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새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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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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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2.서낭당은 원시 석전시대의 병참기지였다.

3.풍수지리설의 신비

4.화랑은 모계사회의 궁남들이었다.

5.의자왕과 3천 궁녀의 허구

6.삼국통일은 허구이다.

7.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8.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

9.훈요십조 제8조 호남기피에 얽힌 비밀

10.묘청은 반역자가 아니다.

11.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12.성삼문과 신숙주

13.조광조는 편집된 이상주의자

14.임진왜란과 김성일의 책임

15.이순신과 원균

16.환곡과 장리쌀

17.당쟁은 식민지사학의 희생양

18.광해군을 위한 변명

19.김옥균의 생애

20.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21.대원군과 개혁정치

22.명성황후의 초상은 없다.

23.기미년 3월1일에 있었던 일

24.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

25.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26.이승만과 김구

27.김일성의 진위논쟁

28.두계학파와 실증주의 사학의 허구

29.오역의 역사

30.기독교의 수용과 현실

본문내용

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오 생활 터전이었던 낙동강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저술은 이중환의 택리지 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다. 그런데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에 있으면서 목호룡사건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 김씨 김일경의 고변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 현대사의 아린 상처를 남긴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는 오랜 역사성을 가진 집단 따돌림이었다.
10.묘청은 반역자가 아니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신화는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세뇌를 통해 이제는 사실처럼 위장된 허구를 의미한다. 이러한 허구가 우리에게 고정 관념으로 정착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름을 고려하고 지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받은 듯이 위장했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좁은 남쪽의 삼한에 안주하려고 했던 왕건의 소심함이 우선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반도 사관에 대하여 가장 분노를 느꼈던 사람이 바로 고려인종 때의 승려인 묘청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묘청은 요승이며 그가 거사했던 사실을 묘청의 난이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다. 이것은 고려사를 쓴 정인지의 잘못도 있지만 그후 신라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남방계 역사학자들과 일본 식민지사학자들의 그릇된 기록 때문이었다.
묘청은 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자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묘청의 이같은 생각은 송도의 유생들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들은 묘청이 서경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지방색 때문에 서경 천도를 주장한다고 몰아 붙였다. 이에 묘청은 여러 가지 묘책을 썼으나 공교롭게도 이 무렵 서경의 궁궐인 대화궐이 벼락을 맞아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런 틈새를 타고 송도파의 반격이 거세지자 인종도 마음이 흔들려 서경 천도를 멈칫거리기 시작했고 이에 초조해진 묘청이 반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부하의 손에 죽임을 당해 그의 고구려 정신도 사그라지게 되었다.
이시대에 묘청을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고구려의 정신을 망각하도록 끊임없이 세뇌된 신라 중심사의 신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결코 반도 민족도 아니었고 약소 민족도 아닌 대륙 민족으로서의 기백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의 동력과 암시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묘청은 결코 반역자가 아니었으며, 묘청의 난 또한 묘청의 고토회복운동이라 불러야 한다.
11.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에 대하여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다름 아닌 최만리라는 인물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역사에 의하면 그는 한글의 창제에 반대했고, 이 사실로 인하여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사실의 과장과 왜곡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신하보다도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일을 공경스럽게 생각했고 왕을 아낀 인물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한글을 창제하신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하여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임’을 경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이어가면서 몇 가지 우려를 했다.
첫째로 한글을 쓰노라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둘째로 최만리는 한글창제가 집현전의 고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동궁과 함께 집현전의 몇몇 소장 학자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의사청에 불려가 일을 처리하는 데 대한 불평을 담고 있다. 셋째로는 음운학상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에 대한 설명인데, 이는 최만리 자신도 한글 창제에 참여했던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이므로 그를 탓할 일이 못된다. 넷째로 최만리의 상소에 담겨 있는 간절한 사연은 그가 세종대왕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최만리의 실수랄 것도 없지만, 굳이 있다면 그 시대의 사조였지 그가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분이었고 그를 기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인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서 다른 인물을 상대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만리를 헐뜯는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찬성했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낮아지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12.성삼문과 신숙주
단종애사를 읽으면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에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신숙주와 성삼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와 같은 소설적 공간에서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그렇다.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요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햇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신숙주가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벗들이 참형을 당하는 순간에 함께 죽지 않았을 때 인간적인 괴로움이야 없지 않았게지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는 사직을 생각한 것이지 일신의 영달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숙주와 성삼문의 만남과 헤어짐에는 두 사람 모두 가상하고 장한 데가 있다. 신숙주는 살아남아 영락제의 무덤 앞에서 결심했던 바를 이룸으로써 조선조 5백 년 왕업의 초석을 이룩했다. 성삼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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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8.25
  • 저작시기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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