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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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본문
1 연희의 장소 포석정
2 과학적인 포석정의 구조와 포석정이 성지의 장소였다는 새로운 해석
1) 과학적인 포석정의 구조
2) 성지의 장소인 포석정

맺음말

본문내용

가 추측한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 때 일이다. 왕4년(927)9월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와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조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 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이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 내리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포석정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내용이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포석정지는 신라의 이궁에 있는 유상곡수연을 하던 유배거의 유적이다. 이 유배거에 물을 담은 술잔을 띄워 본 결과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소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작은 두개의 잔에 3분의 2정도 술을 담아 띄워 작은 잔은 수로를 흐르는데 10분 30초 큰 잔은 8분이 걸이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나 칠언시 한수는 쓸 수 있는 것이다.
#2 과학적인 포석정의 구조와 포석정이 성지의 장소였다는 새로운 해석
1) 과학적인 포석정의 구조
‘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다는 포석정은 고도의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결정체다’ 이런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선 포석정의 구조를 살펴보면 수로는 다양한 크기의 63개의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20cm 높이의 측벽 석재의 최대 폭은 15cm정도로 상당히 안정돼 있고 내측 함몰도 보이지 않는다. 형태는 마치 ‘포어’라는 물고기처럼 구불구불하고 동서의 긴축이 10.3m 폭은 7m수로의 총길이는 22m이며 수로 폭은 24~20cm로 일정치 않지만 평균 30cm정도다. 긴지름이 6.53m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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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06.01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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