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중국은 왜 고구려를 빼앗으려 하나
-동북공정이란?
-동북공정의 속셈은?
동북공정의 실상과 허구성
-고구려는 명백한 독자 국가였다.
-수당 전쟁은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이었다.
-중국의 주장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구려민족이 한(漢)민족이라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왕씨 고려는 명백히 고구려 계승국이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은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맺음말
중국은 왜 고구려를 빼앗으려 하나
-동북공정이란?
-동북공정의 속셈은?
동북공정의 실상과 허구성
-고구려는 명백한 독자 국가였다.
-수당 전쟁은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이었다.
-중국의 주장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구려민족이 한(漢)민족이라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왕씨 고려는 명백히 고구려 계승국이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은 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맺음말
본문내용
시 조곡을 바치면 중국으로부터 회사품을 받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바치는 조공품보다 회사품이 훨씬 더 많았다. 주는 것보다 받아오는 것이 더 많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조정에 대해 조공을 년에 세 번 가겠다는 뜻을 전한 적도 있었다. 이에 송나라는 회사품에 부담을 느겻던 듯 “ 3년에 한 번만 해도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조공 자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훨씬 많은 것을 받아내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던 셈이다.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되 나름대로 실리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조공 무역’으로 규정하는 견해까지 나와 있다. 따라서 조공이나 책봉 자치를 놓고 ‘지방 정권’ 이었다며 고구려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무리한 논리인 것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바로 연개소문이 쌓은 천리장성이다. 세계의 어느 지방 정권이 중앙 정부와의 사이에 그만한 장성을 쌓을 수 있는가. 천리장성은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고구려)와 국가(당나라)사이의 경계를 위해 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지방 정권’ 논리가 설득력이 약한 또 다른 근거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족이 쌓은 국경선이다. 따라서 중국의 기본 영토는 만리장성 안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만리장성 안쪽은 중국이요, 그 바깥은 ‘다른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수당 전쟁은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이었다.
중국은 수당과의 전쟁을 양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 ‘옛 영토를 회복하고 천하공주의 위엄을 되찾으려는 정벌인 중국의 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권 200, 동이전145, 고려)에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이유가 나타나있다. 내용은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고구려)만 복종치 않고 있다. 그들이 군사적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정벌(당의 침입)을 유도했음으로 힘든 난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중국 동진의 거점으로 철의 주산지인 요동은 끝까지 고구려가 장악했다는 뜻이 포함되어있다. 이미 당은 영류왕 5년(662)에 당고조가 여, 수전으로 격앙된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서에도 당과 고구려를 ‘두나라(二國)’이라 하여 당으로부터 고구려와의 관계를 같은 국가와 국가간 임을 보여주면서 포로석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국가적 존재와 특징을 보여준 것은 중국측 기록에도 나타나있다. 중국의 역대 외이열전에 우리나라는 일본을 포함하여 동이전에 포함되었으며, 특히 동이전에는 중국의 눈에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바, 이것은 민족이 중국과 다르다는 뜻이 될 것이다.
-중국의 주장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중국측은 고구려가 탄생한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모두 연(燕)의 영역이었고, 진(秦)이 6국을 통일한 뒤는 진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이 때 고구려는 현도군의 한 현이었다.
주몽이 고구려 5부를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 곳도 현도군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건국은 이처럼 모두 중국영토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오늘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고조선, 부여, 예맥 등 고구려에 선행하는 역사는 명백한 우리 역사이다. 현재 자국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 역사까지 모두 자기네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한사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한 중국 측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다. 실상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변경에서 있었던 국경 분쟁이면 현도군은 광역의 식민지 군현으로서 기능했다기보다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바로 연개소문이 쌓은 천리장성이다. 세계의 어느 지방 정권이 중앙 정부와의 사이에 그만한 장성을 쌓을 수 있는가. 천리장성은 중앙 정권과 지방 정권 사이를 구별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국가(고구려)와 국가(당나라)사이의 경계를 위해 쌓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이 내세우는 ‘지방 정권’ 논리가 설득력이 약한 또 다른 근거는 만리장성이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족이 쌓은 국경선이다. 따라서 중국의 기본 영토는 만리장성 안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만리장성 안쪽은 중국이요, 그 바깥은 ‘다른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수당 전쟁은 동아시아의 세계 대전이었다.
중국은 수당과의 전쟁을 양국 간의 전쟁이 아니라 ‘옛 영토를 회복하고 천하공주의 위엄을 되찾으려는 정벌인 중국의 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당서」(권 200, 동이전145, 고려)에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 이유가 나타나있다. 내용은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고구려)만 복종치 않고 있다. 그들이 군사적 강성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정벌(당의 침입)을 유도했음으로 힘든 난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중국 동진의 거점으로 철의 주산지인 요동은 끝까지 고구려가 장악했다는 뜻이 포함되어있다. 이미 당은 영류왕 5년(662)에 당고조가 여, 수전으로 격앙된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서에도 당과 고구려를 ‘두나라(二國)’이라 하여 당으로부터 고구려와의 관계를 같은 국가와 국가간 임을 보여주면서 포로석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국가적 존재와 특징을 보여준 것은 중국측 기록에도 나타나있다. 중국의 역대 외이열전에 우리나라는 일본을 포함하여 동이전에 포함되었으며, 특히 동이전에는 중국의 눈에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바, 이것은 민족이 중국과 다르다는 뜻이 될 것이다.
-중국의 주장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중국측은 고구려가 탄생한 지역은 기원전 3세기 모두 연(燕)의 영역이었고, 진(秦)이 6국을 통일한 뒤는 진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이 때 고구려는 현도군의 한 현이었다.
주몽이 고구려 5부를 통일하고 나라를 세운 곳도 현도군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건국은 이처럼 모두 중국영토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오늘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고조선, 부여, 예맥 등 고구려에 선행하는 역사는 명백한 우리 역사이다. 현재 자국 영토 안에 있다는 이유로 그 역사까지 모두 자기네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한사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한 중국 측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다. 실상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변경에서 있었던 국경 분쟁이면 현도군은 광역의 식민지 군현으로서 기능했다기보다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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