149-4.htm
그러나 이 행적이, 오빠가 경험했던 시행착오의 과정을 당시의 전쟁 주체들은 용인하지 못한다. 남한 정부에서는 좌익으로, 또 북한 정부에서는 변절자로 폭력적으로 규정당하며 정말로 처절하게 죽어간다. 삶의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려는 시행착오의 과정마저 용인하지 않는 양대 세력의 폭력성 앞에 작중화자는 어느 이데올로기도 자신의 내면성이 귀의할 곳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작중화자는 당시의 전쟁을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려는 자’와 ‘표리가 부동한 자’, 그리고 ‘다만 살아남기 위한 자’와 ‘선한 언표 속에 음험한 의도나 권력의지를 숨긴 자’, 아니면 ‘자신의 기억을 소중히 하는 자’와 ‘자신의 확실성을 위해 있던 사실을 쉽게 부정하는 자’간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소수의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려는 자’와 다수의 ‘표리가 부동한 자’의 쟁투이며, 또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다수의 살아남고자 했던 자’와 소수의 ‘선한 언표 속에 음험한 의도나 권력의지를 숨긴 자’의 대결이다.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하는 체벌은 매우 독특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 그건 짝끼리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상대방의 뺨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때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끼리 때리면 살살 때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 내가 때리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더 아프게 때리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길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억울해서라도 상대방보다 더 세게 때리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라. 열서너 살밖에 안 된 계집애들이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증오심을 무진장 상승시켜가며 꽃 같은 뺨이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도록 사매질을 하는 광경을. 그거야말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지옥도였다. (……) 우리도 별수 없이 이 야만적인 증오심에 씌어 점점 강도가 높게 서로의 뺨을 때렸다. 어느 고비를 지나면 누가 더 아프게 때리나는 별로 문제되지 않고 우리의 그 짓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비인간적인 채찍을 우리의 배후에 느낄 뿐이었다. 선생님의 그만 소리가 떨어지고 나면 우리의 증오심은 곧 수치심으로 변해 서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체벌이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42∼143쪽)
위의 인용은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섬뜩한 알레고리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전쟁에 기원이 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배후’로 숨어버리고, 다만 살아남고자 했던 자들끼리 벌였던 전쟁이 곧 한국 전쟁이었다”고. 악한 존재란 자신의 실천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예측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라고 한다면, 그 때문에 이들은 악행 후에도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악행을 가장된 초연, 냉소주의, 증오, 역설적인 즐거움, 공포를 가지고 바라보았던 자들에게 악행은 회복할 수 없는 인간적 파멸을 의미한다.
전쟁 중 악행을 저질렀던 많은 사람은 실은 전쟁 주체들이 내걸었던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 자체를 위협하며 침입하는 위험들을 차단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드러날까봐, 혹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가장 철저한 이데올로그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1940년대에서 50년대까지의 박완서 성장기를 다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개성출신의 뼈대 있는 집안의 어린아이가 교육열에 불타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상경하여 당시 부자들만 들어가는 사립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이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기, 입학 첫해에 6.25가 터져 피난을 가게 되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쓴 자전소설이다.
개성에서의 귀여움 받던 어린시절, 서울 상경하여 가난한 달동네에 사는 서러움, 일제 점령기하의 국가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고통, 친구와의 우정과 경쟁, 6.25의 파괴성, 공산주의에 물든 오빠로 인한 집안풍비박산, 6.25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살아남은 조카와 자신, 어머니의 슬픈 감정 삶의 방식을 다루었다.
Ⅲ. 결론
박완서는 한국인의 삶이 안고 있는 모순의 영역을 철저하고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중 하나이다. 이러한 것은 또한 박완서의 문학적 변화가 70년대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들이 보여준 변화의 본질적 한계와 맞물려 있다는 것, 즉 70년대의 의식적 토양 속에서 받아들인 매우 제한된 범주의 변화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변화의 한계는 이른바 ‘반성하는 중간층’의 의식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면서 동시에 박완서 세대가 겪은 역사적 체험의 축척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완서의 문학의 특성인 ‘상황이나 인물들에 대한 즉각적인 판단을 유도하는 단호하면서도 신랄한 특유의 문체’로 소시민적 삶의 불모성과 허위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소시민적 가정에서 여자들이 부당하게 겪어온 고통 받는 모습들을 소재로 즐겨 다루어온 작품경향으로 볼 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박완서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시민의 모습은 우리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참고문헌
『박완서 문학앨범』-웅진출판, 1992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도시와 모성』-강인숙, 도서출판 둥지, 1997
『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권영민, 민음사, 1993
『제3세대 한국문학』-박완서, 삼성출판사, 1983
인터넷 : http://munhak.com/md/98spr/7.htm
http://songkw.com.ne.kr/sosul/a149-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