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계몽주의 : 초자연으로부터 자연의 해방
2. 두 가지 혁명 : 과학혁명과 철학혁명
3. 이성의 종교 : 이신론(Deism)
4. 정치사회적 민주화
5. 미국혁명
6. 프랑스혁명
7. 혁명시대의 교회
2. 두 가지 혁명 : 과학혁명과 철학혁명
3. 이성의 종교 : 이신론(Deism)
4. 정치사회적 민주화
5. 미국혁명
6. 프랑스혁명
7. 혁명시대의 교회
본문내용
은 장교들의 지휘하에 전투에 승리했다.
전쟁의 압력으로 국민의회는 더욱 과격해졌다. 공안위원회(the Committe of public Safety)가 정부의 지배적 실권자가 되었다. 이 단체가 전쟁을 지휘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영웅적 행동을 하도록 종용했고, 외교정책을 결정했고 반대세력을 공포정치로 짓눌렸다. 수천의 반정부 인사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 16세와 왕후 마리 앙뜨와네뜨가 1793년에 참수당한 이후에 공포 정치는 완전히 고삐가 풀렸다. 중산층인 이 공포정치를 두려워하였다. 이들 중산층은 임금과 가격에 대한 법규, 보다 정의로운 토지의 분배, 사회적 안전체계를 정부에 요구하며 점점 더 과격해지는 일반 서민층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층계급이 제어되어야만 부르주아들이 혁명의 열매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795년 혁명 정부의 5인 집정부가 하층계급의 과격주의를 제어하였고, 다음에 1799년에 나폴레옹이 이 일을 마무리짓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 태생으로서 포병장교였다가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엇다. 그는 집정부를 뒤엎고 최초의 수석 집정관(first consul:1799-1804년)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했고, 그 다음은 황제(1804-1814년)로서 프랑스를 통치했다. 나폴레옹 1세는 국내의 모든 분야를 개혁함으로써 혁명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그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과 전쟁을 치루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나폴레옹의 국내정책은 18세기의 계몽 군주의 정책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법을 만들고 행정을 중앙집권화하고 의무교육 체제를 만들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과 화해함으로써 프랑스 정부를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종교에 대하여 동정적이어서 여러 교파들을 관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종교재판소가 없어졌고 종교적 자유가 소수 그릅에게도 주어졌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친 후였기 때문에 이 같은 나폴레옹의 안정정책을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전쟁기록에 의하여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유럽의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통치하게 하였다. 그랑스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있지 않은 나라들도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대영제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나폴레옹의 제국 밖에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그는 정복한 모든 지역에서 프랑스혁명의 기본적인 개혁을 실천하였다. 즉, 그는 봉건 영주들의 특권과 농노제도를 철폐하였고 모든 시민의 평등을 인정했고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였다. 정복된 나라의 많은 중산층은 진보적인 프랑스 정부를 환영하였고, 이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보다 정직해지고 효율화된 자국 정부를 환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랑스에 예속된 대부분의 백성들은 프랑스의 지배에 싫증을 느꼈다. 나폴레옹의 통치가 진보적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강제력에 의한 외세의 통치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민들은 점차 민족주의화하였다. 스페인의 무장 봉기가 프랑스세력을 약화시켰고, 독일에서도 반프랑스세력이 점증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갔을 때 프랑스의 모든 계층의 사람이 나폴레옹에 항거하기 위하여 단합하였다. 러시아는 혹독한 추위의 도움으로 나폴레옹의 거대한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1814년에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1815년 다시 프랑스로 복귀했으나 워터루전쟁에서 참패하고 다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키운 군대에 의해 참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반기를 든 백성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에 의해 각성된 사람들이었고, 프랑스가 혁명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하자 프랑스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Ibid., pp. 123-128.
7. 혁명시대의 교회
프랑스혁명은 충분히 유럽의 기독교를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급성직자들인 교구사제들이 혁명에 협조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고위성직자들과 관계를 끊고 제 3신분계층과 합류하였다. 국회는 교회세와 교회의 토지소유제도를 철폐시켰지만 그 대신 교구사제들에게 급료를 지불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이들 하급 성직자들은 높은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이 같은 새로운 정책을 환영했다. 국회는 1790년에 교회를 국가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성직자의 시민법”(the 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을 통과시켰다. 모든 교역자들은 이 법에 순종한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이 맹세를 거부하였다. 교황은 프랑스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든 사라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이들에게 40일의 여유를 주면서 맹세를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일찍이 교황청은 “인권선언”을 정죄하고 공식적으로 절대 왕정과 귀족 지배체제를 지지하였다.
1792년 프랑스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는 교황 비오 6세(1774-1799년)가 바로 연합 적군의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사제에 대하여 15일 안으로 프랑스를 떠나라는 추방조치가 내려졌다. 많은 사제들이 약탈을 당하고 얻어맞고 죽었다. 4만 명 정도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반대하는 선전에 가담했을 것이다. 1792년에 권력을 장악한 국민의회는 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1793년에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러나 반혁명적 사제들에 의하여 봉기가 일어나자 국민의회는 태도를 바꾸었다. 이로써 교회는 크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 대신 프랑스에는 ‘이성의 종교’(사실상은 국가숭배이지만)가 수립되었다.
혁명의 초기부터 프랑스에는 시민종교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미 1790년에 프랑스 전역에 걸쳐서 혁명 1주년 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7월 14일)이 종교적 형태로 경축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넓은 광장에 놓여 있는 큰 제단 주위에서 조국에 대한 맹세를 올렸다. 이 경우 먼저 가톨릭의 예배의식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도
전쟁의 압력으로 국민의회는 더욱 과격해졌다. 공안위원회(the Committe of public Safety)가 정부의 지배적 실권자가 되었다. 이 단체가 전쟁을 지휘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영웅적 행동을 하도록 종용했고, 외교정책을 결정했고 반대세력을 공포정치로 짓눌렸다. 수천의 반정부 인사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 16세와 왕후 마리 앙뜨와네뜨가 1793년에 참수당한 이후에 공포 정치는 완전히 고삐가 풀렸다. 중산층인 이 공포정치를 두려워하였다. 이들 중산층은 임금과 가격에 대한 법규, 보다 정의로운 토지의 분배, 사회적 안전체계를 정부에 요구하며 점점 더 과격해지는 일반 서민층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층계급이 제어되어야만 부르주아들이 혁명의 열매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1795년 혁명 정부의 5인 집정부가 하층계급의 과격주의를 제어하였고, 다음에 1799년에 나폴레옹이 이 일을 마무리짓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 태생으로서 포병장교였다가 혁명군의 지도자가 되엇다. 그는 집정부를 뒤엎고 최초의 수석 집정관(first consul:1799-1804년)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했고, 그 다음은 황제(1804-1814년)로서 프랑스를 통치했다. 나폴레옹 1세는 국내의 모든 분야를 개혁함으로써 혁명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그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과 전쟁을 치루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나폴레옹의 국내정책은 18세기의 계몽 군주의 정책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법을 만들고 행정을 중앙집권화하고 의무교육 체제를 만들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과 화해함으로써 프랑스 정부를 합리화하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종교에 대하여 동정적이어서 여러 교파들을 관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종교재판소가 없어졌고 종교적 자유가 소수 그릅에게도 주어졌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친 후였기 때문에 이 같은 나폴레옹의 안정정책을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전쟁기록에 의하여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유럽의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통치하게 하였다. 그랑스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있지 않은 나라들도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대영제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나폴레옹의 제국 밖에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그는 정복한 모든 지역에서 프랑스혁명의 기본적인 개혁을 실천하였다. 즉, 그는 봉건 영주들의 특권과 농노제도를 철폐하였고 모든 시민의 평등을 인정했고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였다. 정복된 나라의 많은 중산층은 진보적인 프랑스 정부를 환영하였고, 이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보다 정직해지고 효율화된 자국 정부를 환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프랑스에 예속된 대부분의 백성들은 프랑스의 지배에 싫증을 느꼈다. 나폴레옹의 통치가 진보적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강제력에 의한 외세의 통치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민들은 점차 민족주의화하였다. 스페인의 무장 봉기가 프랑스세력을 약화시켰고, 독일에서도 반프랑스세력이 점증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해 들어갔을 때 프랑스의 모든 계층의 사람이 나폴레옹에 항거하기 위하여 단합하였다. 러시아는 혹독한 추위의 도움으로 나폴레옹의 거대한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1814년에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1815년 다시 프랑스로 복귀했으나 워터루전쟁에서 참패하고 다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키운 군대에 의해 참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반기를 든 백성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에 의해 각성된 사람들이었고, 프랑스가 혁명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하자 프랑스에게 반기를 든 것이었다. Ibid., pp. 123-128.
7. 혁명시대의 교회
프랑스혁명은 충분히 유럽의 기독교를 위협할 만한 것이었다.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급성직자들인 교구사제들이 혁명에 협조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고위성직자들과 관계를 끊고 제 3신분계층과 합류하였다. 국회는 교회세와 교회의 토지소유제도를 철폐시켰지만 그 대신 교구사제들에게 급료를 지불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였다. 이들 하급 성직자들은 높은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이 같은 새로운 정책을 환영했다. 국회는 1790년에 교회를 국가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성직자의 시민법”(the 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을 통과시켰다. 모든 교역자들은 이 법에 순종한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이 맹세를 거부하였다. 교황은 프랑스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든 사라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이들에게 40일의 여유를 주면서 맹세를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일찍이 교황청은 “인권선언”을 정죄하고 공식적으로 절대 왕정과 귀족 지배체제를 지지하였다.
1792년 프랑스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는 교황 비오 6세(1774-1799년)가 바로 연합 적군의 정신적 지주라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 사제에 대하여 15일 안으로 프랑스를 떠나라는 추방조치가 내려졌다. 많은 사제들이 약탈을 당하고 얻어맞고 죽었다. 4만 명 정도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반대하는 선전에 가담했을 것이다. 1792년에 권력을 장악한 국민의회는 종교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1793년에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러나 반혁명적 사제들에 의하여 봉기가 일어나자 국민의회는 태도를 바꾸었다. 이로써 교회는 크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그 대신 프랑스에는 ‘이성의 종교’(사실상은 국가숭배이지만)가 수립되었다.
혁명의 초기부터 프랑스에는 시민종교가 발전하고 있었다. 이미 1790년에 프랑스 전역에 걸쳐서 혁명 1주년 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7월 14일)이 종교적 형태로 경축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넓은 광장에 놓여 있는 큰 제단 주위에서 조국에 대한 맹세를 올렸다. 이 경우 먼저 가톨릭의 예배의식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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