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분열에서 통일로
Ⅱ. 본론 : 노부나가, 이에야스, 히데요시 비교론
1. “적은 혼노지에 있다.”
2. “차려진 밥상 먹기만 하면 된다”
3. “노부나가가 공격하는 곳은 초목도 말라 버리지만,
Ⅲ. 결론 : 이슬로 내려 이슬로 사라진 내 몸이런가
- 참고문헌
Ⅱ. 본론 : 노부나가, 이에야스, 히데요시 비교론
1. “적은 혼노지에 있다.”
2. “차려진 밥상 먹기만 하면 된다”
3. “노부나가가 공격하는 곳은 초목도 말라 버리지만,
Ⅲ. 결론 : 이슬로 내려 이슬로 사라진 내 몸이런가
- 참고문헌
본문내용
케치 미쓰히데와 야마자키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얻는다. 미쓰히데는 도주하는 도중에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혼노지의 변으로 인하여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최고의 권력자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때, 총수와 후계자인 장남 노부타다가 같은 지역에 있었던 탓에 함께 목숨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이후 일본에서는 절대로 제1인자와 제2인자는 같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관행이 생겼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과 부통령, 또는 회사의 회장과 사장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출장을 갈 경우 만약 사고로,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면 국가 전체, 또는 기업의 존립에 위협을 받게 되므로 위험의 개연성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도시의 직할화(사카이, 교토) 등의 경제정책과, 도로교량의 정리, 세키쇼의 철폐와 같은 교통정책은 그의 사후에도 히데요시에 의해 진행될 정도로 훌륭한 정책들이었다.
이런 노부나가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우리들에게 자주 회자된다. 즉 “적은 혼노지에 있다.”란 말이다. 이것은 ‘적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변에 있다’는 비유로 흔히 카이사르가 말한 “부루투스여 너마져”란 말과 함께 주위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정말로 영웅의 주위에는 왜 그렇게 그를 방해하는 자가 많은 지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항상 의아심이 든다. 물론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 대부분 역시 많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노부나가와 카이사르에 비해 운이 따라주었기에 역사에서 성공한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노부나가의 성품이 히데요시의 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일본의 역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히데요시와는 달리 노부나가는 자신의 가신을 가지고 있었고, 충분히 다이묘들을 제어할 수 있었으므로...
2. 도쿠가와 이에야스
흔히 노부나가를 ‘파괴의 영웅’, 천하통일을 완성한 히데요시를 ‘대업대성의 천하인’이라 부른다. 즉 노부나가가 부숴 놓은 집 위에 히데요시는 새 집을 짓기 위한 터를 다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잘 다져진 터에다 새 집을 짓는 역할은 누구 맡았을까? 바로 이에야스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도막부를 연 인물로 알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의 세 영웅 중 하나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되는 인물이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히데요시는 눈물을 흘렸지만, 이에야스는 이것을 교훈으로 삼게 된다. 즉 주도면밀하게 정세를 파악한 채 오랜 기다림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재능을 파악한 히데요시의 견제를 받게 되지만, 그는 그런 견제를 오히려 자신이 유리한 상화으로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분열에서 다시 통일로 이끌어낸다. 정말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어찌보면 미련하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에야스는 결국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물론 자신들의 경쟁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이긴 하지만. 그렇다해도 현재의 일본인들은 이에야스를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국시대의 세 영웅중에서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결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선두주자로서 전국시대를 이끌었다면 이에야스는 그 전국시대를 완전히 끝낸 인물이었다.
이에야스는 셋 중 가장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에야스만큼 ‘조직’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무장은 없었다. 그의 조직 활용력은 근대 사회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질서 있고 치밀했다. 이에야스는 오랜 세월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업에 전념했다. 때문에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자유로운 소년기를 보내지 못했다. 고독하고 썰렁한 방안에서 형설의 공으로 학문을 쌓는 동안 그에겐 자기 자신 외엔 부모까지도 남이라고 하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런 그의 눈에 히데요시의 정치는 창고에 보물을 잔뜩 쌓아 두고 문단속을 잊은 채 잠자리에 든 것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도대체 히데요시는 사상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어떤 제도를 체계 있게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믿고 따르라”, “나와 함께가 아니면 손해다”란 식인데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히데요시를 따랐다. 히데요시는 몸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임종시에 자뭇 거북한 상대일 수 있는 이에야스에게가지 남겨진 어린 아들을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에서 천하통이
한편 이 때, 총수와 후계자인 장남 노부타다가 같은 지역에 있었던 탓에 함께 목숨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이후 일본에서는 절대로 제1인자와 제2인자는 같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관행이 생겼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과 부통령, 또는 회사의 회장과 사장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출장을 갈 경우 만약 사고로, 두 사람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되면 국가 전체, 또는 기업의 존립에 위협을 받게 되므로 위험의 개연성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도시의 직할화(사카이, 교토) 등의 경제정책과, 도로교량의 정리, 세키쇼의 철폐와 같은 교통정책은 그의 사후에도 히데요시에 의해 진행될 정도로 훌륭한 정책들이었다.
이런 노부나가는 유명한 문구와 함께 우리들에게 자주 회자된다. 즉 “적은 혼노지에 있다.”란 말이다. 이것은 ‘적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변에 있다’는 비유로 흔히 카이사르가 말한 “부루투스여 너마져”란 말과 함께 주위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정말로 영웅의 주위에는 왜 그렇게 그를 방해하는 자가 많은 지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항상 의아심이 든다. 물론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들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 대부분 역시 많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노부나가와 카이사르에 비해 운이 따라주었기에 역사에서 성공한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노부나가의 성품이 히데요시의 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일본의 역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히데요시와는 달리 노부나가는 자신의 가신을 가지고 있었고, 충분히 다이묘들을 제어할 수 있었으므로...
2. 도쿠가와 이에야스
흔히 노부나가를 ‘파괴의 영웅’, 천하통일을 완성한 히데요시를 ‘대업대성의 천하인’이라 부른다. 즉 노부나가가 부숴 놓은 집 위에 히데요시는 새 집을 짓기 위한 터를 다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잘 다져진 터에다 새 집을 짓는 역할은 누구 맡았을까? 바로 이에야스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도막부를 연 인물로 알고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의 세 영웅 중 하나로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되는 인물이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히데요시는 눈물을 흘렸지만, 이에야스는 이것을 교훈으로 삼게 된다. 즉 주도면밀하게 정세를 파악한 채 오랜 기다림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재능을 파악한 히데요시의 견제를 받게 되지만, 그는 그런 견제를 오히려 자신이 유리한 상화으로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분열에서 다시 통일로 이끌어낸다. 정말로 오랜 기다림이었다. 어찌보면 미련하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에야스는 결국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물론 자신들의 경쟁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이긴 하지만. 그렇다해도 현재의 일본인들은 이에야스를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국시대의 세 영웅중에서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결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선두주자로서 전국시대를 이끌었다면 이에야스는 그 전국시대를 완전히 끝낸 인물이었다.
이에야스는 셋 중 가장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에야스만큼 ‘조직’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무장은 없었다. 그의 조직 활용력은 근대 사회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질서 있고 치밀했다. 이에야스는 오랜 세월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업에 전념했다. 때문에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자유로운 소년기를 보내지 못했다. 고독하고 썰렁한 방안에서 형설의 공으로 학문을 쌓는 동안 그에겐 자기 자신 외엔 부모까지도 남이라고 하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런 그의 눈에 히데요시의 정치는 창고에 보물을 잔뜩 쌓아 두고 문단속을 잊은 채 잠자리에 든 것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도대체 히데요시는 사상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어떤 제도를 체계 있게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믿고 따르라”, “나와 함께가 아니면 손해다”란 식인데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히데요시를 따랐다. 히데요시는 몸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임종시에 자뭇 거북한 상대일 수 있는 이에야스에게가지 남겨진 어린 아들을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에서 천하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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