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Ⅱ-1. 처용의 정체
(1) 배경설화 중심
(2) 처용가 원문 해시 중심
Ⅱ-2. 처용가의 성격
Ⅱ-3. 처용가 연구사
(1) 형성시기를 중심으로 한 연구사
(2) 논의의 쟁점
Ⅲ. 결론
Ⅱ. 본론
Ⅱ-1. 처용의 정체
(1) 배경설화 중심
(2) 처용가 원문 해시 중심
Ⅱ-2. 처용가의 성격
Ⅱ-3. 처용가 연구사
(1) 형성시기를 중심으로 한 연구사
(2) 논의의 쟁점
Ⅲ. 결론
본문내용
의 통일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처용에 관한 삼국유사 문헌자료는 용신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화의 문헌정착이후 정착 과정에 망해사 유래담²이 삽입 조화된 것이라 하였다. 윤영옥은 처용 관계설화가 역사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의식적 산물인 설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 하고 처용은 호국 용신에서 수문신³으로 모습을 바꾸며 역신 퇴치의 구역신으로도 변모하며 또 호국신의 모습과 동시에 생산신의 자태도 나타내 준다고 했다. 처용 관계설화는 병자를 앞에 두고 벌이는 일종의 의무가, 처용신의 신성이 현현하기를 비는 일종의 의식으로도 이해되며 의무신격의 근원을 서사하는 것이기도 하고 처용가는 서사의 핵이 되는 것이지만 처용을 관념적 소산으로 볼 때 후인의 작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황패강은 호불 호국적인 용신 신앙의 입장에서 처용을 호불의 용신으로 보고 처용의 가무가 역신을 내쫓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하며 불심을 얻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상의 학설들은 처용이 어떠한 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처용의 정체가 신이었음을 주장하는 내용들이었다. 다음은 처용을 역사적인 실존의 인물로 보는 견해를 살펴보자.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학자들로는 이용범, 이희수, 김학성 등이 있다. 이용범은 처용의 정체를 밝히는 실마리가 용이라 하고 다시 이 설화 전반의 해석을 <삼국유사>에 보이는 줄거리
¹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 ²헌강왕이 어느 날 울산의 개운포에서 놀다가 경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때 왕이 일관에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고 물었더니 \"동해의 용이 장난을 치는 것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 버려야겠습니다\"고 말해 이후 왕이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라고 지시해 망해사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절은 신방사로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뜻이다. ³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가택신.
를 벗어나 <삼국사기> 및 처용에 대한 여말 문인들의 설명을 빌어 자연인이면서 특수한 용
모의 소유자였던 처용에 부각시키고 이는 필시 당 말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희수는 이재현의 해시¹에서 보여진 처용의 모습이 신라인들에게 보여진 외국상인의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울산 해변가에 지금도 처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는데 처용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며 당시 울산은 경주의 외항이었는데 경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외국 상선들과 상인들이 울산을 거쳤고 그곳에 신라인들이 보기에는 눈과 코가 큰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희수는 당시 동중국해의 중국측 연안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20만 정도 정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들을 페르시아 상인으로 추측했다. 그의 추측은 결국 이 당시 신라인들에게 비춰진 페르시아인들의 모습이 처용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처용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는데 있어 다수의 학자들이 처용이 외국의 상인이었음을 주장하는 데에 반해 김학성은 처용설화가 민담성격의 순수민중설화로 출발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모티브를 수용하면서 복합설화로 변이 정착된 것이며 처용은 설화 형성 당대의 실존 인물이며 강자에게 침해받는 민중의 상징적 인물이라 하면서 처용가는 민요격 시가로 민중의 비극적 현실을 골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처용을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무당으로 본 견해를 살펴보자. 이러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꽤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이상비, 서대석, 최성호, 조동일등의 학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상비는 처용을 동부지방의 남자무당으로 처용처를 바리공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처용가는 열병에 걸려 죽는 바리 공주의 회생을 바라는 가무에 처용의 즉흥적이고 애절한 가사가 더해져 비원의 굿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서대석은 처용을 동해용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무당으로, 역신을 역병을 주는 귀신으로, 간통을 처용의 아내가 역병에 걸린 상태로, 처용의 가무를 치병의례의 주술적 성격으로 다루었다. 그리하며 처용가를 주술무가라 했다. 최성호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처용을 용성국의 변방족이면서 남자무당으로 보았고 처용처는 토착족 무녀 출신의 유녀라하고 역신은 토착족의 남자무당으로서 평소에 처용 처를 흠모하거나 서로 잘 알고 지내왔던 자라 하였다. 조동일은 처용설화를 사람이 신격의 가면을 쓰고 그 신격의 춤을 추는 수단으로 보고 이 굿은 국가적인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거행된 것으로 보았다. 국가적인 재앙이 역신으로 상징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용굿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극으로의 전환을 겪은 연극이 되었는데 신라 때에는 하층민의 연극이 아닌 귀족이 출연자 노릇을 하는 귀족의 연극이 존재했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의 정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였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의 정체 파악은 주로 처용의 신분에 국한 된 것으로 이것만으로 섣불리 처용이 누구였는지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2) 처용가 원문해시 중심
처용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배경설화를 중심으로 한 처
¹이제현의 解屍 - 고려사 악지 속악조
新羅昔日處容翁 옛날 신라의 처용옹은
見說來從碧海中 푸른 바다 가운데서 왔다고 일컬어왔다.
貝齒赤歌夜月 자개 이빨에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했고
鳶肩紫袖舞春風 솔개 어깨에 자주 소매로 봄바람 속에서 춤을 추었다.
용의 신분파악과 더불어 문학작품 처용가 속에 나타난 처용의 풍모에 관한 묘사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처용가의 원문과 이를 현대어로 해석한 몇 몇 학자들의 해시문을 비교해보면서 처용가 속에 나타난 처용의 모습과 학자들간에 처용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원 문 》
(前腔)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大平 羅侯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常)不語시란
以是人生애 相(常)不語시란
(附葉)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
(中葉) 어와 아
¹이상심리 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접촉교섭하여, 이 과정 중에 점복(占卜)예언치병(治病)제의(祭儀)사령(死靈)의 인도(引導) 등을 행하는 주술종교적 직능자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현상. ²헌강왕이 어느 날 울산의 개운포에서 놀다가 경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때 왕이 일관에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고 물었더니 \"동해의 용이 장난을 치는 것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 버려야겠습니다\"고 말해 이후 왕이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라고 지시해 망해사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절은 신방사로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 세운 절이라는 뜻이다. ³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가택신.
를 벗어나 <삼국사기> 및 처용에 대한 여말 문인들의 설명을 빌어 자연인이면서 특수한 용
모의 소유자였던 처용에 부각시키고 이는 필시 당 말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희수는 이재현의 해시¹에서 보여진 처용의 모습이 신라인들에게 보여진 외국상인의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울산 해변가에 지금도 처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는데 처용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며 당시 울산은 경주의 외항이었는데 경주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외국 상선들과 상인들이 울산을 거쳤고 그곳에 신라인들이 보기에는 눈과 코가 큰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희수는 당시 동중국해의 중국측 연안에 페르시아 상인들이 20만 정도 정주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들을 페르시아 상인으로 추측했다. 그의 추측은 결국 이 당시 신라인들에게 비춰진 페르시아인들의 모습이 처용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처용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는데 있어 다수의 학자들이 처용이 외국의 상인이었음을 주장하는 데에 반해 김학성은 처용설화가 민담성격의 순수민중설화로 출발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모티브를 수용하면서 복합설화로 변이 정착된 것이며 처용은 설화 형성 당대의 실존 인물이며 강자에게 침해받는 민중의 상징적 인물이라 하면서 처용가는 민요격 시가로 민중의 비극적 현실을 골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처용을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무당으로 본 견해를 살펴보자. 이러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꽤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이상비, 서대석, 최성호, 조동일등의 학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상비는 처용을 동부지방의 남자무당으로 처용처를 바리공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처용가는 열병에 걸려 죽는 바리 공주의 회생을 바라는 가무에 처용의 즉흥적이고 애절한 가사가 더해져 비원의 굿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서대석은 처용을 동해용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무당으로, 역신을 역병을 주는 귀신으로, 간통을 처용의 아내가 역병에 걸린 상태로, 처용의 가무를 치병의례의 주술적 성격으로 다루었다. 그리하며 처용가를 주술무가라 했다. 최성호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처용을 용성국의 변방족이면서 남자무당으로 보았고 처용처는 토착족 무녀 출신의 유녀라하고 역신은 토착족의 남자무당으로서 평소에 처용 처를 흠모하거나 서로 잘 알고 지내왔던 자라 하였다. 조동일은 처용설화를 사람이 신격의 가면을 쓰고 그 신격의 춤을 추는 수단으로 보고 이 굿은 국가적인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거행된 것으로 보았다. 국가적인 재앙이 역신으로 상징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용굿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극으로의 전환을 겪은 연극이 되었는데 신라 때에는 하층민의 연극이 아닌 귀족이 출연자 노릇을 하는 귀족의 연극이 존재했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의 정체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였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의 정체 파악은 주로 처용의 신분에 국한 된 것으로 이것만으로 섣불리 처용이 누구였는지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2) 처용가 원문해시 중심
처용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배경설화를 중심으로 한 처
¹이제현의 解屍 - 고려사 악지 속악조
新羅昔日處容翁 옛날 신라의 처용옹은
見說來從碧海中 푸른 바다 가운데서 왔다고 일컬어왔다.
貝齒赤歌夜月 자개 이빨에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했고
鳶肩紫袖舞春風 솔개 어깨에 자주 소매로 봄바람 속에서 춤을 추었다.
용의 신분파악과 더불어 문학작품 처용가 속에 나타난 처용의 풍모에 관한 묘사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처용가의 원문과 이를 현대어로 해석한 몇 몇 학자들의 해시문을 비교해보면서 처용가 속에 나타난 처용의 모습과 학자들간에 처용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원 문 》
(前腔) 新羅聖代 昭聖代
天下大平 羅侯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相(常)不語시란
以是人生애 相(常)不語시란
(附葉) 三災八難이 一時消滅샷다
(中葉) 어와 아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