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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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혁명의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II. 본론
1. 19세기 말의 국내외 정세
2. 19세기의 부세 운영
1) 환곡. 2) 조세금납의 문제.
3)도결세의 문제. 4) 제정타개를 위한 민중수탈.
3. 개항 후의 제(諸) 문제
1)화폐유통구조
2)대일 곡물수출에 따른 농민층의 저항
3)변혁 주체의 문제
4. 동학농민혁명의 성격
5. 동학 농민 혁명의 성과
6. 동학 농민 혁명의 역사적 의의
7. 동학 농민 혁명의 교훈

III. 결론

본문내용

전개해 나간 귀중한 경험이었다.
전쟁 자체로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로 하여금 농민층의 요구를 반영한 갑오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데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이 당시 사회에 끼친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농민혁명을 통해 성장한 농민군의 구성원들은 그 뒤에 일어난 반일의병전쟁이나 영학당·활빈당운동 등에도 계속 참가함으로써 반봉건·반침략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민족운동의 최고봉이었으며 한국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즉, 국내적으로는 봉건적 사회질서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주의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민중의 반침략의지를 보여준 反帝전쟁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식민지하 민족해방투쟁의 전개에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7. 동학농민혁명의 敎訓(교훈)
위기에 처한 19세기말 조선의 전국적 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으로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억압에 반대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침략에 반대하여 궐기한 광범한 인민 항쟁이었다. 이처럼 당연한 반란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실패의 원인에는 주체적, 객관적 여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체적 이유]
(1) 동학농민혁명의 전위적 역할을 한 동학당은 진정한 의미의 혁명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쟁의 투철한 목표와 당시 정세에 맞는 강령, 전략, 전술이 서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학당 그 자체가 통일적 지도하에 단결되어 있지 않고 남접, 북접으로 갈려서 그 의견과 주장을 달리 하였다. 전봉준 장군 영도하의 남접은 정치성이 강하고 전투적이었는데 이와 반대로 최시형(崔時亨)교주 영도하의 북접은 교화(敎化)를 위주로 하여 직접행동을 기피하였으며 투쟁에 참가한 이후로는 기회주의적 이었다.
(2) 동학농민혁명은 지도자들은 봉건주의의 폭정에 대해 용감히 싸웠으나 봉건주의 그 자체의 혁명적 지양(止揚)에 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봉건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전복시키는 토지혁명과 민주정권 수립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구호를 내세워야 할 것이다.
(3) 결정적 시각과 장소에 맞게하고 우수한 병력을 집중해야하는데 이 점에서 많은 잘못을 범하였다. 전주성을 평온하게 적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도 잘못이었거니와 강대한 외국군대의 간섭이 오기전에 미리 서둘러 그것을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과오의 하나였다.
(4) 민중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굳게 조직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진영 내부에는 몰락 양반, 의욕을 잃은 엽관(獵官)운동자등의 투기분자가 많이 섞여 있어서 혼란을 일으켰고 특히 정세가 불리하게 보이자 마자 내부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요컨대 충분히 조직적이지 못하였다.
[객관적 이유]
(1) 조선의 발전이 그 당시 매우 침체 낙후하여 그 계급 관계에 있어서 자본가도 노동자도 독립한 계급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농민 혁명의 혁명성을 충분히 지도 원조할 만한 동맹군'이 나서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반봉건적인 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적인 계급세력이 성장할 만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 없었다.
(2) 19세기말에 있어서의 조선을 중심으로 한 열강의 각축이 첨예화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동시에 반동 세력은 이 외국군에 힘을 빌어 내란을 진압하였다. 만일 국내 혁명세력이 충분히 강력하여 우리의 국내 문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였다면 오히려 이 열강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주 독립의 길을 찾을 수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 자체의 굳은 단결과 자율적 역량 없이 친청이니 친일이니 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노예 근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 객관적 제이유로 말미암아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나 봉건주의의 뿌리를 뒤흔든 그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운동은 그 종교적 외피(外皮)에도 불구하고 봉건전제를 반대하는 일대 대중 투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일제하의 3.1운동과 더불어 우리민족 해방사의 있어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사회 경제적 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은 양천제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의 변동이고, 이 신분제의 변동은 양반층의 자기 도태와 농민층의 분해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는 조선 후기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 문제는 곧 봉건 모순으로 귀결되고 그 봉건 모순은 정치 기강의 문란, 경제제도 즉 조세제도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봉건 지배 계급은 외세의 압력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되고 그 개항은 성숙된 자본주의의 물결이 조선에 밀려들어 자생하고 있던 자본주의의 맹아를 허물어 조선의 경제를 파행적 형태로 몰고갔던 것이다.
) 개화는 그 자체의 개념이 하나의 사상 또는 정치사상이라기 보다는 개롸를 위한 사상 또는 개 화를 지향하는 정치사상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 구조는 피지배 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나아가 이들을 중심으로 봉건 지배 계급에 대한 항쟁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에는 많은 농민 항쟁이 일어났고 이 농민 항쟁의 최종적 귀결점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1862년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농민 항쟁이 농민의 의식 성장과 함께 결집되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전환점에서 봉건 모순과 민족 모순을 극복하여 아래로부터 혁명적 방법으로 근대 사회를 수립하려는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 1989.
♠ 노태구 외, [동학혁명의 연구]& 백산서당 && 1982.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 연구 I - 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고민]& 역사비평사 && 1991.
♠ 한우근, [동학군의 폐정개혁안 검토 ,역사학보]& 23호 && 1964.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갑오농민혁명의 쟁점]& 집문 당 && 1994.
♠ 이상식, 外[전남동학농민혁명사]& 전라남도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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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13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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