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박정희 생애
Ⅲ. 박정희 정치관
Ⅳ. 박정희 경제정책
Ⅴ. 박정희 역사관
Ⅵ. 맺음말
Ⅱ. 박정희 생애
Ⅲ. 박정희 정치관
Ⅳ. 박정희 경제정책
Ⅴ. 박정희 역사관
Ⅵ. 맺음말
본문내용
에 박정권이 새마을교육을 통해 상당수의 국민을 교육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면 박정권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박정권은 교육을 통해 새마을 운동의 목적, 의의, 필요성을 설명함으로써 피교육자의 인지 구조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국가건설을 위한 실천적 동참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유신체제 선포 후 불안해진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이용한 것이다.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2000
결국, 박정권의 새마을운동은 농촌 근대화라는 논리로 출발했지만, 유신체제의 선포 후에는 체제 안정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박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성장으로 만회하려는 욕구 그리고 자립적인 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결합되어 등장한 것이었다. 경제성장은 결코 박정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간과한 채 경제 성장의 공을 박정권에게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왜곡이다.
Ⅴ. 박정희 역사관
1.영웅사관 복원
1) 이순신
이순신에 대한 박정희 개인의 관심은 그가 18년 동안의 집권 기간 중 이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열네 번이나 참석했으며, 현충사 성역화 공사 관계관 회의에 참석하고 공사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동아일보」, 1992년 4월 27일
박정권의 이순신 신격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이순신 관련 유적의 보수와 확장 사업이었다. 이에 따라 현충사는 1996년부터 1975까지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사업을 통해 사당을 중건하고 기념관을 신축했으며 이순신 생가를 보수하고 묘역과 주변 환경을 정화했으며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두 번째 사례는 이순신 관련 건축물의 건립으로,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세종로 한복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다. 수도 서울의 중심에 세워졌는데, 이는 이순신을 호국선열의 상징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사례는 이순신을 기리는 제례 또는 의식이 대규모로 열리기 시작했는데 박정희는 거의 매년 참석했다. 네 번째 사례는 교육을 통한 이순신의 홍보 작업이다. 박정권은 이순신의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난중일기>와 <충무공 전기> 등 관련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고, 초중고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정했으며, 많은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현충사로 가기도 했다.
박정권이 이렇게 이순신을 신격화하여 얻고자 했던 효과는 여러 가지 였다. 먼저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둘째, 이순신의 구국 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 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려 했다. 셋째, 박정희는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야당 세력을 비판했다. 여기서 박정권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선인 반면, 야당은 조신과 마찬가지로 분열과 당쟁을 일삼는 악으로 묘사되었다.
한마디로 박정권은 이순신을 애국애족의 정신과 예지 및 용기를 가진 위인이라고 신격화 하면서, 자신들을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고자 했다.
2) 세종대왕
세종대왕에 대한 찬양은 개인보다는 그가 이룬 업적, 특히 한글에 비중을 두었다. 신격화 작업도 정부뿐 아니라 세종대왕기념 사업회라는 사회단체에 의해 동시에 진행되었다. 세종대왕 신격화와 관련하여 박정권이 먼저 주도한 사업은 세종대왕과 관련된 유적의 정비였다. 둘째, 세종대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독창적 민족문화인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했으며, 1975년 건립한 민족문화의 전당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했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웠다.
그러면 박정권이 세종대왕을 신격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세종문화회관의 건립에서 볼 수 있듯이 박정권은 자신들의 경제발전의 성공을 한민족의 새로운 ‘황금시대’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박정권은 세종대왕 및 한글 강조를 통해 자신이 ‘민족 주체성’을 세운 정권임을 과시하려 했다. 게다가 이를 통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의 전용화를 결정한 박정권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정권이 주도한 이러한 역사적 인물의 신격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결국, 박정권은 이순신의 신격화와 세종대왕의 찬양 정책을 통해 자신을 민족적 위기에서 구해낸 동시에 위대한 민족문화를 부활·발전시킨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Ⅵ. 맺음말
아직도 우리사회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남아있다. 오늘날 이만큼의 한국 산업화는 대단히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성공했는가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성과가 있기까지 지불한 많은 비용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박정희의 얄팍한 속셈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 시대는 역사적 연구와 교훈의 대상이지, 향수와 모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정희는 영웅이나 악인이 아니라,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차분하게 분석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당한 평가가 이뤄질 때가 되었다.
※ 참고문헌
김영수, 「박정희의 정치리더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001
신용구,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뜨인돌, 2000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창비, 2003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2000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1998
한승조, 「박정희 붐, 우연인가 필연이가」, 말과 창조사, 1999
<참고 사진>
결국, 박정권의 새마을운동은 농촌 근대화라는 논리로 출발했지만, 유신체제의 선포 후에는 체제 안정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박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당시 한국의 열악한 경제적 조건, 군사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재를 경제 성장으로 만회하려는 욕구 그리고 자립적인 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결합되어 등장한 것이었다. 경제성장은 결코 박정권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악의 노동조건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경제 성장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을 간과한 채 경제 성장의 공을 박정권에게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왜곡이다.
Ⅴ. 박정희 역사관
1.영웅사관 복원
1) 이순신
이순신에 대한 박정희 개인의 관심은 그가 18년 동안의 집권 기간 중 이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열네 번이나 참석했으며, 현충사 성역화 공사 관계관 회의에 참석하고 공사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동아일보」, 1992년 4월 27일
박정권의 이순신 신격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이순신 관련 유적의 보수와 확장 사업이었다. 이에 따라 현충사는 1996년부터 1975까지 무려 네 차례에 걸친 사업을 통해 사당을 중건하고 기념관을 신축했으며 이순신 생가를 보수하고 묘역과 주변 환경을 정화했으며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두 번째 사례는 이순신 관련 건축물의 건립으로,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세종로 한복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다. 수도 서울의 중심에 세워졌는데, 이는 이순신을 호국선열의 상징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의 자주국방 의지를 간접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세 번째 사례는 이순신을 기리는 제례 또는 의식이 대규모로 열리기 시작했는데 박정희는 거의 매년 참석했다. 네 번째 사례는 교육을 통한 이순신의 홍보 작업이다. 박정권은 이순신의 애국애족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난중일기>와 <충무공 전기> 등 관련 서적의 출판을 장려했고, 초중고교 학생들의 필독서로 정했으며, 많은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현충사로 가기도 했다.
박정권이 이렇게 이순신을 신격화하여 얻고자 했던 효과는 여러 가지 였다. 먼저 이순신이 가지고 있는 반일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친일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둘째, 이순신의 구국 영웅적인 이미지를 통해 군인 출신 대통령의 통치를 합리화하려 했다. 셋째, 박정희는 이순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논리로 야당 세력을 비판했다. 여기서 박정권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선인 반면, 야당은 조신과 마찬가지로 분열과 당쟁을 일삼는 악으로 묘사되었다.
한마디로 박정권은 이순신을 애국애족의 정신과 예지 및 용기를 가진 위인이라고 신격화 하면서, 자신들을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만이 진정한 애국자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고자 했다.
2) 세종대왕
세종대왕에 대한 찬양은 개인보다는 그가 이룬 업적, 특히 한글에 비중을 두었다. 신격화 작업도 정부뿐 아니라 세종대왕기념 사업회라는 사회단체에 의해 동시에 진행되었다. 세종대왕 신격화와 관련하여 박정권이 먼저 주도한 사업은 세종대왕과 관련된 유적의 정비였다. 둘째, 세종대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독창적 민족문화인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1970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했으며, 1975년 건립한 민족문화의 전당을 세종문화회관으로 명명했고, 어린이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을 세웠다.
그러면 박정권이 세종대왕을 신격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세종문화회관의 건립에서 볼 수 있듯이 박정권은 자신들의 경제발전의 성공을 한민족의 새로운 ‘황금시대’로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박정권은 세종대왕 및 한글 강조를 통해 자신이 ‘민족 주체성’을 세운 정권임을 과시하려 했다. 게다가 이를 통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한글의 전용화를 결정한 박정권이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계승자라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정권이 주도한 이러한 역사적 인물의 신격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결국, 박정권은 이순신의 신격화와 세종대왕의 찬양 정책을 통해 자신을 민족적 위기에서 구해낸 동시에 위대한 민족문화를 부활·발전시킨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Ⅵ. 맺음말
아직도 우리사회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남아있다. 오늘날 이만큼의 한국 산업화는 대단히 역사적 의미를 갖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성공했는가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성과가 있기까지 지불한 많은 비용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박정희의 얄팍한 속셈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 시대는 역사적 연구와 교훈의 대상이지, 향수와 모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정희는 영웅이나 악인이 아니라,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차분하게 분석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제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당한 평가가 이뤄질 때가 되었다.
※ 참고문헌
김영수, 「박정희의 정치리더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장면·윤보선·박정희 :1960년대 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 백산서당, 2001
신용구,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뜨인돌, 2000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창비, 2003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2000
한국정치연구회 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1998
한승조, 「박정희 붐, 우연인가 필연이가」, 말과 창조사, 1999
<참고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