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머릿말
Ⅱ. 철학자의 어린 시절
Ⅲ. 소크라테스와 니이체
Ⅳ.바울과 니이체
Ⅴ.병상의 니이체
Ⅱ. 철학자의 어린 시절
Ⅲ. 소크라테스와 니이체
Ⅳ.바울과 니이체
Ⅴ.병상의 니이체
본문내용
라고 말한다. 이 작품 저술 후 몇 달만에 그는 미치게 되었고 11년 동안 코카사스 계곡에 포박된 프로메테우스의 후예임을 자처한다. 이러한 오만·과대망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살아가면서 철학을 하는 일이나 철학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성취할 수 없는 속물들의 망상(쇼펜하우어)이 아님을 현시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496a), 파이돈(244d)을 통독하고 가장 대담스러운 해설가로 나타난다. 1)진정한 철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고상한 성격에 소양을 갖춘 자도 유배지(추방)에 억류되어 로빈슨 쿠루소처럼 홀로 지낼 때에 오염된 외부 영향력은 배제된 상태에서 자기 생각에만 헌신하는 사람 2)경멸하고 비천한 도시에서 태어나 그들이 경멸하는 기예(재주)를 버리고 철학 하는 사람 3)운 좋게도 테아게스(Theages)처럼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건강이 나빠서 공적인 일에 참여를 못하는 사람 4)소크라테스의 경우 더 이상 언급이 불필요한 희귀한 사례로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生의 새로운 창조자 대중의 광적 상태를 충분히 알고 세속적 정치에 합류를 거부하며 철학(고독)이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 음미하는 안분지족의 자세이다. 이 단계에서는 고통(병)이 중요하다. 미친 시대 속에 살면서 미친 병(발작)을 두려워한다면 시대의 선각자 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먼저 병들지 않았다면 근본적인 치유도 주장할 수 없다. 니이체의 경우 병이란 데카당스이며 동시에 휴식(안정)을 뜻한다. 그가 자기 병을 먼저 치유할 수 없다면 타인의 병도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연주하고, 연주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잠을 잔다. 셰익스피어, 괴테, 베이컨경의 작품을 읽고 시를 지을 수 있어도 광기 없이는 대시인이 될 수 없다〈파이돈244d〉. 나의 광기와 시는 별개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동시에 미친 것이 아니라 작품구상 이전에 이미 미쳤고 그러한 광기, 독기가 나의 페이지 곳곳에 퍼져있다. 데카당스가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제 나의 뜻을 알겠느냐? 미치지 않고 철학을 한다고? 그것은 장님들에게 저녁노을의 찬가를 들려주는 격이다. 나를 (그저) 사람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사이에 살아왔고 그들이 경험한 저속하고 고상한 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도인들 사이에는 나는 석가모니였고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였고 알렉산더, 시저는 나의 분신이며 마찬가지로 나는 셰익스피어, 베이컨경의 후신이다. 최근에는 나는 볼테르, 나폴레옹, 바그너이기도 하였다. ……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지상에 축제를 올리는 디오니소스로 태어났다. 나의 시간이 많지 않다. 하늘도 내가 여기에 있음을 반긴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도 매달려 있다〈비판총서(편지)Ⅲ15 572f〉. 그렇다면 이 편지는 정신이상의 징후가 아닌가? 사람이 신으로 태어나기 전에 물고기로 태어났다고 외친 그의 조상 엠페도클레스의 말을 반복하고 있음이 아닌가? 발작 직전 그리고 발병이후 니이체가 종종 내세우고 있는 덕은 고독이다. 〈선악의 피안〉에서 그는 고독을 플라톤식 덕의 4중주 가운데 중용과 대치하고 있다.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파스칼의 찬양도 출몰한다. 니이체는 순수한 덕, 바로 이 덕에 매료된다. 도대체 미친 병처럼 고독한 병이 있을까? 이점에서 니이체는 병을 가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독은 정말로 위험스럽다. 니이체 말처럼 당신을 고독에 이끄는 일은 희귀한 분위기, 사막의 선인장의 이슬을 먹고 자란다. 인종의 서식지, 성곽 밖에 사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은 서로 같은 말이기 때문에 후자 없이 전자만 되기 어렵다〈이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니이체는 1888년 가을 〈우상의 여명〉에서 이도 저도 아닌 제3자의 경우가 있으니 동물과 신을 한 몸에 겸비한 철학자가 되는 길이다. 이러한 내용의 포스트 카드를 수신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명할 때쯤 니이체는 정말로 벙어리·동물이 되고 만다. 매우 이성적이어서 대화를 건넬 사람이 없다는 말이나 반대로 너무 비이성적이어서 알 수 없다는 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알맹이는 동일하다. 예수의 심장에 시저의 투구를 쓰고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낭독한 것도 잠시 1889년 1월 이후 동면전·휴전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의 의도를 의심할는지 모른다. 사실 에세 호모를 밤새 외치면서 그는 죽을 각오로 임하였다. 죽으려고 하지 않는 한 내가 이일을 다시 원할까? 이 물음은 이때 아니고 어느 때 의미가 있겠는가? 그가 X-mas, 성탄절 직후 쓰러졌다는 점, 채직에 놀란 말의 뒷발에 채였다는 점, 그리고 난 뒤에도 몇 시간동안 바그너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염라대왕이 그를 포박하여 십 년 동안 서서히 그의 육신을 마모시키려한 점을 시사한다. 대쪽처럼 부수어 질지언정 휠 수 없다는 초인의 지침도, 적시에 때맞추어 죽어야 한다는 그의 사생관도 병상에 매인 육신을 회생시킬 수 없었다. 니이체는 정말로 미친 병을 앓았는가? 그것은 신체마비일까? 정신마비일까? 아니 그 외 다른 것일까? 그가 졸도 직후 찾아온 동료, 피터 가스트(Peter Gast)와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는 니이체가 꾀병을 앓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말하였고 〈우상의 여명(14)〉에서는 심지어 찬양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는 神의 죽음이라는 부고장을 미친 사람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즐거운 학문. 125〉. 왜 니이체는 꾀병을 앓았을까? 만일 그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악취, 인분, 폐수가 흐르는 시궁창·하수구로 단정하였다면 그러한 거친 말에 함구령은 당해 싸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보복전을 액땜하기 위하여 꾀병을 부린 것일까? 마지막 일침을 가하고 파드득거리는 벌처럼 니이체는 한 줄의 일기를 휘갈길 손마디의 여력도 마비된 채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중년의 니이체 저작과 사고, 병상의 신음과 탄성소리의 차이점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가장 생생한 사례가 아닐까? 얼병과 속병의 차이는 평상시 니이체 자신에게 물어 보아도 시원한 답을 얻기가 어렵다. 이때를 알고 미리 토해놓은 말이 걸작이다
살아가면서 철학을 하는 일이나 철학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성취할 수 없는 속물들의 망상(쇼펜하우어)이 아님을 현시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496a), 파이돈(244d)을 통독하고 가장 대담스러운 해설가로 나타난다. 1)진정한 철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고상한 성격에 소양을 갖춘 자도 유배지(추방)에 억류되어 로빈슨 쿠루소처럼 홀로 지낼 때에 오염된 외부 영향력은 배제된 상태에서 자기 생각에만 헌신하는 사람 2)경멸하고 비천한 도시에서 태어나 그들이 경멸하는 기예(재주)를 버리고 철학 하는 사람 3)운 좋게도 테아게스(Theages)처럼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건강이 나빠서 공적인 일에 참여를 못하는 사람 4)소크라테스의 경우 더 이상 언급이 불필요한 희귀한 사례로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生의 새로운 창조자 대중의 광적 상태를 충분히 알고 세속적 정치에 합류를 거부하며 철학(고독)이 얼마나 값진 보물인지 음미하는 안분지족의 자세이다. 이 단계에서는 고통(병)이 중요하다. 미친 시대 속에 살면서 미친 병(발작)을 두려워한다면 시대의 선각자 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먼저 병들지 않았다면 근본적인 치유도 주장할 수 없다. 니이체의 경우 병이란 데카당스이며 동시에 휴식(안정)을 뜻한다. 그가 자기 병을 먼저 치유할 수 없다면 타인의 병도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연주하고, 연주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잠을 잔다. 셰익스피어, 괴테, 베이컨경의 작품을 읽고 시를 지을 수 있어도 광기 없이는 대시인이 될 수 없다〈파이돈244d〉. 나의 광기와 시는 별개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동시에 미친 것이 아니라 작품구상 이전에 이미 미쳤고 그러한 광기, 독기가 나의 페이지 곳곳에 퍼져있다. 데카당스가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거짓말이 필요하다. 이제 나의 뜻을 알겠느냐? 미치지 않고 철학을 한다고? 그것은 장님들에게 저녁노을의 찬가를 들려주는 격이다. 나를 (그저) 사람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사이에 살아왔고 그들이 경험한 저속하고 고상한 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인도인들 사이에는 나는 석가모니였고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였고 알렉산더, 시저는 나의 분신이며 마찬가지로 나는 셰익스피어, 베이컨경의 후신이다. 최근에는 나는 볼테르, 나폴레옹, 바그너이기도 하였다. ……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지상에 축제를 올리는 디오니소스로 태어났다. 나의 시간이 많지 않다. 하늘도 내가 여기에 있음을 반긴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도 매달려 있다〈비판총서(편지)Ⅲ15 572f〉. 그렇다면 이 편지는 정신이상의 징후가 아닌가? 사람이 신으로 태어나기 전에 물고기로 태어났다고 외친 그의 조상 엠페도클레스의 말을 반복하고 있음이 아닌가? 발작 직전 그리고 발병이후 니이체가 종종 내세우고 있는 덕은 고독이다. 〈선악의 피안〉에서 그는 고독을 플라톤식 덕의 4중주 가운데 중용과 대치하고 있다.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파스칼의 찬양도 출몰한다. 니이체는 순수한 덕, 바로 이 덕에 매료된다. 도대체 미친 병처럼 고독한 병이 있을까? 이점에서 니이체는 병을 가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독은 정말로 위험스럽다. 니이체 말처럼 당신을 고독에 이끄는 일은 희귀한 분위기, 사막의 선인장의 이슬을 먹고 자란다. 인종의 서식지, 성곽 밖에 사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은 서로 같은 말이기 때문에 후자 없이 전자만 되기 어렵다〈이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권〉. 니이체는 1888년 가을 〈우상의 여명〉에서 이도 저도 아닌 제3자의 경우가 있으니 동물과 신을 한 몸에 겸비한 철학자가 되는 길이다. 이러한 내용의 포스트 카드를 수신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명할 때쯤 니이체는 정말로 벙어리·동물이 되고 만다. 매우 이성적이어서 대화를 건넬 사람이 없다는 말이나 반대로 너무 비이성적이어서 알 수 없다는 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알맹이는 동일하다. 예수의 심장에 시저의 투구를 쓰고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낭독한 것도 잠시 1889년 1월 이후 동면전·휴전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의 의도를 의심할는지 모른다. 사실 에세 호모를 밤새 외치면서 그는 죽을 각오로 임하였다. 죽으려고 하지 않는 한 내가 이일을 다시 원할까? 이 물음은 이때 아니고 어느 때 의미가 있겠는가? 그가 X-mas, 성탄절 직후 쓰러졌다는 점, 채직에 놀란 말의 뒷발에 채였다는 점, 그리고 난 뒤에도 몇 시간동안 바그너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염라대왕이 그를 포박하여 십 년 동안 서서히 그의 육신을 마모시키려한 점을 시사한다. 대쪽처럼 부수어 질지언정 휠 수 없다는 초인의 지침도, 적시에 때맞추어 죽어야 한다는 그의 사생관도 병상에 매인 육신을 회생시킬 수 없었다. 니이체는 정말로 미친 병을 앓았는가? 그것은 신체마비일까? 정신마비일까? 아니 그 외 다른 것일까? 그가 졸도 직후 찾아온 동료, 피터 가스트(Peter Gast)와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는 니이체가 꾀병을 앓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말하였고 〈우상의 여명(14)〉에서는 심지어 찬양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는 神의 죽음이라는 부고장을 미친 사람에게 들려주지 않았던가〈즐거운 학문. 125〉. 왜 니이체는 꾀병을 앓았을까? 만일 그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악취, 인분, 폐수가 흐르는 시궁창·하수구로 단정하였다면 그러한 거친 말에 함구령은 당해 싸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보복전을 액땜하기 위하여 꾀병을 부린 것일까? 마지막 일침을 가하고 파드득거리는 벌처럼 니이체는 한 줄의 일기를 휘갈길 손마디의 여력도 마비된 채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중년의 니이체 저작과 사고, 병상의 신음과 탄성소리의 차이점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가장 생생한 사례가 아닐까? 얼병과 속병의 차이는 평상시 니이체 자신에게 물어 보아도 시원한 답을 얻기가 어렵다. 이때를 알고 미리 토해놓은 말이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