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레포트(제주 신엄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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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인류학 레포트(제주 신엄리 마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조사 내용

1. 신엄리 마을의 소개

2. 마을의 조직, 단체기관

3. 마을의 역사

4. 마을의 유적 및 지역, 전설

5. 신엄리의 4·3사건에 대해서

본문내용

히 여기실꼬
엎드려 하느님께서
소감하심을 있기를 비오니
만백성을 대신하여
임금님을 돌보소서
속전에 의하면 이 노래를 역군으로 나간 도두리 백성 남호현에게 부르도록 하니 남호현은 제주에서도 소리 좋기로 이름이 있는지라 그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대니 모든 역군들이 감탄하며 사기가 충천하였다고 한다.
인원대비가 이 소식을 듣고 시월 그믐날과 동짓달 초하루날에는 별감을 보내어 차비문까지 제주 능력군을 부르시고 위로하며언문 교지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 선대왕이 너희 섬 백성들을 걱정하시었는데 너희들이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과 바다를 건너와서 능소에 나아가 부토하기에 이르렀고 진헌 물종까짐 마련하여 왔으니 민정이 또한 가상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다.”라고 하며 피륙 등 수십종의 물목도 하사하였다.
이 외에 임금과 중전도 아울러 많은 상을 내려 제주 능력군들은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사배하고 물러나와 제주도로 무사히 돌아왔다.
공은 부친 여운공이 돌아가자 정성을 다하여 장사를 지내고 거상 삼년간을 하루ㅋ같이 죽을 먹으며 슬퍼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공히 지극한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라고 감탄하였다.
경종 사년 갑진년 정월 성안에서 민가의 실화로 향교가 전소되었으므로 부득이 향교를 가락천 동쪽 옛터로 옮겨 세우게 되자 공은 여기에 쌀과 소를 연출하며 역사를 도왔는데 공은 말하기를 ‘성묘에 일이 있으니 어찌 미천한 자라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겟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궁중에까지 전하여져 ‘충효 박씨 정문’이 내려졌다.
○ 남두연대(南頭煙臺)
지정번호 : 제주도기념물 제 23-7호
지정년월일 : 1976년 9월 9일
소재지 : 북제주군 애월읍 신엄리 2780-1
애월진에 소속된 남두연대는 신엄리 해안도로변에 있다. 동쪽으로는 조부연대(직선거리 6.9km) 서쪽으로 애월연대(직선거리 4.2km)와 교신하였다.
1977년 보수하였는데 상부 6.3m×6.4m,하부 7.9m×7.6m,높이 3.9m이다.
해안 절벽 위에 있어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애월진 소속 별장 6인,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연대는 오늘날과 같이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이전에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때 전도(全島)에 빨리 연락하기 위한 통신망의 하나이다. 도내는 봉수대 25개와 해안선 고지대에 설치한 38개소의 연대가 있다.
○ 연자매 (당거리동네 말방아)
북제주군 애월읍 신엄리 당거리동네에 있는 \'당거리동네 말방아\'는 애월읍 하가리의 \'잣동네 말방아\'와 더불어 1975년 이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연자매의 명칭은 \'당거리동네 말방아\'·\'잣동네 말방아\'처럼 보통 그 연자매가 놓인 동네 이름을 딴다.
이 두 연자매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은 민속자료 조사 보고 제43호 『연자마(硏子磨)』(문화재관리국, 1975)를 김영돈이 작업한데서 연유한다. 신엄은 이웃마을 구엄(舊嚴)·중엄(重嚴)과 더불어 \'엄쟁이\'라는 주농부어(主農副漁)의 평범한 해안마을이다.
\'당거리동네\'란 이 동네에 할망당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입구 일주도로 옆에 신엄중학교가 서 있다. 이 마을 출신 재일동포가 자금을 모으고 중학교를 세우고 국가에 희사한 학교인 바, 유다른 교육열이 돋보인다. 일주도로에서 중학교 서쪽 길로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약 7분쯤 걸으면 길가에 \'당거리동네 말방아\'가 나타난다.
1974년 제주도내 연자매를 집중적으로 조사할 당시 신엄리에 본래 14 군데에 연자매가 있었는데, 열 한 군데는 아주 사라졌었고 둘은 뜯겨지는 도중이었으며 온전하게 남은 것은 이 \'당거리동네 말방아\' 하나뿐이었다.
1974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 \'당거리동네 말방아\'의 지붕은 깔끔하게 이어졌고 가끔 쓰여지고 있었다. 곧 조이삭을 \'둥그린다\'거나, 말하자면 조이삭을 연자매에 쏟아놓고 방앗돌을 굴림으로써 알갱이를 떨어낼 때라든가, 보릿고개 때에 임시 먹을 식량을 마련할 때에는 이 연자매를 활용하고 있었다. 1974년 당시만 하더라도 연자맷간을 고스란히 보전하고 그 지붕을 깔끔하게 이었을 뿐더러, 가끔이나마 활용되는 이런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례였다. 그 당시 이 연자매계의 소임(所任)인 정시호(鄭時好)(남·당시71세)의 제보에 따르건데, 정미소가 아닌 연자매를 활용할 때 두어가지의 이로운 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정미소가 아닌 연자매를 이용할 때 조에서 벗기어 낸 겉껍질인 이른바 \'조 체\'를 고스란히 돼지의 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당시 유류파동 때문에 영세농가로서는 만만치 않은 정미소 이용료도 아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엄마을의 성격을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사할 당시인 1974년을 기준할 때 다른 농 어촌과의 차이를 굳이 내세운다면, 비교적 온고적(溫故的), 보수적(保守的) 경향을 띠는 듯했다. 따라서 이런 연자매가 고스란히 남겨진 게 아니었을까? 주민들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특수작물이나 기업도 없었고, 범상한 농어촌으로서 해녀의 물질을 포함한 수산업이 극성스러운 편도 아니었다.
\'당거리동네 말방아\'는 할망당이 있는 신엄리 당거리동네 21 가구가 공동으로 연자매계를 설립하고 함께 운용하는 연자매다. 말하자면 당시 신엄리의 8반 전가구의 연자매다.
이 \'당거리동네 말방아\'의 원위치와 현위치 및 이 연자매계 계원들의 가옥분포도를 참고로 제시한다. 이 도면을 얼른 보더라도 드러나듯이 \'당거리동네 말방아\'는 이 동네의 입구 세갈랫길 큰길가에 번듯하게 자리해 있고 서쪽으로 뻗어나간 길가의 남북 양쪽에 그 계원들의 집이 옹기종기 자리잡았다. 말하자면 이 연자매계 계원들은 이 연자매를 초점으로 서쪽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계원들의 제보에 따르건대 이 연자매는 지금으로부터 110년전쯤, 곧 1887년 전후해서 세워졌다한다.
\'당거리동네 말방아\'는 1928년에 매조이를 했고, 1967년에 시멘트로 수리했다고 한다.
○ 충혼비(忠魂碑)
31절을 기념하고 625참전용사 및 순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재항군인회가 주체가 되어 유족 및 마을 주민 다수가 참석하여 3월 1일 제사를 올리고 있다.
맨 처음에는 신엄중학교 정문에 세줬으나 현재 속칭 곰제기 머를에 옮겨 세워있다.
비문

키워드

4.3,   인류학,   제주,   심어리,   마을,   제주도,   문화인류학,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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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3.21
  • 저작시기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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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8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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