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의병전쟁의 역사적 위치
Ⅱ.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Ⅲ. 호남의병의 특징
Ⅳ. 의병전쟁의 의의
Ⅱ. 의병전쟁사의 시기구분 문제
Ⅲ. 호남의병의 특징
Ⅳ. 의병전쟁의 의의
본문내용
9년 일제의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호남의병의 희생이 어디 보다 컸고 참혹하였다.
그런데 역사는 인명과 집이라는 물질적 수량의 힘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인명과 집을 버리고 얻은 의병들의 높은 정신과 혼의 힘으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혼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렇게 보면 호남벌을 받치고 있는 의병정신이 한국사 발전의 믿거름이 되었던가는 후세인의 책임이다. 그런데 忠道-忠君-忠國-忠民으로 성장 발전한 의병정신이 있었으므로 1919년 3·1운동은 물론, 1920년대 호남일대에서 혹은 진도, 암태도, 하이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강렬한 농민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러한 민족적 힘은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했다고 보면, 그 속에 줄기 차게 흐르는 역사 발전의 동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병전쟁은 실패한 전쟁이 아니라 민족사 발전의 기반을 형성한 발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실패한 역사로 치부되어서 안된다는 말이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 속에서 전개한 반제국주의적 독립운동일 경우, 혹은 봉건체제에 대한 혁명운동일 경우, 어느 역사적 사건도 단번에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없다. 프랑스혁명도, 신해혁명도, 한국의 4·19혁명도 수십년의 기간을 통하여 꾸준한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목적에 접근하고 달성한 것이다. 독립운동도 같았다. 혹은 미국의 독립전쟁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미주에 이민한 영국인이 토착민인 인디언을 죽이고, 죽인 영국인이 모국인 영국에 대하여 독립전쟁으로 독립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주체와 객체가 한국독립운동과 달랐다. 한국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같은 경우를 상정한다면 조선에 이민한 일본인이 일본 본국에 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을 미국에 적용한다면 인디언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한국의 의병전쟁은 그야말로 민족 주체적인 항쟁이었다. 그 누구의 지원도 충고도 받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항전하던 의병장과 의병 누구에게도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야말로 독불장군처럼 항전하였다. 거기에서 역사는 강인한 민족주의를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다. 그것이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의 정의였다.
처음에는 역사적 전통에 근거하여 忠道·忠君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중기의병부터 忠國·忠民의식이 부상하여 후기의병에서는 忠民의병으로 확산 발전하였다. 그러한 변화 발전은 앞에서 시기별 특징에서 보았듯이 호남지방에서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다. 正義의 개념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의의 개념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통에서 근대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소중하게 보전하는 사상과 신념이다. 어느 것이 정의인가는 고대가 다르고, 중세가 다르고, 근대가 달랐다. 문제는 정의를 귀하게 여기는 신념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봉건적 유생과 반봉건적 농민이 함께 싸우고 함께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한 정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사상 풍토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되었던가?
그것은 역사의 산물이었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사육신과 생육신의 저항정신을 비롯하여 양학포나 백휴암 등, 호남지방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기묘사화의 선비정신에서, 특히 호남 곳곳에 핏자욱을 남겨 놓은 임진왜란 또는 정유재란의 의병정신에서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병인양요의 의병에서 또 동학농민전쟁의 농민의 저항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 맥맥히 이어온 정의감을 기초하여 일제의 침략을 맞아서 의병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끈질기게 추진한 민주화운동도 그러한 역사적 정의감을 기초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병전쟁 처럼 광주학생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때 그때에 돌발적인 소출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인데, 그러한 역사적 맥락은 호남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히 호남에서 의병전쟁의 역사를 더욱 개발하고 그의 유적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전통시대의 역사 유적은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하면서 독립운동의 유적은 마지 못해 표지판이나 세운 정도의 경우를 본다. 하늘이 두려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그러한 역사적 교훈은 그 지방의 교훈으로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온 나라 온 겨레의, 정의를 찾는 온 인류의 교훈으로 확산되도록 선양하고 다듬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이치로 다른 지방과 남의 나라에서 이루어 놓은 정의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을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정의와 양심을 존중하는 미래의 역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철없는 사회진화론과 반인류적 신패권주의가 지구를 휩쓸고 있는 마당에 더욱 절실한 반성의 교훈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몇가지를 부언해 두기로 한다. 먼저 호남의병사 연구에서 1894년 갑오왜란을 맞아 근왕적 의병의 봉기를 위하여 국왕의 소모사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적을 찾는 것과, 중기의병에서 광무농민운동이 의병으로 전환한 문제와, 일제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사적을 추적·천착하는 과제를 이 방면 연구에서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에 의병전쟁사의 유일한 유적인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기슭의 의병성과 무기제조 유적이 훌륭하게 보존되기를 간절히 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의병 유적지가 훗날에 어린이 놀이터로, 초동의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을 것이고, 또 6·25를 전후해서는 국군이나 인민군의 야영지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이 놀이터나 초동의 밀월 장소나 군대 야영지의 유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서울의 성곽이 다양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의 유적인 것처럼, 의병성은 의병성인 것이다.
끝으로 光州廣域市에서 전국 어디 보다 먼저 魚登山 의병 유적지에 대한 정화사업을 일으킨 데 대하여 이 방면의 연구자로서 경의를 표하면서 글을 맺는다.
그런데 역사는 인명과 집이라는 물질적 수량의 힘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인명과 집을 버리고 얻은 의병들의 높은 정신과 혼의 힘으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혼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렇게 보면 호남벌을 받치고 있는 의병정신이 한국사 발전의 믿거름이 되었던가는 후세인의 책임이다. 그런데 忠道-忠君-忠國-忠民으로 성장 발전한 의병정신이 있었으므로 1919년 3·1운동은 물론, 1920년대 호남일대에서 혹은 진도, 암태도, 하이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강렬한 농민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러한 민족적 힘은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했다고 보면, 그 속에 줄기 차게 흐르는 역사 발전의 동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병전쟁은 실패한 전쟁이 아니라 민족사 발전의 기반을 형성한 발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실패한 역사로 치부되어서 안된다는 말이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 속에서 전개한 반제국주의적 독립운동일 경우, 혹은 봉건체제에 대한 혁명운동일 경우, 어느 역사적 사건도 단번에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없다. 프랑스혁명도, 신해혁명도, 한국의 4·19혁명도 수십년의 기간을 통하여 꾸준한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목적에 접근하고 달성한 것이다. 독립운동도 같았다. 혹은 미국의 독립전쟁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미주에 이민한 영국인이 토착민인 인디언을 죽이고, 죽인 영국인이 모국인 영국에 대하여 독립전쟁으로 독립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주체와 객체가 한국독립운동과 달랐다. 한국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과 같은 경우를 상정한다면 조선에 이민한 일본인이 일본 본국에 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을 미국에 적용한다면 인디언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한국의 의병전쟁은 그야말로 민족 주체적인 항쟁이었다. 그 누구의 지원도 충고도 받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항전하던 의병장과 의병 누구에게도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야말로 독불장군처럼 항전하였다. 거기에서 역사는 강인한 민족주의를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다. 그것이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의 정의였다.
처음에는 역사적 전통에 근거하여 忠道·忠君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중기의병부터 忠國·忠民의식이 부상하여 후기의병에서는 忠民의병으로 확산 발전하였다. 그러한 변화 발전은 앞에서 시기별 특징에서 보았듯이 호남지방에서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다. 正義의 개념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의의 개념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통에서 근대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소중하게 보전하는 사상과 신념이다. 어느 것이 정의인가는 고대가 다르고, 중세가 다르고, 근대가 달랐다. 문제는 정의를 귀하게 여기는 신념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봉건적 유생과 반봉건적 농민이 함께 싸우고 함께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한 정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사상 풍토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되었던가?
그것은 역사의 산물이었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사육신과 생육신의 저항정신을 비롯하여 양학포나 백휴암 등, 호남지방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기묘사화의 선비정신에서, 특히 호남 곳곳에 핏자욱을 남겨 놓은 임진왜란 또는 정유재란의 의병정신에서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병인양요의 의병에서 또 동학농민전쟁의 농민의 저항정신에서 그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 맥맥히 이어온 정의감을 기초하여 일제의 침략을 맞아서 의병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해방후 끈질기게 추진한 민주화운동도 그러한 역사적 정의감을 기초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병전쟁 처럼 광주학생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도 그때 그때에 돌발적인 소출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인데, 그러한 역사적 맥락은 호남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히 호남에서 의병전쟁의 역사를 더욱 개발하고 그의 유적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어떤 지방에서는 전통시대의 역사 유적은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하면서 독립운동의 유적은 마지 못해 표지판이나 세운 정도의 경우를 본다. 하늘이 두려워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그러한 역사적 교훈은 그 지방의 교훈으로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온 나라 온 겨레의, 정의를 찾는 온 인류의 교훈으로 확산되도록 선양하고 다듬어져야 한다. 그와 같은 이치로 다른 지방과 남의 나라에서 이루어 놓은 정의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을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정의와 양심을 존중하는 미래의 역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철없는 사회진화론과 반인류적 신패권주의가 지구를 휩쓸고 있는 마당에 더욱 절실한 반성의 교훈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몇가지를 부언해 두기로 한다. 먼저 호남의병사 연구에서 1894년 갑오왜란을 맞아 근왕적 의병의 봉기를 위하여 국왕의 소모사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적을 찾는 것과, 중기의병에서 광무농민운동이 의병으로 전환한 문제와, 일제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사적을 추적·천착하는 과제를 이 방면 연구에서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에 의병전쟁사의 유일한 유적인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기슭의 의병성과 무기제조 유적이 훌륭하게 보존되기를 간절히 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의병 유적지가 훗날에 어린이 놀이터로, 초동의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을 것이고, 또 6·25를 전후해서는 국군이나 인민군의 야영지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이 놀이터나 초동의 밀월 장소나 군대 야영지의 유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서울의 성곽이 다양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왕조의 유적인 것처럼, 의병성은 의병성인 것이다.
끝으로 光州廣域市에서 전국 어디 보다 먼저 魚登山 의병 유적지에 대한 정화사업을 일으킨 데 대하여 이 방면의 연구자로서 경의를 표하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