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흥선대원군vs명성황후
1)흥선대원군
2)명성황후
2. 쇄국정책vs개화정책
1)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2)명성황후와 개화파의 개방. 개화 정책
① 개화정책의 내용
②근대화를 위한 개화정책의 의의
3. 두 라이벌에 대한 평가
1) 흥선대원군
①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
②메이지 유신을 통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비판
2) 명성황후
①기존에 있어왔던 부정적 평가
②명성황후에 대한 나의 재평가
결론
※참고자료............................................................................(9)
본론
1. 흥선대원군vs명성황후
1)흥선대원군
2)명성황후
2. 쇄국정책vs개화정책
1)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2)명성황후와 개화파의 개방. 개화 정책
① 개화정책의 내용
②근대화를 위한 개화정책의 의의
3. 두 라이벌에 대한 평가
1) 흥선대원군
①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
②메이지 유신을 통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비판
2) 명성황후
①기존에 있어왔던 부정적 평가
②명성황후에 대한 나의 재평가
결론
※참고자료............................................................................(9)
본문내용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한 것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둘째, 명성황후는 개국과 동시에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비해 그에대한 대응력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서유럽의 발전을 현실로 인정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개항하고 나서는 국가위기를 더욱 절감하여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에 비해 너무도 소극적이었다. 예컨대 강화도 조약을 맺을 당시 조선측 대표 신헌은 일본의 수행원이 일본의 화폐 제도를 설명하려 하자 "사대부는 덕치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 문제와 같은 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며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노동을 모른다는 증거로 자신의 길게 기른 손톱을 일본측 대표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이 이 조약을 맺기 이전에 청국이나 러시아의 반응은 물론 조선 정계의 내분 상태까지 사전에 파악하고서 조약 체결에 나선 것과 비교하면 당시 집권층이 국제 정보나 외국의 경제적 침략에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본에 비해 개혁의 시기가 늦은 것뿐만 아니라 개화정책의 목적과 방향이 뚜렷하지 못하여 외세에 의해 개화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내용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다. 근대적 개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인 지주전호제의 타파를 등한시하였고. 정치수준이 봉건적인 충군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민권신장과 같은 근대적 사상에 부합하는 정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개항 이후 외국 상인의 활동에 의해서 피해를 본 농민이나 상인 등 민생의 문제해결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등의 무능력함을 보였다. 결국 근대화에 대한 지식부족과 개화의 방향을 자기중심적이며 관념적인 쪽으로 이끌어 간 것으로 인해 근대 국가로의 도약이라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러한 근대적 사상이 일부 상층 엘리트들만의 사상으로 그치게 되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침투시키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왜 개화가 시급한 것이지, 왜 근대적 개혁 운동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진보적이며 서유럽의 새 문물을 도입하려는 의욕은 강했으나. 그를 뒷받침해 줄만한 지지기반이 좁고 약했다. 따라서 개화정책을 근대화의 시도가 큰 힘으로 뭉칠 수 없는 가운데 양반 유생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양반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임오군란 때는 구식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개화 반대를 외치며 참가하였다. 또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 운동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국론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 하여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때문에 명성황후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자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하였고, 결국에는 외세의 힘 앞에 무참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참고 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frm=nt)
엠파스 백과사전 (http://alldic.empas.com/)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05/05-10/html
http://www.hankooki.com/200110/np20001100421191oh010.htm
누드교과서 국사 (상),(하)/이투스
1880년대 초기의 개화정책에 관한연구/이영철
새롭게읽는 명성황후이야기/유형종
한국사를 바꾼여인들/책이있는 마을. 2002. 황원갑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에 대한 일연구/인하대학교. 1987. 황원자
둘째, 명성황후는 개국과 동시에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비해 그에대한 대응력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서유럽의 발전을 현실로 인정한 일본은 1854년 미국에 개항하고 나서는 국가위기를 더욱 절감하여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이에 비해 너무도 소극적이었다. 예컨대 강화도 조약을 맺을 당시 조선측 대표 신헌은 일본의 수행원이 일본의 화폐 제도를 설명하려 하자 "사대부는 덕치에 대해서나 생각하지 통상 문제와 같은 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며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노동을 모른다는 증거로 자신의 길게 기른 손톱을 일본측 대표들에게 내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이 이 조약을 맺기 이전에 청국이나 러시아의 반응은 물론 조선 정계의 내분 상태까지 사전에 파악하고서 조약 체결에 나선 것과 비교하면 당시 집권층이 국제 정보나 외국의 경제적 침략에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본에 비해 개혁의 시기가 늦은 것뿐만 아니라 개화정책의 목적과 방향이 뚜렷하지 못하여 외세에 의해 개화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혁의 내용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있다. 근대적 개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인 지주전호제의 타파를 등한시하였고. 정치수준이 봉건적인 충군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민권신장과 같은 근대적 사상에 부합하는 정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개항 이후 외국 상인의 활동에 의해서 피해를 본 농민이나 상인 등 민생의 문제해결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등의 무능력함을 보였다. 결국 근대화에 대한 지식부족과 개화의 방향을 자기중심적이며 관념적인 쪽으로 이끌어 간 것으로 인해 근대 국가로의 도약이라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러한 근대적 사상이 일부 상층 엘리트들만의 사상으로 그치게 되어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침투시키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왜 개화가 시급한 것이지, 왜 근대적 개혁 운동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진보적이며 서유럽의 새 문물을 도입하려는 의욕은 강했으나. 그를 뒷받침해 줄만한 지지기반이 좁고 약했다. 따라서 개화정책을 근대화의 시도가 큰 힘으로 뭉칠 수 없는 가운데 양반 유생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양반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임오군란 때는 구식 군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도 개화 반대를 외치며 참가하였다. 또한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 운동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국론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 하여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때문에 명성황후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자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하였고, 결국에는 외세의 힘 앞에 무참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참고 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frm=nt)
엠파스 백과사전 (http://alldic.empas.com/)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05/05-10/html
http://www.hankooki.com/200110/np20001100421191oh010.htm
누드교과서 국사 (상),(하)/이투스
1880년대 초기의 개화정책에 관한연구/이영철
새롭게읽는 명성황후이야기/유형종
한국사를 바꾼여인들/책이있는 마을. 2002. 황원갑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에 대한 일연구/인하대학교. 1987. 황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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