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Ⅱ. 낙태에 대한 일반적 이해
1. 낙태의 개념정의
2. 낙태의 역사
3. 낙태의 실태
4. 낙태 시술 방법
(1) 월경적출법
(2) 진공 흡출에 의한 제거법(3) 확장과 소파에 의한 제거수술
(5) 약물에 의한 자궁수축 유발법
(6) 자궁절개법
Ⅲ. 낙태에 대한 일반적 논의
1. 태아의 생물학적 발전 단계
2. 생명의 시작
(1) 유전학파(the genetic school)
(2) 발달학파(the development school)
(3) 사회결과학파(the school of social consequences)
3. 낙태에 대한 두 극단적 입장
(1) 보수주의
(2) 자유주의
Ⅳ. 낙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접근
1. 낙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낙태 반대에 대한 성경적 근거
(2) 낙태찬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비판
Ⅴ. 결 론
1. 연구의 동기와 목적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Ⅱ. 낙태에 대한 일반적 이해
1. 낙태의 개념정의
2. 낙태의 역사
3. 낙태의 실태
4. 낙태 시술 방법
(1) 월경적출법
(2) 진공 흡출에 의한 제거법(3) 확장과 소파에 의한 제거수술
(5) 약물에 의한 자궁수축 유발법
(6) 자궁절개법
Ⅲ. 낙태에 대한 일반적 논의
1. 태아의 생물학적 발전 단계
2. 생명의 시작
(1) 유전학파(the genetic school)
(2) 발달학파(the development school)
(3) 사회결과학파(the school of social consequences)
3. 낙태에 대한 두 극단적 입장
(1) 보수주의
(2) 자유주의
Ⅳ. 낙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접근
1. 낙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낙태 반대에 대한 성경적 근거
(2) 낙태찬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비판
Ⅴ. 결 론
본문내용
이라(마1:20)”라고 말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전도서 6:3-5의 낙태된 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낙태된 자기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없다고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 된다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가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이 존엄한 만큼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 또한 존엄한 것이다. 성경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하나님 창조에 뿌리하며 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우연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조심스럽게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존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Ⅴ. 결 론
이제까지 낙태 문제에 대한 일반 윤리학계와 기독교 윤리학적인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낙태에 나타난 생명 경시 풍조, 성 윤리의 부재, 물질 만능주의, 또 이런 사상들은 은연중에 부추기는 구조적 모순은 세계고통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주장과 ‘낙태는 이혼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인 행위일 뿐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서 생명우선론자와 선택우선론자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낙태찬성론자/선택우선론자들도 태아를 해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낙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임산부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낙태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종배,「낙태, 그 시작과 끝」,『낙태』(서울 : 두란노서원, 1990) 19-20쪽 참조.
특히 우리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게 될 경우에는 낙태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경우 기독교인들에게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로, 장애 문제는 삶의 “존엄성”이 아니라 삶의 “질”이며, 심하게 장애가 된 자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종종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과연 누가 이 문제를 결정지을 수 있겠는가? 결국 삶에 대해 질을 부여하고 살 가치가 있도록 해주는 것은 사랑이며, 장애자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인가 베풀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그들의 이웃들인 우리들이다.
바로 장애자들의 삶의 질은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일단 우리가 불구된 유아가 출생 전에 파괴되어야 한다는 점을 수용한다면 왜 출생 후에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심각한 사실은 만약 사회가 미출산 아이가 불구가 될 것이라는 유일한 이유로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새로 태어난 불구 아이들, 자동차 사고로 혼수상태인 사람들, 저능아들, 노쇠한 사람들을 계속 죽여서는 안 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불구자들은 그들의 삶이 ‘무가치’하거나 또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될 때 처분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히틀러의 잔인한 제 3 제국으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구자들은 낙태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 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잘못 될 수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경쟁하려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그들 자신에게 억지고 그 권위를 돌리는 자들은 심각한 오류 어느 의사 두 명이 나눈 다음의 대화는 낙태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낙태에 대해서이데 난 당신의 의견이 필요하오. 그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었고, 그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었소. 태어난 4명의 아이 중 첫째는 눈이 멀었고, 둘째는 죽었고, 셋째는 귀가 멀고 벙어리였고, 넷째는 또한 결핵이었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소.
- 난 임신을 멈추게 했을거요.
-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죽였겠구료.
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성경은 인간 생명의 유일성과 고귀성을 말해준다. 태어나기 전에 태아의 성장과 발달은 물론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다. 잉태된 순간부터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 단계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연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태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잠정인간’이기 때문에 태아의 죽음에다 출생과 사망 때처럼 출생-사망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고 장례식 또는 애곡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낙태를 한다는 것은 사마귀를 제거하는 것 혹은 당신의 손톱을 자르거나 당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과 같지 않다. 누구라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낙태를 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 한 부분이 죽어 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낙태문제는 단순히 종교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는 인류전체의 문제이다. 태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지니기에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도덕적인 암흑기인 고대 그레코 로마시대에 기독교는 생명경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낙태를 죄악시하는 기틀을 세웠다. 어쩌면 그레코 로마시대 보다 더 암울한 도덕부재의 시대인 오늘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생명존엄의 비전을 다시 제시하고 또 다른 전쟁을 치룰 각오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기독교가 교육을 통해서 이룩할 과업이다. 기독교인들부터 우선 철저한 생명우선론자가 되게 교육하고, 저들이 철저한 생명우선론의 전도자가 되게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사상사들의 하나같은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명 경외의 차원에서 낙태에 관한 교육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독일의 한 법원은 임신 처음 석 달에 어떤 이유에서나 낙태가 합법이 될 수 있다면 두 번째 석달, 세 번째 석달에 낙태를 만류하기 힘들다고 논했다.
이제 교회에서도 교인들을 철저한 생명우선론자, 철저한 생명우선론의 전도자로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낙태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 결정은 다음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태아에 대하여 말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한낱 조직덩어리라고 말합니까?
생명은 존중되어야한다.
또한 전도서 6:3-5의 낙태된 자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낙태된 자기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없다고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 된다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가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이 존엄한 만큼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 또한 존엄한 것이다. 성경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하나님 창조에 뿌리하며 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우연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조심스럽게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존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Ⅴ. 결 론
이제까지 낙태 문제에 대한 일반 윤리학계와 기독교 윤리학적인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낙태에 나타난 생명 경시 풍조, 성 윤리의 부재, 물질 만능주의, 또 이런 사상들은 은연중에 부추기는 구조적 모순은 세계고통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주장과 ‘낙태는 이혼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인 행위일 뿐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서 생명우선론자와 선택우선론자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낙태찬성론자/선택우선론자들도 태아를 해치거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낙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임산부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낙태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종배,「낙태, 그 시작과 끝」,『낙태』(서울 : 두란노서원, 1990) 19-20쪽 참조.
특히 우리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하게 될 경우에는 낙태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경우 기독교인들에게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낙태가 최선의 선택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로, 장애 문제는 삶의 “존엄성”이 아니라 삶의 “질”이며, 심하게 장애가 된 자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종종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과연 누가 이 문제를 결정지을 수 있겠는가? 결국 삶에 대해 질을 부여하고 살 가치가 있도록 해주는 것은 사랑이며, 장애자들에게 사랑을 베풀 것인가 베풀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그들의 이웃들인 우리들이다.
바로 장애자들의 삶의 질은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일단 우리가 불구된 유아가 출생 전에 파괴되어야 한다는 점을 수용한다면 왜 출생 후에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심각한 사실은 만약 사회가 미출산 아이가 불구가 될 것이라는 유일한 이유로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새로 태어난 불구 아이들, 자동차 사고로 혼수상태인 사람들, 저능아들, 노쇠한 사람들을 계속 죽여서는 안 될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불구자들은 그들의 삶이 ‘무가치’하거나 또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될 때 처분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히틀러의 잔인한 제 3 제국으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구자들은 낙태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 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잘못 될 수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경쟁하려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그들 자신에게 억지고 그 권위를 돌리는 자들은 심각한 오류 어느 의사 두 명이 나눈 다음의 대화는 낙태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낙태에 대해서이데 난 당신의 의견이 필요하오. 그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었고, 그 어머니는 결핵에 걸렸었소. 태어난 4명의 아이 중 첫째는 눈이 멀었고, 둘째는 죽었고, 셋째는 귀가 멀고 벙어리였고, 넷째는 또한 결핵이었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소.
- 난 임신을 멈추게 했을거요.
-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을 죽였겠구료.
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성경은 인간 생명의 유일성과 고귀성을 말해준다. 태어나기 전에 태아의 성장과 발달은 물론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간섭아래 있다. 잉태된 순간부터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은 단계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연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태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잠정인간’이기 때문에 태아의 죽음에다 출생과 사망 때처럼 출생-사망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고 장례식 또는 애곡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낙태를 한다는 것은 사마귀를 제거하는 것 혹은 당신의 손톱을 자르거나 당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과 같지 않다. 누구라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거나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낙태를 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다. 내 한 부분이 죽어 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낙태문제는 단순히 종교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는 인류전체의 문제이다. 태아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지니기에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도덕적인 암흑기인 고대 그레코 로마시대에 기독교는 생명경외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낙태를 죄악시하는 기틀을 세웠다. 어쩌면 그레코 로마시대 보다 더 암울한 도덕부재의 시대인 오늘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생명존엄의 비전을 다시 제시하고 또 다른 전쟁을 치룰 각오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기독교가 교육을 통해서 이룩할 과업이다. 기독교인들부터 우선 철저한 생명우선론자가 되게 교육하고, 저들이 철저한 생명우선론의 전도자가 되게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사상사들의 하나같은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명 경외의 차원에서 낙태에 관한 교육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독일의 한 법원은 임신 처음 석 달에 어떤 이유에서나 낙태가 합법이 될 수 있다면 두 번째 석달, 세 번째 석달에 낙태를 만류하기 힘들다고 논했다.
이제 교회에서도 교인들을 철저한 생명우선론자, 철저한 생명우선론의 전도자로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낙태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 결정은 다음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태아에 대하여 말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한낱 조직덩어리라고 말합니까?
생명은 존중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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