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말
-의미
● -제1장-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 -제2장- 율법은 빈자의 권리
● -제3장- 빈자의 권리
● -제4장- 예언자(선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
● -제5장- 빈자의 기쁨
● 서평(書評)
-의미
● -제1장-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 -제2장- 율법은 빈자의 권리
● -제3장- 빈자의 권리
● -제4장- 예언자(선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
● -제5장- 빈자의 기쁨
● 서평(書評)
본문내용
비참한 생활을 확인하고 동정하는 데만 그치자 않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구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한 불의는 “살인”과 동일한 범죄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같은 불의는 빈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현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부의 공평한 분배를 촉구한다. 분배 정의는 법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사랑”과 “기도”의 차원에서 실시되어야한다. 남을 돕는 자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는”식으로 돕되, 좋은 일을 했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난한 자가 기뻐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기도”를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오늘의 사회학이 말하는 “경제적 약자”들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고통을 당하여 불행한 자들, 고뇌에 빠져 있는 자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질적 빈곤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고통은 고독과 소외 같은 “정신적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
시편의 기자들은 빈자의 고통을 하나님께 외치고 있다. 하나님만이 빈자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판관”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호자요 해방자로 둔 빈자는 그분에게서 참다운 기쁨의 원천을 발견한다.
● 서평(書評)
옛말에 ‘거지는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과 지위와 부를 가진 왕도 빈자(貧者)를 구제하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얘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속담이 아닐까! 빈자들에 대한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만큼 그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의 우리 곁에도 있다. ‘지하철 안에서, 오르 내르는 육교에서, 역전의 대합실에서 늘 상 만나는 빈자들을 신앙인으로 어떻게 대하고 처신(處身)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가끔 내 자신에게 던지곤 하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위해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부터 강한 반감이 밀려온다. ‘천주교 서적’이라는 이질감(異質感)으로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기독교-개신교인으로 적립되어온 사고방식 때문이다. 물론 같은 구약성서를 사용하고 있지만 약간의 해석차이가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듯한 내용이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구약성서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 내용은 이해할 수 있다는 안위감이 들정도였다. 처음의 이질감은 잠시 접어 두고 책의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빈자의 발생이 유목민족의 분열에서 비롯됐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직도 유목민족으로 남아있는 “몽골”이나 씨족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의 미개문명의 다큐멘터리의 영상물을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이 공동의 작업과 철저한 공동 분배의 원칙을 따르고 있고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어우러져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방인인 취재단이 와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지만 같이 나눠먹고 쉴 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 문명의 발달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의 발달, 책에서 지적한대로 “부족사회”에서 “왕정시대”로의 발전과 상공업의 발달이 이러한 유대관계를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분열시켜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유재산” 인정이 낳은 부산물이 빈자의 발생이긴 하나 이러한 제도의 변화가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도를 오용하게 사용한 인간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소외 계층과 빈자를 구제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왕”이라는 지도를 세웠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리사욕에 눈 먼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고 자기 배불리기에 매진함으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골은 점점 깊어졌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빈민층을 보호하고자하나 그 역시 가진 자의 횡포를 통해 법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힘 있는 자의 편에서 잘못 해석되어 빈자들을 끌어 안아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공표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잡아 나간다. 그러나 한시대가 흘러가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왕의 부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두 번이나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본 삼아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 역사가 이루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너희도 이스라엘처럼 되지 않을려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층과 부유층의 갈등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빈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에 와서는 과거처럼 그들을 보호하고자하는 노력의 여지가 사회곳곳에 나타나 있다. 부족사회에서처럼 집단을 떠나면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급급한 왕이나 판관보다는 안정적으로 돌보아 줄 수 있는 정부라는 기관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부에 나몰라라 식으로 떠넘기면 그 시대에 사제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입장보다는 빈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받고 있는 고난과 역경을 좀더 몸속 깊은 곳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으로 느꼈다면 행동으로 보여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빈자들에 대하여 잠잠하다면 세상의 모든 시선이 선지자의 눈빛이 되어 질타함을 당할 것이 자명한 일이다. 왕정시대엔 왕이나 권세자 들만 가졌던 빈자들의 착취의 횡포가 지금에 와서 없어졌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현제의 빈자들의 현상들을 보고도 간과한다면 그때의 그런 횡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어가면서 가장 안타까
가난한 자가 기뻐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기도”를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은 오늘의 사회학이 말하는 “경제적 약자”들만을 가르키지는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고통을 당하여 불행한 자들, 고뇌에 빠져 있는 자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질적 빈곤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고통은 고독과 소외 같은 “정신적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
시편의 기자들은 빈자의 고통을 하나님께 외치고 있다. 하나님만이 빈자들이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판관”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호자요 해방자로 둔 빈자는 그분에게서 참다운 기쁨의 원천을 발견한다.
● 서평(書評)
옛말에 ‘거지는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과 지위와 부를 가진 왕도 빈자(貧者)를 구제하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얘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속담이 아닐까! 빈자들에 대한 속담이 전해져 내려올 만큼 그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의 우리 곁에도 있다. ‘지하철 안에서, 오르 내르는 육교에서, 역전의 대합실에서 늘 상 만나는 빈자들을 신앙인으로 어떻게 대하고 처신(處身)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가끔 내 자신에게 던지곤 하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기 위해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부터 강한 반감이 밀려온다. ‘천주교 서적’이라는 이질감(異質感)으로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기독교-개신교인으로 적립되어온 사고방식 때문이다. 물론 같은 구약성서를 사용하고 있지만 약간의 해석차이가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듯한 내용이 상당히 거북스러웠다. 책의 내용이 대부분 구약성서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아 내용은 이해할 수 있다는 안위감이 들정도였다. 처음의 이질감은 잠시 접어 두고 책의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빈자의 발생이 유목민족의 분열에서 비롯됐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직도 유목민족으로 남아있는 “몽골”이나 씨족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의 미개문명의 다큐멘터리의 영상물을 보면 그들은 모든 것이 공동의 작업과 철저한 공동 분배의 원칙을 따르고 있고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어우러져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방인인 취재단이 와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지만 같이 나눠먹고 쉴 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 문명의 발달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의 발달, 책에서 지적한대로 “부족사회”에서 “왕정시대”로의 발전과 상공업의 발달이 이러한 유대관계를 철저하게 배제시키고 분열시켜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유재산” 인정이 낳은 부산물이 빈자의 발생이긴 하나 이러한 제도의 변화가 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도를 오용하게 사용한 인간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소외 계층과 빈자를 구제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왕”이라는 지도를 세웠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리사욕에 눈 먼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하고 자기 배불리기에 매진함으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골은 점점 깊어졌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으로 빈민층을 보호하고자하나 그 역시 가진 자의 횡포를 통해 법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힘 있는 자의 편에서 잘못 해석되어 빈자들을 끌어 안아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공표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잡아 나간다. 그러나 한시대가 흘러가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왕의 부재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두 번이나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약성서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본 삼아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 역사가 이루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너희도 이스라엘처럼 되지 않을려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곤층과 부유층의 갈등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빈자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에 와서는 과거처럼 그들을 보호하고자하는 노력의 여지가 사회곳곳에 나타나 있다. 부족사회에서처럼 집단을 떠나면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급급한 왕이나 판관보다는 안정적으로 돌보아 줄 수 있는 정부라는 기관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부에 나몰라라 식으로 떠넘기면 그 시대에 사제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입장보다는 빈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받고 있는 고난과 역경을 좀더 몸속 깊은 곳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으로 느꼈다면 행동으로 보여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빈자들에 대하여 잠잠하다면 세상의 모든 시선이 선지자의 눈빛이 되어 질타함을 당할 것이 자명한 일이다. 왕정시대엔 왕이나 권세자 들만 가졌던 빈자들의 착취의 횡포가 지금에 와서 없어졌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현제의 빈자들의 현상들을 보고도 간과한다면 그때의 그런 횡포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을 읽어가면서 가장 안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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