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하의 언론에 관한 총체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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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에 관한 총체적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시대적 상황
(1) 정치․사회적 상황
(2) 경제적 상황
(3) 언론사적 상황
(4) 국제적 상황

2. 박정희 시대의 언론 현상
(1) 언론정책
(2) 시기별 언론 현상과 구체적 사례들

3. 박정희 시대 언론 현상의 특징
(1) 언론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
(2) 언론자본의 성장과 상업화
(3) 권언복합체의 형성
(4) 언론 자유를 위한 언론 운동

4. 마치며

본문내용

를 갚지 못한 《경향신문》을 강제 경매처분하였고, 기아산업이 불하와 가까운 정도의 헐값으로 인수하였다. 그 후 《경향신문》은 급격하게 친정부적인 논조를 띤 신문이 되었다.
⑥ 프레스카드제 (1971. 12. 13)
프레스카드제는 1971년 12월 13일 문공부장관이 신문협회·통신협회·편집인협회등 언론단체에 보낸 공한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에 당시 관변단체로 전락해 있었던 신문협회의 즉각적인 수용에 힘입어 전면 실시된다. 이 프레스카드제는 국가가 기자의 자격을 심사·허가하고 나아가 기자의 동태에 관한 제반사항을 파악하기 위한 장치로서 파시즘체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기자통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최형민 외, 『정치권력, 언론권력』, (새천년, 2000), p. 45
. 이를 계기로 지방주재 기자들의 다량 집단감원을 위한 지사·지국·보급소의 감축·조정을 단행하게 된다. 이 제도의 실시 이후 지방주재 기자의 대폭적인 집단해고 이외에도 이를 빙자로 한 기자 집단해고 사건이 서울과 지방 각지에서 속속 발생한다. 이는 프레스카드의 회수라는 방식으로 특정 신문을 간단하게 폐간시킬 수도 있는 제도였다. 실제로 《대구일보》의 경우 기자들에게 신문 부수 확장을 강요하고 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프레스카드를 회수함으로써 폐간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러한 프레스카드제는 무엇보다도 대폭적인 기자수의 감축을 낳는다. 1971년의 실제 기자수는 7090명이었는데 이듬해 카드를 발급받은 기자수는 4184명이었다. 2286명의 기자가(전체 32.3%) 도태되었던 것이다. 1973년에는 이로 인해 또다시 355명이 줄어든다. 이 과정에서 체제에 비판적인 기자들이 도태되었음은 물론이다 김해식, 『한국언론의 사회학』, (나남, 1994), p. 137
.
이 제도는 이후 카드의 유효기간을 1년으로 고정함으로써 그 통제권을 더욱 강화한다. 명목상 사이비 기자로 인한 피해를 막고 편의를 제공한다던 이 제도는 사실상 기자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⑦ 제1차 언론자유 수호 운동 (1971. 4. 15)
1969년 대학생들이 언론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하고 나선 이후 언론의 무기력을 자성하는 움직임이 소장 기자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기자들은 꺼져가는 언론 자유의 불씨를 되살릴 것을 선언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14개 언론사 기자들이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호응하여 잇달아 언론자유 수호를 선언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언론자유 수호 운동이다.
기자협회는 기자들의 선언을 즉각 지지하는 한편, 5월 15일 언론자유 수호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이 행동강령은 신문윤리강령 및 기자협회 강령의 준수, 관계 기관의 불법적인 기자 연행 거부, 불게재 기사에 대한 편집인과의 논의, 정보기관원의 언론기관 상주 또는 출입 반대 등을 천명하였다. 1973년에는 사실보도를 요구하는 제2차 언론자유 수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 박정희 시대의 언론 현상 - 제2기 (1972~1979)
◎ 자유언론 실천 운동과 권언복합체로서의 언론기업
이 시기의 언론현상은 위수령에서 유신헌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인 격동 속에 언론이 파시스트적인 정부의 언론 통제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언론의 자유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이 시기는 이러한 정부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기자들과 언론인이 아닌 기업인으로서 정치권력에 야합하여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언론사주들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여진다. 주요 사례를 통하여 이 시기의 언론 현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① 제2차 언론사 정비 (1972. 3.)
정부는 유신을 선포하기 전인 1972년 3월부터 다시 언론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지방신문이 그 대상이었다.
< 1972~3년 언론사 통폐합 현황>
언론사
통폐합 일시
내용
대구일보
대구경제일보
한국경제일보
동화통신
대한일보
1972. 3. 30
1972. 4. 1
1973. 3. 28
1973. 4. 30
1973. 5. 15
프레스카드 발급비위로 자진폐간
경영난으로 폐간
경영난으로 폐간
경영난으로 폐간
사장 구속으로 폐간
대전일보
중도일보
1973. 5. 25
충남일보로 통합
호남매일
1973. 5. 30
경영난으로 폐간
전북일보
전북매일
호남일보
1973. 6. 1
전북신문으로 통합
AK뉴스
1973. 6. 30
폐간
경기일보
경기매일
연합신문
1973. 9. 1
경기신문으로 폐간
※출처 : 한국기자협회, 《자유언론 수호의 발자취》, 1994, p. 207
이 정리 작업은 유신체제가 수립된 후인 1973년 9월까지 이어졌다. 정부는 프레스카드를 발급하면서 기자들에게 신문부수를 확장하고, 보증금의 명목으로 돈을 내도록 강요하면서 급료도 지급하지 않은 등의 사실을 들어 《대구일보》를 폐간시켰다. 이를 기점으로 한 도(道)에 하나의 지방지만을 둔다는 일도일지제의 설 속에 지방 언론사의 통폐합이 추진되었으나 실제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김민환, 『한국언론사』, (사회비평사, 1996), p. 488
. 또한 정부는 비리 등의 이유를 들어 언론사를 폐간시키기도 하였다. 정부는 1973년 5월 15일 그 동안 정부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온 《대한일보》를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을 이유로 하여 폐간시키기도 하였다.
② 자유언론 실천선언 (1974. 10. 24)
시국 보도에 대한 언론인들의 잇따른 연행 사태에 《한국일보》,《동아일보》의 기자들이 귀가하지 않고 편집국에서 농성하던 중, 1974년 10월 24일 오전 《동아일보》기자들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채택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유언론 실천 선언문’의 신문 게제는 《동아일보》경영진에 의해 일차적으로 거부되었으나, 결국 기자들의 요구에 사측이 굴복하여 다음날 1면 기사로 게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9개 신문, 통신, 방송국이 잇달아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동아일보》,《조선일보》가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과 같은 압력에 의해 굴복하여 언론인들을 해직하기 시작하면서 힘을 잃어갔다. 결국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주도한 기자들이 언론계에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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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07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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