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1. 나치즘의 형성 배경
(1)나치즘의 형성
(2)나치스에 대해서
2.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1)히틀러, 그는 어떤 사람인가
(2)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학살했는가
Ⅱ. 집단형성단계로 본 나치조직
1. 형성기
(1)집단화 이유
(2)학습
2. 격동기
(1)갈등관리
(2)집단의 성격
(3)목표설정이론
(4)강화 법칙
3. 규범기
(1)선택동기
(2)자료
(3)적용
(4)종합
4. 성과기
(1)상황
(2)권력이론 적용
Ⅲ. 히틀러의 리더십
1. 탐색부문
2. 상황이론으로 본 히틀러의 리더십
(1)상황적합성 이론
(2)의사결정 상황 이론
(3)경로-목표 이론
(4)수명주기 이론
3. 행동이론으로 본 히틀러의 리더십
Ⅳ. 결론
Ⅴ. 참고문헌
1. 나치즘의 형성 배경
(1)나치즘의 형성
(2)나치스에 대해서
2.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1)히틀러, 그는 어떤 사람인가
(2)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학살했는가
Ⅱ. 집단형성단계로 본 나치조직
1. 형성기
(1)집단화 이유
(2)학습
2. 격동기
(1)갈등관리
(2)집단의 성격
(3)목표설정이론
(4)강화 법칙
3. 규범기
(1)선택동기
(2)자료
(3)적용
(4)종합
4. 성과기
(1)상황
(2)권력이론 적용
Ⅲ. 히틀러의 리더십
1. 탐색부문
2. 상황이론으로 본 히틀러의 리더십
(1)상황적합성 이론
(2)의사결정 상황 이론
(3)경로-목표 이론
(4)수명주기 이론
3. 행동이론으로 본 히틀러의 리더십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간부, 게릴라 저항군, 소련 전쟁포로들을 대량 학살
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
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군대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
국제관계에서는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1월 자르지방의 인민투표에서 승리하여 이 지방을 독일영토로 복귀시켰으며, 3월 국민징병제를 채용실시하여 육군을 일시에 5배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영국-독일해군협정 체결에 의해서 해군도 4배로 증강하였다. 36년 3월 독일군을 라인 비무장지대로 진주시켜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를 요새화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실력이 유럽세계를 제압하게 되자 독일국민의 나치스에 대한 신뢰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10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시켰으며, 이어 1939년 3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정복하여 독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여세를 몰아, 9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自由市)를 독일에 반환할 것과 동(東)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기 위하여 폴란드령 포메른을 경유하는 치외법권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부터 거절당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폴란드와 구소련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게르만족의 생존권(生存圈)으로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치스는 45년 패전으로 연합군에 의하여 금지되고, 그 금지조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치당의 강령
나치당이 수많은 추종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몇 가지 공약과 강령에 나타낸 호소력의 덕분이었다. 나치즘은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었다. 유일하게 일관된 교의는 인종주의뿐이었다. 나치당의 민족주의적 정책이나 제국주의적 계획들은 이 인종주의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정당화되었다. 사실 이 인종주의는 정부의 단순한 방침이 아닌 대부분의 나치당 간부들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히틀러 체제에 역사상의 다른 제정 및 독재체제와 다른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 것도 이 인종주의에 바탕은 둔 광신 때문이었다.
① 국가지상주의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국가의 권력은 확대되기 마련이다.
헤겔의 경우, 국가는 도덕적 이념의 현실태이며, 개인으로 하여금 목적을 실현하고 행복에 도달케 하는 유일한 조건,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란 신의 의사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구체화인 정부는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해야 하며, 최고의 심급(審級)인 국가를 초월한 도덕률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야말로 도덕의 유일한 원천이고, 단 하나의 권위있는 모범이라는 주장도 나치즘에서 말하는 사상의 아류에 불과하며, 국가의 이익만을 본위로 한 이른바 현실주의적 정치는 이렇게 하여 기반을 굳히고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
② 팽창주의
나치 강령 가운데 대외정책에 관한 조항들을 보면, 베르사이유 조약과 생 제르맹 조약의 즉각적 파기와 타국과의 동등한 대우를 명시하면서, 모든 독일 민족의 민족자주권에 입각한 대독일로의 통일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게르만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외국인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장해야 한다는 국가 팽창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③ 군국주의
개인의 국가에 대한 완전한 참여는 자기희생이며 전쟁이야말로 개인이 국가와 일치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구제를 받는 행위 자체라 보았다. 전쟁이 탁월한 도덕적 행위라는 헤겔의 사상과 전쟁에 대해 문명의 불가결한 요소이며, 국민의 에너지 및 생명의 최고의 표현이라 찬양한 베른하르디의 사상 등이 바탕이 되어, 정치적 현실주의, 폭력주의, 전쟁긍정론 등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이론들이 게르만주의의 사상과 불가분의 이론이 되었다.
④ 범게르만주의
18세기 말엽, 다른 나라와 같이 독일에 있어서도 민족국가의 독자성과 국민의 존엄성이 중시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빌헬름 2세 치하인 1890년 이후, 범게르만주의는 정식으로 독일의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⑤ 반유대주의(반유태주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사상의 변함없는 특징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초기에 있어서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적 기반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리안의 우수성, 특히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주장한 고비노의 사상이 바그너에 호응을 얻고, 바그너의 사위로 민족주의 옹호론자인 챔벌린이 히틀러와 알게 되면서, 반유대주의는 독일의 보수주의적 사상의 불가결한 일부가 되었다.
2.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1) 히틀러 그는 어떤 사람인가?
히틀러(Adolf Hitler, 1889. 4. 20~1945. 4. 30)는 독일의 정치가이고, 나치스의 당수이며, 제3제국의 총통이었던 인물이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이 나빠서 중퇴했다. 1908년 빈에 살면서, 두 차례나 조형미술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실패했다.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부모의 유산과 고아연금의 뒷받침으로 예술가 기질의 생활을 보내다가, 육체노동과 그림엽서를 그려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13, 뮌헨으로 이주하고, 이듬해인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바이에른군에 지원하여 종군했다. 이때 전공에 의해 제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대전 후에도 바이에른군에 계속 근무하면서, 병사에게 반사회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정치사상에 불어넣는 임무에 종사했다.
1919년 독일 노동당(나치스의 전신)에 입당하고(SS555), 1921년 당수에 취임, 당 지도의 전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베르사유조약의 폐기, 격렬한 반유태주의를 제창하여 눈길을 끌었다. 23년 11월
했다. 독일이 패배한 후 1946년 뉘른베르크 연합국재판소에서 범죄단체로 선언했다.
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군대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
국제관계에서는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1월 자르지방의 인민투표에서 승리하여 이 지방을 독일영토로 복귀시켰으며, 3월 국민징병제를 채용실시하여 육군을 일시에 5배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6월에는 영국-독일해군협정 체결에 의해서 해군도 4배로 증강하였다. 36년 3월 독일군을 라인 비무장지대로 진주시켜 독일-프랑스 국경지대를 요새화하였다. 이처럼 독일의 실력이 유럽세계를 제압하게 되자 독일국민의 나치스에 대한 신뢰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실력을 배경으로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10월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시켰으며, 이어 1939년 3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정복하여 독일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여세를 몰아, 9월 폴란드에 단치히 자유시(自由市)를 독일에 반환할 것과 동(東)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기 위하여 폴란드령 포메른을 경유하는 치외법권적인 도로와 철도의 건설을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로부터 거절당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침입을 감행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폴란드와 구소련을 멸망시키고 그 지방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게르만족의 생존권(生存圈)으로 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치스는 45년 패전으로 연합군에 의하여 금지되고, 그 금지조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치당의 강령
나치당이 수많은 추종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몇 가지 공약과 강령에 나타낸 호소력의 덕분이었다. 나치즘은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었다. 유일하게 일관된 교의는 인종주의뿐이었다. 나치당의 민족주의적 정책이나 제국주의적 계획들은 이 인종주의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정당화되었다. 사실 이 인종주의는 정부의 단순한 방침이 아닌 대부분의 나치당 간부들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히틀러 체제에 역사상의 다른 제정 및 독재체제와 다른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 것도 이 인종주의에 바탕은 둔 광신 때문이었다.
① 국가지상주의
민족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국가의 권력은 확대되기 마련이다.
헤겔의 경우, 국가는 도덕적 이념의 현실태이며, 개인으로 하여금 목적을 실현하고 행복에 도달케 하는 유일한 조건,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란 신의 의사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구체화인 정부는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해야 하며, 최고의 심급(審級)인 국가를 초월한 도덕률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야말로 도덕의 유일한 원천이고, 단 하나의 권위있는 모범이라는 주장도 나치즘에서 말하는 사상의 아류에 불과하며, 국가의 이익만을 본위로 한 이른바 현실주의적 정치는 이렇게 하여 기반을 굳히고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
② 팽창주의
나치 강령 가운데 대외정책에 관한 조항들을 보면, 베르사이유 조약과 생 제르맹 조약의 즉각적 파기와 타국과의 동등한 대우를 명시하면서, 모든 독일 민족의 민족자주권에 입각한 대독일로의 통일을 주창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게르만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외국인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확장해야 한다는 국가 팽창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③ 군국주의
개인의 국가에 대한 완전한 참여는 자기희생이며 전쟁이야말로 개인이 국가와 일치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구제를 받는 행위 자체라 보았다. 전쟁이 탁월한 도덕적 행위라는 헤겔의 사상과 전쟁에 대해 문명의 불가결한 요소이며, 국민의 에너지 및 생명의 최고의 표현이라 찬양한 베른하르디의 사상 등이 바탕이 되어, 정치적 현실주의, 폭력주의, 전쟁긍정론 등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이론들이 게르만주의의 사상과 불가분의 이론이 되었다.
④ 범게르만주의
18세기 말엽, 다른 나라와 같이 독일에 있어서도 민족국가의 독자성과 국민의 존엄성이 중시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빌헬름 2세 치하인 1890년 이후, 범게르만주의는 정식으로 독일의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⑤ 반유대주의(반유태주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사상의 변함없는 특징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초기에 있어서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적 기반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아리안의 우수성, 특히 게르만 족의 우수성을 주장한 고비노의 사상이 바그너에 호응을 얻고, 바그너의 사위로 민족주의 옹호론자인 챔벌린이 히틀러와 알게 되면서, 반유대주의는 독일의 보수주의적 사상의 불가결한 일부가 되었다.
2.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
(1) 히틀러 그는 어떤 사람인가?
히틀러(Adolf Hitler, 1889. 4. 20~1945. 4. 30)는 독일의 정치가이고, 나치스의 당수이며, 제3제국의 총통이었던 인물이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실업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이 나빠서 중퇴했다. 1908년 빈에 살면서, 두 차례나 조형미술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실패했다.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부모의 유산과 고아연금의 뒷받침으로 예술가 기질의 생활을 보내다가, 육체노동과 그림엽서를 그려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13, 뮌헨으로 이주하고, 이듬해인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바이에른군에 지원하여 종군했다. 이때 전공에 의해 제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대전 후에도 바이에른군에 계속 근무하면서, 병사에게 반사회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정치사상에 불어넣는 임무에 종사했다.
1919년 독일 노동당(나치스의 전신)에 입당하고(SS555), 1921년 당수에 취임, 당 지도의 전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베르사유조약의 폐기, 격렬한 반유태주의를 제창하여 눈길을 끌었다. 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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