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름이 부재하는 공간, 그 특이한 배치
소녀의 이름, 사내의 이름은?
베이컨, 욕망, 기관없는 신체
탱고의 리듬/계급의 코드, 탈주선/죽음
이름이 부재하는 공간, 그 특이한 배치
소녀의 이름, 사내의 이름은?
베이컨, 욕망, 기관없는 신체
탱고의 리듬/계급의 코드, 탈주선/죽음
본문내용
시 시작하는 길? 쟌느와의 사랑으로도 이것은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쟌느 또한 가족과 결혼이라는 주체화의 장을 떠나지 못한 것처럼.
이런 상태로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전차의 굉음과 화려한 도시의 빛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온다. 이름이 없는 곳에서 이름이 있는 곳으로. 첫장면에서 서로 엇갈리던 고가도로 밑에서 다시 조우하면서 폴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시작한다. 45세. 홀아비. 작은 여관을 경영. 48년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등등. 자신이 호명되는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이 곧 탱고 경연장에 들어선 것은 또 얼마나 정교한 배치인가. 엄격하기 짝이 없는 리듬과 동작에 의해 지배되는 탱고경연대회란 미시적 코드들이 그물망처럼 얽힌 근대사회에 대한 멋진 은유가 아닐는지.
그들이 이 리듬에 맞춰 춤출 수 있다면, 이름들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의 신체는 탱고의 엄격한 리듬을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그들의 춤은 탱고를 추는 남녀들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그 리듬을 깨는, 일종의 탈주선을 긋는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금지의 벽에 부딪히고, 그에 대한 저항은 엉덩이를 까보이는 추행이 전부다. 새로운 춤을 생성하지 못한 채, 그저 기행과 어설픈 위반에서 그치는 탈주선. 그것은 탱고 리듬에 익숙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일 수 있는 한편, 이들의 신체의 무력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어두운 객실에서 손으로 하는 마지막 섹스. 쟌느는 말한다. “곧 결혼해요. 당신과는 끝났어요.” “우둔한 매춘부같으니.” 폴은 추태와 기행으로, 쟌느는 다시 공주같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 버린다. 탱고의 리듬은 이토록 강한 것이다! 그 리듬에 휘말리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오직 계급의 장벽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계급의 벽을 사랑으로 넘는다고?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사내가 그 익명의 공간에서 거듭 저주했던 바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건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쓰레기같은 일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따위 사랑은 설령 이루어진다 해도 생산하는 욕망도, 탈주선도 아니다. 기껏해야 청승맞은 멜로일 뿐!
계급의 코드가 되살아난 쟌느는 자신의 약혼자가 한 말처럼 ‘어른답게’ 판단한다. “심각하고,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힘들어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고 불결하고 매스꺼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제 반대장면이 연출된다. 사내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소녀는 그 이름을 거부하는. 그리고 달린다. 둘 다 죽음을 향해. 사내는 신체적 운동의 정지로서의 죽음. 소녀로서는 탈유기화되는 과정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으로서의 죽음. 그녀의 삶은 이제 영화의 스크린 안으로 돌아갈 터이다. 세상에 흔해빠진 여자 중의 하나로, 대령의 딸로, 낭만적 분위기를 지닌 샌님같은 남자의 아내로. - 욕망, 이름, 계급의 음울한 삼중주!.
기관없는 신체가 된다는 것, 욕망의 능동적 리듬을 만든다는 것, 이름을 버리고 탈주선을 탄다는 것은 이토록 지난한 것인가?
이런 상태로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전차의 굉음과 화려한 도시의 빛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온다. 이름이 없는 곳에서 이름이 있는 곳으로. 첫장면에서 서로 엇갈리던 고가도로 밑에서 다시 조우하면서 폴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시작한다. 45세. 홀아비. 작은 여관을 경영. 48년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등등. 자신이 호명되는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이 곧 탱고 경연장에 들어선 것은 또 얼마나 정교한 배치인가. 엄격하기 짝이 없는 리듬과 동작에 의해 지배되는 탱고경연대회란 미시적 코드들이 그물망처럼 얽힌 근대사회에 대한 멋진 은유가 아닐는지.
그들이 이 리듬에 맞춰 춤출 수 있다면, 이름들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의 신체는 탱고의 엄격한 리듬을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그들의 춤은 탱고를 추는 남녀들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그 리듬을 깨는, 일종의 탈주선을 긋는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금지의 벽에 부딪히고, 그에 대한 저항은 엉덩이를 까보이는 추행이 전부다. 새로운 춤을 생성하지 못한 채, 그저 기행과 어설픈 위반에서 그치는 탈주선. 그것은 탱고 리듬에 익숙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일 수 있는 한편, 이들의 신체의 무력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어두운 객실에서 손으로 하는 마지막 섹스. 쟌느는 말한다. “곧 결혼해요. 당신과는 끝났어요.” “우둔한 매춘부같으니.” 폴은 추태와 기행으로, 쟌느는 다시 공주같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 버린다. 탱고의 리듬은 이토록 강한 것이다! 그 리듬에 휘말리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오직 계급의 장벽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계급의 벽을 사랑으로 넘는다고?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사내가 그 익명의 공간에서 거듭 저주했던 바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건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쓰레기같은 일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따위 사랑은 설령 이루어진다 해도 생산하는 욕망도, 탈주선도 아니다. 기껏해야 청승맞은 멜로일 뿐!
계급의 코드가 되살아난 쟌느는 자신의 약혼자가 한 말처럼 ‘어른답게’ 판단한다. “심각하고,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힘들어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고 불결하고 매스꺼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제 반대장면이 연출된다. 사내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소녀는 그 이름을 거부하는. 그리고 달린다. 둘 다 죽음을 향해. 사내는 신체적 운동의 정지로서의 죽음. 소녀로서는 탈유기화되는 과정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으로서의 죽음. 그녀의 삶은 이제 영화의 스크린 안으로 돌아갈 터이다. 세상에 흔해빠진 여자 중의 하나로, 대령의 딸로, 낭만적 분위기를 지닌 샌님같은 남자의 아내로. - 욕망, 이름, 계급의 음울한 삼중주!.
기관없는 신체가 된다는 것, 욕망의 능동적 리듬을 만든다는 것, 이름을 버리고 탈주선을 탄다는 것은 이토록 지난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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