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토마스 굳윈(Tomas Goodwin, 1600-1680)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
시대순 청교도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토마스 굳윈(Tomas Goodwin, 1600-1680)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
시대순 청교도
본문내용
스도론”,“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억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처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8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정”, “성경의 무오성”,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독특성” 등과 같은 교리들을 전문으로 하는 , 확고하고도 타협을 모르는 칼빈주의자였다.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존 카튼은 1598년에 캠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 갔다. 그리고 엠마누엘 대학의 연구원겸 강사로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논리학, 수사학, 윤리학, 신학, 라틴, 히브리어 등을 공부했다.
카튼은 케임브리지에서 퍼킨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커튼은 리차드 십스를 통해 진정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십스의 설교는 힘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충만해 있었다. 카튼의 성숙에는 다른 청교도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로렌스 체더톤과 함께 공부했다. 존 프레스톤은 카튼의 전도를 받고 회심했다. 그는 굳윈의 친구인 존 다드와 상담을 하기도 헤했다.
특히 카튼에게는 십스의 영향이 컸다. “십스 박사에 대한 카튼의 존경심은 유별난 정도였으며 변함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집안에 잘 보이는 곳에다 그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심지어 그의 설교형태도 십스의 설교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카튼은 1612년 링컨셔주 보스턴시에 있는 성 보톨프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카튼은 초창기에는 분리주의자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카튼은 영국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분열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튼에게 영국교회를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공동기도서를 강제로 집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그와같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사항들이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카튼은 그러한 집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615년 카튼은 폭력적인 저항이나 전적인 굴종의 극단을 피하면서 그는 그의 회중들을 두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한 집단은 카튼이 “계약자”라고 여기는 내적인 집단으로서 영국국교회의 의식을 따르기 거부하는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외적인 집단으로 구별했다.
카튼의 개혁운동은 계속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보스턴에 와서 카튼의 개혁사상을 연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사상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1625년 챨스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카튼의 개혁운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챨스는 성공회 정책을 펴면서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를 아주 싫어하든 윌리엄 라우드를 캔더배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성공회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카튼이 고등종교법원의 소환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32년 라우드의 소환을 받자, 카튼은 뉴잉글랜드로 피신하였다. 그는 1633년에 영국 공안당국의 삼엄한 경계를
1656년에 그는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억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처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8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예정”, “성경의 무오성”,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독특성” 등과 같은 교리들을 전문으로 하는 , 확고하고도 타협을 모르는 칼빈주의자였다.
존 카튼(John Cotton, 1584-1652)
존 카튼은 1598년에 캠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 갔다. 그리고 엠마누엘 대학의 연구원겸 강사로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논리학, 수사학, 윤리학, 신학, 라틴, 히브리어 등을 공부했다.
카튼은 케임브리지에서 퍼킨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커튼은 리차드 십스를 통해 진정한 회심을 하게 되었다. 십스의 설교는 힘이 있었고,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충만해 있었다. 카튼의 성숙에는 다른 청교도들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로렌스 체더톤과 함께 공부했다. 존 프레스톤은 카튼의 전도를 받고 회심했다. 그는 굳윈의 친구인 존 다드와 상담을 하기도 헤했다.
특히 카튼에게는 십스의 영향이 컸다. “십스 박사에 대한 카튼의 존경심은 유별난 정도였으며 변함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집안에 잘 보이는 곳에다 그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심지어 그의 설교형태도 십스의 설교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카튼은 1612년 링컨셔주 보스턴시에 있는 성 보톨프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카튼은 초창기에는 분리주의자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카튼은 영국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분열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튼에게 영국교회를 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공동기도서를 강제로 집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그와같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사항들이 강요되어서는 안되며 카튼은 그러한 집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615년 카튼은 폭력적인 저항이나 전적인 굴종의 극단을 피하면서 그는 그의 회중들을 두 집단으로 구분하였다. 한 집단은 카튼이 “계약자”라고 여기는 내적인 집단으로서 영국국교회의 의식을 따르기 거부하는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외적인 집단으로 구별했다.
카튼의 개혁운동은 계속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보스턴에 와서 카튼의 개혁사상을 연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사상은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1625년 챨스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카튼의 개혁운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챨스는 성공회 정책을 펴면서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그는 청교도를 아주 싫어하든 윌리엄 라우드를 캔더배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성공회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고등종교법원에 소환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청교도 지도자였던 카튼이 고등종교법원의 소환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632년 라우드의 소환을 받자, 카튼은 뉴잉글랜드로 피신하였다. 그는 1633년에 영국 공안당국의 삼엄한 경계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