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산업혁명의 개념
(2) 산업혁명의 기원
(3) 산업혁명의 전개
ⅰ) 면공업
ⅱ) 철공업
ⅲ) 면공업과 철공업의 비교
(4) 산업혁명의 결과
Ⅲ. 결론
Ⅱ. 본론
(1) 산업혁명의 개념
(2) 산업혁명의 기원
(3) 산업혁명의 전개
ⅰ) 면공업
ⅱ) 철공업
ⅲ) 면공업과 철공업의 비교
(4) 산업혁명의 결과
Ⅲ. 결론
본문내용
서 특히 북아메리카가 많은 양을 수입하였다. 북아메리카는 영국수출품의 수입비중이 33%로, 서인도제도 25%, 동인도 및 아프리카 13%보다 높았고, 1787-1790년에 북아메리카는 공산품 수입의 87%를 영국에서 수입함으로서 원료공급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수출측면에서도 영국면직물산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라)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기(1800-1840)
이 시기는 산업혁명 도약기의 식민지무역을 통해 면공업이 더욱 급격하게 발전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와 식민지무역은 영국면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는 면공업이 그 동안 해외시장개척만을 통해 성장해왔던 수출지향적 산업이었던 1800년 이전에 비해, 1802년 면제품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 정도가 되고, 1812년에는 7-8%를 점하면서 이 때부터 영국의 전통적 직물산업이었던 모직물공업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공업의 국민총생산의 비중을 당시 나폴레옹전쟁에 의한 대륙봉쇄령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으나, 1810년도에도 이미 면제품은 수출총액의 55%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통계가 있기 때문에, 워털루전쟁 이전에 이미 영국의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기저가 되는 공업으로서 영국산업전체를 이끌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면직물이 평균 영국수출총액의 50%를 점하고 있고, 특히 식민지무역의 최종적 결과인 나폴레옹전쟁(1793-1815)이 미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식민지쟁탈 경쟁국들에 승리함으로서, 이 전쟁이 끝난 후인 1820-1830년도 중반까지 면직물의 총수출액이 영국 총수출액의 무려 60%에 접근할 정도로 면직공업은 비약적 발전을 하였다., 이는 1820-1830년도 중반까지 산업생산의 성장률이 1800년도 전반기의 여타시기가 20-30%인데 반해 45%를 약간 상회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업화의 비율에서도 1830년도에서 1830년대 중반까지 50%를 유지하다가 1840년 45%, 이후 시기부터는 40% 아래로 처지게 된다.
그럼, 구체적으로 식민지를 통한 원면이나, 목화의 공급량이나 비중은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영국면직물의 식민지로의 수출 양상 또한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아보자.
① 원면, 목화 공급측면
이 시기부터는 예전 원면을 직접 수입하던 형태를 벗어나서 영국이 식민지에서 원면수입을 직접 할 수 있는 방식, 즉 식민지에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면서 노예제에 의해 운영되는 목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에 의해 목화를 수입함으로서 면직물제조를 위한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남부의 광대한 목화밭에서의 플랜테이션은 1800년대부터 미국시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50년대 말까지 지속적으로 영국에 목화를 공급하였다. 영국의 면직공업이 절정기였던 1830년대 중반에는 1830년도에 목화수입량이 2억 6400만 파운드이던 것이, 1840년도까지 단 10년간에 무려 2.5배 정도가 증가한 5억 9250만 파운드였다. 그리고 이 때인 1830년 중엽에는 영국총수입의 20%가 목화수입과 원면수입일 정도였다.
② 면직물의 수출측면
면직물의 수출은 확대된 식민지와 영국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계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 인도의 경우 전세기까지만 해도 인도의 면직물은 풍부한 원면과 면직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숙련된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면직물을 수출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의 면공업이 18세기 말 원면의 수입이 늘어나고, 해외수요가 증대되어 수츨액비중이 20% 를 넘어간 후, 인도의 면직물수출은 영국의 면공업수출증대에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인도의 면공업은 체계적으로 해체를 당하여 인도는 영국의 면제품시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1820년도에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천 백만 야드를 수입하고 있었으나, 영국면제품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는 1840년도에는 1억 4천 5백만 야드를 수입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는 나폴레옹전쟁동안에 영국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스페인과 포르투칼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후로, 이 대륙은 영국의 경제적 종속국이 되었다. 1820년도에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이 수입했던 면제품의 1/4 정도만을 수입했으나, 20년 후인 1840년도에는 유럽수입 면제품의 절반 정도를 수입했다.
또한,1820년대 영국면포의 수출비중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정도는 51%였고, 나머지는 라틴아메리카, 미국, 인도가 각각 22%, 10%, 6% 이었으나, 10년후 1830년도에 그 비중은 유럽이 31%로 급감하였고, 대신 그 만큼 라틴아메리카에서 10%,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각각 6%, 7%씩 증대되어 라틴아메리카가 33%, 미국이 16%, 인도가 13%를 수입하여 면포의 60% 이상이 역시 식민지 무역을 통해서였다.
ⅱ) 철공업
산업혁명을 이끌은 또 하나의 산업인 철공업은 면공업의 변혁보다는 덜 급진적인 것이었다. 면공업은 철공업에서 처럼 기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까지 변혁이 있었다 .즉 가내수공업적 제조유형이 자본가적 공장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철공업은 이미 조직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면공업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1780년대에서 1840년대까지 면공업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수준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으나, 1780-1800 사이의 일단의 급속한 성장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가) 산업혁명전의 철공업
면공업이 1780년대부터 일련의 혁신적인 공업화과정을 겪는 동안 철공업은 영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산업혁명전까지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풍부한 철광석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1710-1720년에 철광석수입은 1만5천-2만2천 톤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720년경 잉글랜드에는 약 60기의 용광로를 가지고 년간 1만7천톤 정도의 선철을 생산할 뿐이었다. 반면, 선철의 수입은 1765년까지 5만7천톤까지 천천히 늘다가 그 이후부터 수입량이 감소하였다. 이 시기 철공업은 이미 쇠퇴산업이었다.
당시 철공업이 쇠퇴하고 있었던 이유는 연료의 부족이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증명해주는 곳이 써
(라)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기(1800-1840)
이 시기는 산업혁명 도약기의 식민지무역을 통해 면공업이 더욱 급격하게 발전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와 식민지무역은 영국면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는 면공업이 그 동안 해외시장개척만을 통해 성장해왔던 수출지향적 산업이었던 1800년 이전에 비해, 1802년 면제품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 정도가 되고, 1812년에는 7-8%를 점하면서 이 때부터 영국의 전통적 직물산업이었던 모직물공업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공업의 국민총생산의 비중을 당시 나폴레옹전쟁에 의한 대륙봉쇄령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으나, 1810년도에도 이미 면제품은 수출총액의 55%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통계가 있기 때문에, 워털루전쟁 이전에 이미 영국의 면직공업은 산업혁명의 기저가 되는 공업으로서 영국산업전체를 이끌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전체적으로 면직물이 평균 영국수출총액의 50%를 점하고 있고, 특히 식민지무역의 최종적 결과인 나폴레옹전쟁(1793-1815)이 미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식민지쟁탈 경쟁국들에 승리함으로서, 이 전쟁이 끝난 후인 1820-1830년도 중반까지 면직물의 총수출액이 영국 총수출액의 무려 60%에 접근할 정도로 면직공업은 비약적 발전을 하였다., 이는 1820-1830년도 중반까지 산업생산의 성장률이 1800년도 전반기의 여타시기가 20-30%인데 반해 45%를 약간 상회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업화의 비율에서도 1830년도에서 1830년대 중반까지 50%를 유지하다가 1840년 45%, 이후 시기부터는 40% 아래로 처지게 된다.
그럼, 구체적으로 식민지를 통한 원면이나, 목화의 공급량이나 비중은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영국면직물의 식민지로의 수출 양상 또한 어떻게 변하였는지 알아보자.
① 원면, 목화 공급측면
이 시기부터는 예전 원면을 직접 수입하던 형태를 벗어나서 영국이 식민지에서 원면수입을 직접 할 수 있는 방식, 즉 식민지에서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면서 노예제에 의해 운영되는 목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에 의해 목화를 수입함으로서 면직물제조를 위한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남부의 광대한 목화밭에서의 플랜테이션은 1800년대부터 미국시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50년대 말까지 지속적으로 영국에 목화를 공급하였다. 영국의 면직공업이 절정기였던 1830년대 중반에는 1830년도에 목화수입량이 2억 6400만 파운드이던 것이, 1840년도까지 단 10년간에 무려 2.5배 정도가 증가한 5억 9250만 파운드였다. 그리고 이 때인 1830년 중엽에는 영국총수입의 20%가 목화수입과 원면수입일 정도였다.
② 면직물의 수출측면
면직물의 수출은 확대된 식민지와 영국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계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었다. 인도의 경우 전세기까지만 해도 인도의 면직물은 풍부한 원면과 면직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숙련된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면직물을 수출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의 면공업이 18세기 말 원면의 수입이 늘어나고, 해외수요가 증대되어 수츨액비중이 20% 를 넘어간 후, 인도의 면직물수출은 영국의 면공업수출증대에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인도의 면공업은 체계적으로 해체를 당하여 인도는 영국의 면제품시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1820년도에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천 백만 야드를 수입하고 있었으나, 영국면제품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는 1840년도에는 1억 4천 5백만 야드를 수입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는 나폴레옹전쟁동안에 영국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스페인과 포르투칼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후로, 이 대륙은 영국의 경제적 종속국이 되었다. 1820년도에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이 수입했던 면제품의 1/4 정도만을 수입했으나, 20년 후인 1840년도에는 유럽수입 면제품의 절반 정도를 수입했다.
또한,1820년대 영국면포의 수출비중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정도는 51%였고, 나머지는 라틴아메리카, 미국, 인도가 각각 22%, 10%, 6% 이었으나, 10년후 1830년도에 그 비중은 유럽이 31%로 급감하였고, 대신 그 만큼 라틴아메리카에서 10%,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각각 6%, 7%씩 증대되어 라틴아메리카가 33%, 미국이 16%, 인도가 13%를 수입하여 면포의 60% 이상이 역시 식민지 무역을 통해서였다.
ⅱ) 철공업
산업혁명을 이끌은 또 하나의 산업인 철공업은 면공업의 변혁보다는 덜 급진적인 것이었다. 면공업은 철공업에서 처럼 기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까지 변혁이 있었다 .즉 가내수공업적 제조유형이 자본가적 공장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철공업은 이미 조직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면공업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던 1780년대에서 1840년대까지 면공업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수준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으나, 1780-1800 사이의 일단의 급속한 성장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가) 산업혁명전의 철공업
면공업이 1780년대부터 일련의 혁신적인 공업화과정을 겪는 동안 철공업은 영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산업혁명전까지 자체 내에 가지고 있던 풍부한 철광석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1710-1720년에 철광석수입은 1만5천-2만2천 톤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720년경 잉글랜드에는 약 60기의 용광로를 가지고 년간 1만7천톤 정도의 선철을 생산할 뿐이었다. 반면, 선철의 수입은 1765년까지 5만7천톤까지 천천히 늘다가 그 이후부터 수입량이 감소하였다. 이 시기 철공업은 이미 쇠퇴산업이었다.
당시 철공업이 쇠퇴하고 있었던 이유는 연료의 부족이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증명해주는 곳이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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